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남들 기준에 맞추며 살지 않아도 돼
대학시절 조별로 그룹을 짜서 과제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자유롭게 인원을 모아 주제에 따른 아이디어를 짜고 보드에 그림을 그린 후 조별로 발표하는 형식이었다. 난 잘하는 친구들과 조를 맺기 위해 그 친구들 곁에 들러붙어 알랑방구를 껴대며 샤바샤바를 해댔고 내 정성을 알아줘선지 마음에 맞는 친구들과 조가 짜였다. 민폐를 주지 않기 위해 열심히 과제에 참여했고 드디어 발표날이 다가왔다. 난 과제도 끝났고 마음이 홀가분했기에 속 편한 자세로 앉아서 다른 조들의 발표를 기다렸다. 그런데 갑자기 우리 조 그림 잘 그리는 미대오빠가 긴 머리를 넘기며 갑자기 날 지긋이 바라보더니 속삭였다.
“포뷔야~ 우리 조 발표는~ 포뷔가 하렴~.”
“네? 오라버니 혹시 뭐 잘못 드셨어요? 제가 발표를 왜 해요? 그게 뭔 (헛) 소리세요?””
“후훗~ 네가 하는 게 좋을 것 같톼~”
“오라버니! 잘 뽑아낸 과제 제가 말아 마시는 거 보고 싶으신 거 아니시죠? 저 무대 공포증 같은 거 있어서 사람들 앞에서 떨려서 말 잘 못해요! 절대 못해요! 절대! 절대!!!!”
“후후훗~ 괜찮아~ 이 오빠는 포뷔가 하는 게 딱 좋을 것이라 생각돼~”
“이 오라버니가 왜 이래!! 싫어요! 안 돼요! 못해요오오오!!”
난 조용히 발악을 했지만 결국 내 손엔 과제보드가 들려있었고 내 몸은 어느새 강의실 앞에 덩그러니 서있었다. 등에는 진땀이 흘러내렸고 날 보는 학우들의 수십 개의 눈알들은 마치 형광색 탱탱볼처럼 빛을 내는 것 같았다.
‘오마이갓뜨. 이 망할 상황을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바들바들 떨던 난 어찌어찌 과제발표를 시작하게 되었고 그날의 기억은 진땀을 한 바가지 흘리던 내 모습과 땀에 취해 헛소리를 나불거리던 내 입방정의 잔상으로 남아있게 되었다.
“오라버니!!! 도대체 왜 저한테 발표를 시킨 거예요!!! F학점이라도 받고 싶으신 거예요!!”
“후후훗~ 내가 했으면 분위기 딱딱했을 것이야~ 네가 해서 어쨌든 사람들이 웃긴 했지 않니~ 다 이 오라버니의 깊은 뜻이롼돠~ 후훗훗~”
뭐야 이식히가 사람들 웃기라고 날 올려 보낸 거야 뭐야. 그리고 난 진지한데 도대체 어떤 포인트에서 웃음이 났다는 거야!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난 발표 중간중간에 “긴장돼서 말이 안 나오네..”라던가 “이 그림을 왜... 그렸더라..?”라던가 “가만있어보자.. 이건 내가 그린게 아닌데..” 라며 혼잣말을 마이크에 대고 중얼거렸던 게 떠올랐다. 그날 밤 나는 이불킥을 이불에 구멍이 날 만큼 해대며 발표를 시킨 머리카락만 테리우스였던 미대오빠의 머리를 밀어버리는 꿈을 꾸며 저주를 퍼부었다. 난 당최 이해할 수 없었지만 우리 조 과제성적은 A가 나왔고 미대오빠는 무척이나 흡족해했으나 난 다시는 발표 같은 건 하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난 낯가림도 많고 내향적인 성향이라 사람들 앞에서 발표나 얘기를 하는 게 무척이나 두렵다. 그래서 정신줄이 순간순간 놓아지며 헛소리도 툭툭 내뱉기도 하는데 그 포인트에서 사람들이 웃는 경우가 많았다. 발표가 두렵다는 내게 내 오래된 친구는 사람들이 웃어주는데 왜 두려워하냐며 편하게 얘기하면 된다곤 하는데 난 일부러 웃기려고 한 것도 아니고 부끄러움도 많이 타는지라 발표하는 자리는 언제나 편하지가 않았다. 대신 3명 미만의 소규모 모임이나 일대일 만남, 술자리 같은데선 참으로 많이도 조잘거린다. 술자리는 사람들이 많아도 잘 떠드는 걸 보면 아무래도 맥주의 에너지를 받아 얼굴에 철판이 저절로 깔리는 듯싶다.
광고대행사 재직 시절 단체 회식이 있었다. 내 옆에는 최근 연애를 시작한 어여쁜 여직원이 있었고 대표님은 수줍어하는 그 여직원에게 연애를 시작해선지 많이 예뻐졌다고 칭찬을 해주셨다. 칭찬을 하시다가 옆에 앉아있던 나와 눈이 마주치신 대표님은 내게도 뭔가 얘기를 해야만 한다는 의무감을 느끼신듯했다.
“음.. 우리 포비는.. 음”
난 맥주의 힘을 빌려 대표님의 망설임을 해결해 드리고 싶었다. 냉큼 대답했다.
“대표님, 걱정 마십시오! 제가 지금은 많이 바빠서 예뻐지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다음 달까지는 기필코 예뻐져서 대표님이 제게 편히 말을 하실 수 있도록 준비하겠습니다!”
난 무척이나 진지한 마음으로 대답을 했건만 대표님과 직원들은 미친 듯이 웃어댔고 난 그제야 내가 또 뭔가 헛소리를 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입담과 헛소리의 실력은 있는 것 같은데 발표는 평생 두려워했던 나는 육아 후 사회생활이 끝나면서 앞으로는 평생 발표 같은 건 할 일이 없을 것이라고 당연히 생각했다. 하지만 역시나 뭐든 단언할 수 없는 게 인생살이라더니 내 앞에 아주 거대하고도 너무 거대해서 도무지 넘을 수 없을 것 같은 큰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북토크였다. 최근 나는 첫 책을 출간하게 되었고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기쁨과 행복의 파도에서 넘실거리던 난 저 멀리서 이를 번뜩이며 다가오는 북토크라는 상어 한 마리를 느끼기 시작했고 그놈을 그냥 잘 달래서 저 멀리로 던져버리고만 싶었다. 하지만 내 책을 내가 써놓고 내가 외면한다면 그 누가 내 책을 홍보해 주겠냐며 이건 해야만 하는 일이라고 주변 지인분들과 내 내면의 소리가 내게 외쳐댔다. 고민이라곤 없는 나란 여자 또 고민에 빠져들었다. 눈 딱 감고 해야 하는 걸까. 그랬다간 눈을 딱 감고 기절해 버릴 것 같은데. 2시간이라는 천근같이 긴 시간 동안을 내가 과연 버텨낼 수 있을까. 한마디 말도 못 하고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앉아만 있다가 사람들이 나를 석고상인줄 알고 지나쳐버리면 어떡하지.
수많은 생각과 고민들이 나를 흔들어 댔지만 결국엔 북토크는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고민 따위는 우선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행동하기로 했다. 이왕 해야만 하는 일이라면 철저히 새롭게 완벽히 해내고 싶었다. 내가 가장 말을 잘할 수 있는 묘안을 떠올렸다. 바로 ‘술’이었다. 맥주는 내게 마법과 같은 존재라 떨리는 나를 우황청심환보다 안정을 시켜줄 것이고 굳어버린 입을 버터보다도 부드럽게 녹여줄 것이다. 그렇게 ‘낮술 북토크’를 기획하게 되었고 마케팅을 전공한 남편에게 이번 행사 전체 총괄을 맡긴 후 북토크 사회자로 유명한 엠씨분을 섭외했으며 동네에서 가장 으리으리한 카페를 대관했다. 도망가려야 도망갈 수 없게끔 일을 크게 벌여놨더니 이일을 어쩌면 좋으니 하며 다시금 멘붕이 스멀스멀 기어 왔지만 마음을 수십 번 다잡았다.
대망의 디데이, 튀고 싶었다. 저 포비 아닌데요 라며 그냥 관중석에 앉아 있고 싶었다. 정신 나간 생각은 집어치우고 사회자가 부를 때까지 대기석에 앉아있는데 너무 긴장이 돼서 눈알이 뒤집힐 것만 같았다. 목 열고 맥주 한 캔을 들이켜고 정신을 부여잡은 채로 무대로 나갔고 첫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그렇게 남들 기준에 맞추지 않아도 돼’를 쓴 유미경입니다”
오우~! 그런데 이게 웬일!! 레드썬 매직 스타트!! 말이 술술술 나왔다. 술을 마셔서 그런가 생각했던 말들이 술술술 나오기 시작했고 관중석에 앉아 내게 무한신뢰의 눈빛을 보내는 사람들을 마주하니 없던 용기가 저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끌어 올라왔다. 난 사회자와 함께 토크쇼를 하듯 부드럽게 행사에 젖어들기 시작했다. 처음의 긴장감은 생각보다 빨리 사라져 갔고 사회자와 미리 맞춰두었던 사전질문에서도 준비된 대답만이 아닌 즉석에서 생각나는 얘기들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왔고 갑자기 생겨나는 이벤트들에도 유쾌하게 대응할 수 있었다. 나중엔 전혀 떨림이 느껴지지 않았고 그저 이번 북토크 자체를 나 역시 즐기게 되었다. 그렇게 모두들 만족한 채 행사는 잘 끝나게 되었고 난 마치 꿈속에 있는 듯 몽롱한 눈빛을 한 채(취한 건 아니다) 스스로에게 마구 칭찬을 날려줬다.
엄청나게 큰 산을 가쁜 숨을 쉰 채 훌쩍 넘은 기분이었다. 만약 두려운 마음에 이번 북토크를 하지 않았다면 나는 평생 동안 후회하며 발표는커녕 어떤 모임도 시작해보지 못했을 것이다. 발표 공포증이 이번 행사로 모조리 사라진 건 아니지만 극 I성향을 가진 내게 이번 북토크는 새로운 도전이자 희망이 되었다. 사람을 모으고 그 사람들을 이끌어 나갈 수 있는 새로운 모임을 해보고 싶다. 잘해나갈 수 있을지 자신할 수는 없지만 이젠 나를 조금은 믿는다.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따뜻한 시선을 믿고 그분들과 많은 얘기들을 나누고 싶다. 지금 돌이켜보면 대학시절 테리우스 오라버니가 내게 발표를 시킨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다. 오라버니에게 퍼부었던 머리털 저주를 이제는 거둬들이고 싶다. 미대오빠의 찰랑거리는 머리털에도 언제나 기름기가 가득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