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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남 Aug 05. 2019

애플 덕후의 박스 정리

한 때 좋아했던 것에 대한 비움



나는 애플 회사의 제품을 상당히 좋아한다.

수능이 끝나고 주변 친구들이 하나 둘 로즈골드색상의 6s신형 아이폰을 손에 들고 등교해 이것저것 자랑하고 다닐 때, 나는 아버지한테 조르고 졸라 아이폰6 골드 색상을 손에 얻었다.

그게 내가 가진 첫 애플 회사의 제품이었다. 너무 행복해서 신형이 아니어도 만족했다.

그 이후로 아르바이트를 하며 모든 돈으로, 맥북, 아이패드, 애플 펜슬, 에어 팟, 키보드 그리고 11개월 전 새로 바꾼 아이폰 8 plus까지. 지독하게 내 주변의 전자기기를 사과 로고로 가득 채웠다.

그러다 보니 방 한편에는 큼지막한 사과 로고의 빈상자가 켜켜이 쌓여갔다.

한 때 쌓이는 만큼 애플에 대한 나의 애정도를 확인하는 것 같아서 내심 마음이 든든해져 갔다.


그러던 어느 날 무심코 바라본 박스 뭉텅이는 먼지 구덩이 속에서 잊혀가고 있었다. 바라보자마자 한 가지 생각이 들었다. '내가 왜 저걸 남겨뒀을까?'

더 이상 박스들은 나에게 큰 의미를 주지 못하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물건을 비워내는 연습을 하면서, 간과? 보다는 외면 했던 부분으로 오늘에야 마음을 먹고 비움을 실천한다.

'언젠가는 다시 팔지 않을까?'

물건을 구매한 순간부터 상자를 버릴 수 없게 만든 마법의 주문이다. 반드시 제값을 주고 팔리라는 굳은 의지를 다지며, 설면서과 애플 로고 스티커, 심지어는 본품을 감싸고 있던 비닐커버까지.

지독하게 모든 것을 보관해놓은 나는 장사의 신도 아니면서 되팔 생각만 가득했던 것 같다.

 물건을 구매한 첫 며칠 동안은 손에 받들고 조심히 물건을 다루게 된다. 하지만 이내 늦어버린 수업이나 유난히 미끄러웠던 손, 혹은 나빴던 내 기분으로 물건은 이리저리 흠이 나기 시작한다. 조심히 사용한 맥북도 이어폰 단자 주변에 자잘한 찍힘 자국이 있으며, 애플 펜슬은 촉이 약간 뭉툭해져 있고, 아이패드 또한 별반 다르지 않다.


물건을 사자마자 되팔 생각을 하는 것이 마냥 나쁘지는 않지만, 내게 있어서 그 감정은 한편으로 이 물건이 완전한 '내 물건'이라는 생각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마치 누군가에게 빌려 쓰다가 다시 돌려준다는 기분? 미니멀 라이프를 실천하며, 다짐한 것이 내 손안에 들어온 물건이라면 그 가치를 다하도록 충실히 사용하자는 것이다.

충실함이 핸드폰의 흠집과 노트북의 찍힘으로 설명되는 것은 아니지만, 몇 년이 지나도 굳이 바꿔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도록 꾸준하게 사용하는 것과 새로 바꾸는 타이밍은 물건이 그 역할을 다 해서 문제가 생겼을 때이다. 가령 노후로 인한 고장 같은? 부품이 낡아서 교체하려면 종종 그 비용이 새로 사는 것과 맞먹는다. 고장 난 부품을 매입하는 업자도 있지만, 아마 그 가격은 내가 생각했던 속칭 '풀박/A급/에누리 사절'의 두둑한 가격이 아닐 것이다.

물건이 고장 나기 전까지 굳이 바꿀 생각이 없다.라는 당연하지만, 꽤나 굳은 다짐은 순식간에 7개의 크고 작은 백색 상자를 무의미한 존재로 만들어버렸다.

더 이상 높은 가격을 받기 위해 되팔 필요도, 신줏단지 모시듯 내가 물건에 귀속된 듯한 느낌을 받을 필요도 없어졌기 때문


박스를 하나씩 열어보기 시작했다.


2017년 4월에 구매한 맥북 프로. 무거워서 들고 다니기엔 무리지만, 무거운 프로그램(어도비 제품)을 돌리는데 매우 든든하게 제 역할을 해줘서 너무 만족스럽다. 때론 상판의 애플 로고에 취해 쓰다듬어주기도 하고. 되팔 생각에 남겨뒀던 본체 포장비닐도 무려 2년여간 통에 들어 있었다. '설마? 혹시? 언젠가는?'은 정말 지독하게 무서운 생각인 것 같다. 물건에게 우리 집을 기약 없이 장기 대여해주게 되니 말이다.

용도를 알지 못하지만, 필요해 보이는 전선과, 닦는 용도의 클리너 타월만 남기고 플라스틱과 종이를 구분해서 버렸다.


2018년 초에 구매한 아이패스 6세대 그리고 애플 펜슬, 휴대용 키보드. 아이패드 6세대는 교육용으로도 참 좋지만, 미니멀리스트에겐 정말 없어서는 안 되는 물건인 것 같다. 가볍게 들고나가기 좋고, 때로는 ebook리더기로, 때로는 수업자료물로 때로는 노트북 대용으로. 활용할 의지가 있다면 무궁무진하게 사용할 수 있는 아이패드로 나는 저번 학기 굉장한 분량의 종이를 절약했다고 느꼈다.


2018년 11월에 구매한 아이폰 8 플러스. 기존에 사용하던 아이폰의 액정이 나가버려서 급히 구매하게 되었다.

3년 뒤에 아이폰 8 플러스를 사고자 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벌써 신모델이 우르르 나와버려 이 모델은 이미 옛것이 되어가는 중이니까 말이다. 충전 케이블과, 어댑터, 그리고 유심용 핀을 제외하고는 모두 처분했다.

이외에도 에어 팟 케이스, 옛날 아이폰6 케이스에 정품 커버까지.




모든 박스를 버리고 내게 남은 것은 한 줌도 안되었다.

 잊은 줄 알았지만, 두 개의 케이블을 발견해서 매우 기분이 좋았다. 최근 케이블 하나가 3년을 넘게 사용하다 보니 약하게 금이 가기 시작해서 새로 사야 하나 고민 중이었는데, 이렇게 선물처럼 발견하다니.

박스를 비워내 집 한편이 깔끔해졌다. 한 때 이게 바로 감성이라는 마음에 쌓아놨던 박스는 없어졌지만, 박스에 담겨 온 제품들은 내 주변과 삶에서 풍성하고 양질의 기능을 하고 있다.

그걸로 충분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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