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의 추억

사기는 어떻게 당하는가

by hey hye jin

타향살이도 어느덧 7개월.

처음에는 낯설고 외로운 감정이 전부였는데,

이제 사는 꼴도 좀 갖춰지니 생활 속에서 더 다양한 감정을 느낀다.


출근용 복장으로는 셔츠만한 게 없다.

특히 다림질을 하지 않아도 되는 셔츠를 사랑한다.

이런 취향 덕에 다림질을 할 일이 거의 없지만, 아쉬울 때가 꼭 있다.

그래서 다리미가 가끔 아쉽다.


3년 살고 돌아갈 거라, 많이 쓰지 않는 것들은 중고로 직거래하려고 했다.

새 것을 사고 싶은 충동이 일 때마다 아마존 홈페이지 장바구니에는 '만약 산다면 이것'들이 잔뜩 담겨있다.

때마침 카페에 '만약 산다면 이것'이 올라왔다. 이전 비밀댓글이 있었지만, 혹시나 '팔렸나요'라고 물으니 아직 있단다. 바로 오픈 채팅방을 파고, 전달한다.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카페 글에 올려놓은 쇼핑몰 사진이 아닌 실물 사진을 요청했다. 금방 보내온 사진 '만약에 산다면 이것'이 맞았다. 날짜, 시간, 장소를 정하고 대화를 끝낸다.


다음날 5키로 남짓 거리를 걷기로 하고 약속 시간보다 2시간 먼저 집을 나섰다.

40여 분을 남겨두고 온 메시지


"생각보다 일찍 도착할 것 같은데 조금 빨리 봐도 되나요?"


구글맵을 보니 나도 그 정도 도착하겠다싶어 그러자했다.

그런데 10분 후,


"죄송한데, 장소를 OO으로 변경 가능할까요? 이사로 집 검사하는데 그쪽에서 일찍 온다고 집 가까운 출구에서 봐도 될까요?"


이때부터 작은 알람이 마음 속에 울렸다. '나도 낯선 지린에 이리 와라 저리 와라 하네', '아니, 양해를 나한테 구할 일이 아니라 뒤의 약속자에게 제 시간에 오라해야 하는 것 아닌가'라며 궁시렁궁시렁 거리다가 몇분 뒤


"지금 가는 중인데, 지리를 잘 모르니 도착하는 대로 연락하겠습니다"


이쯤부터는 이모티콘도 빠지고 사무적인 말투다. 거의 다와가서는 원하는 장소로 가겠다는 연락을 남겼다. 막판에 좀 헤매는 바람에 다급한 마음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하늘색 카디건을 입고 계단에 서 있겠다는 마지막 메시지. 바로 알아보고 물건을 담은 봉투를 건네받고 돈을 줬다. 살짝 열어보고 작동은 잘 되나요?라고 하나마나 한 질문을 했더니, 하나마나 한 답이 왔다. 이때, 사진과 물건을 대조했어야 했는데 상대는 달아나다시피 가버렸고, 시간과 장소가 여러번 바뀌는 과정에서 난 온전한 판단력을 잃어버렸다. 게다가 눈치 없이 소변이 급했다. 대강 꺼내본 다리미는 뭔가 많이 낡고, 허름해보였다. 그 사이 오픈챗방에서 상대는 나갔다. 정신을 차리고, 물건과 어제 사진을 비교해 보니 완전히 다른 모델의 것이었다. '하 속았구나'라는 생각과 동시에 쌍욕이 바로 터져나왔다.


같은 잘못을 반복하고 싶지 않아서 기록으로 남긴다.

사기를 치려고 마음먹은 상대는

1. 상대의 주의집중을 흐트려놓는 전략을 사용함. 예) 시간이나 장소를 자꾸 바꾼다.

2. 돈을 낚아채듯 받은 뒤 상대의 눈을 마주치지 않고, 얼른 달아남.

3. 그동안 접선했던 연락 창구를 즉시 차단함.


무료 나눔에도 나름 매긴 가치에 따라 골드 키위라도 사서 교환했는데, 아주 된통 당했다 싶었다. 바로 동생과 통화하니, 중고거래하다보면 그런 사람이 많단다. 아니 '그런 사람이 있다도 아니고 많다'니. 시간이 조금 지나고 나니 화는 사라지고 몇살 안 되어 보이던 하늘색 카디건의 그 사람이 안쓰러웠다. 도대체 어떤 삶을 살아왔길래 몇푼 안 되는 돈에 자신을 속이고 남을 속이는지 슬펐다. 타지의 삶이 빠듯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더이상 밉지 않았다.

1,500엔 짜리 스팀다리미. 적은 금액으로 큰 가르침을 얻었다. 스팀다리미는 집에 온 뒤로 구석에 밀쳐뒀다. 그런데 상대의 모습이 떠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