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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부하는 워킹맘 Apr 16. 2022

레벨 테스트

테스트가 뭐길래

평일 오후 두세 시경이면 초등학교 앞은 아이들로 성시를 이룬다. 어학원을 가기 위한 대기 행렬이다. 동네에는 대형 어학원이 없다. 버스를 타고 10km 이상 나가야 하지만 그래도 엄마들 사이에서는 인기다.


대형 어학원에 관심이 없던 나는 딸을 동네 작은 영어 학원에 보냈다. 올해 초부터는 그나마 다니던 영어 학원도 끊었다. 아이가 다니기 싫어했고, 휴직 기간만이라도 아이를 집에 데리고 있고 싶었다. 이후 우리는 넷플릭스의 만화, 어린이 영화를 보며 오후를 보냈다.


이제 아이는 새 학년이 되었고, 나는 2주 후면 회사 복직이다. 집에서 계속 같이 시간을 보낼 수 없으니 다시 학원을 좀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학년도 올라갔으니 이참에 대형 어학원을 알아보기로 했다. 마침 동네 언니가 얘기했던 OO어학원이 떠올랐다. 아이 공부에 열성적인 엄마이다. 대형 어학원 이야기를 꺼내니 딸도 OO어학원에 다니는 친구들이 영어를 잘한다며 다니고 싶은 기색이다.


어학원에 전화를 걸었다. 안내 직원은 테스트와 상담에 두 시간가량 걸린다고 했다. 마지막에 테스트비용 3만 원이 든다는 얘기도 잊지 않았다. 무슨 테스트길래 돈까지 받는 걸까?


테스트 당일 아이를 데리고 지하철을 탔다. 지하철역을 나오자마자 대형건물이 보였다. 학원과 여러 상가로 빽빽한 건물이었다. 빨간색 학원 간판은 길눈 어두운 내게도 잘 보였다. 아이는 신이 나 있었다. 대형 버스를 타고 다니는 친구들이 부러웠나 보다.


건물에 올라가니 약속 시각보다 30분이나 빨랐다. 곧 원장으로 보이는 남자 하나가 다가왔다. 아이가 지문 테스트를 본 적이 있냐는데, 어떤 건지 감이 오지 않았다. 잘 모르겠다고 하니, 해당 학년 평가 단계 중 가장 어려운 것으로 테스트해 보겠다고 했다. 혹시 하다가 안 되면 멈추겠다는 말과 함께 말이다.


10분이나 흘렀을까? 바쁜 발걸음의 원장님이 다시 찾아왔다. 처음에 시도한 어려운 단계는 힘들다는 이야기였다.

”시험을 멈추고 낮은 단계로 다시 볼까요? 아니면 그만할까요?“

기왕 3만원 내기로 한 거 뭐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에 낮은 단계로 진행해달라고 했다.


얼마 후 테스트를 끝낸 아이가 나를 찾아왔다. 문제를 거의 못 푼 것 같은데 괜찮냐고 묻는다. 전혀 문제가 없다고, 괜찮다고 아이를 안심시켰다.

‘잘하면 학원 왜 오겠어. 수준에 맞춰 배정받고 그때부터 열심히 하면 되지.’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며 기다리는데 원장님이 왔다. 아이에게는 상담실에 비치되어 있던 젤리를 건네며 밖에 나가 있으라고 한다. 어학원답게 영어를 쓰고 있었다.

“어머님 결론부터 말씀드릴게요. 이 친구는 우리 학원에 다니기 힘듭니다.”

네? 처음에 테스트했던 수준 높은 문제를 보여주는데 아이가 당연히 못 풀었겠다 싶었다. 영어로만 된 긴 지문과 질문을 보고 답을 찾아야 했다. 이렇게 공부한 적이 없으니 제대로 풀 리가 없었다. 그런데 단계를 낮춰서 푼 것도 최소로 맞춰야 할 개수보다 4개가 모자란다고 했다. 1-2개면 오차라고 보겠지만 4개면 확실히 실력이 부족하다는 이야기였다. 머릿속에서 살살 스팀이 올라왔다.


내 표정을 살피던 원장님은 쉬운 단계로 다시 한번 테스트를 보겠냐고 물었다. 그러자고 했다. 아이는 영문도 모르고 또 어느 방으로 갔고, 10분 후에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돌아왔다.

“엄마, 이거 절반도 못 풀고 찍었는데 괜찮아?”

괜찮다고 위로했다. 속으로 몇 개는 더 맞았을 거라는 믿음을 품고서 말이다.


원장님이 잰걸음으로 들어오더니 컴퓨터 화면을 켜고 결과를 설명해줬다.

“아까와 동일하게 9개를 맞았네요. 이전 테스트보다는 뭔가 일관성 있게 풀었어요. 쉬운 문제는 1-2개 틀리고, 어려운 걸 주로 틀렸네요.”

원래 테스트와 상담만 받고 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 학원에 다닐 수 없다는 말은 오히려 더 보내고 싶게 했다.

“꼭 14점 이상 되어야 학원을 다닐 수 있나요?”

“네, 정해진 커트라인을 넘지 않는 아이는 받을 수 없는 게 본사 지침입니다. 다른 학원을 찾아보셔야겠네요.”


원래 테스트비는 받아야 하지만 지인 소개로 왔으니 받지 않겠다고 했다. 3만원을 아꼈는데 기쁘기는커녕 씁쓸했다. 이전에 강남 사는 지인과 영어학원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적 있다. 요즘은 영어 학원 레벨 테스트를 위해 따로 과외를 하기도 한다며 딸 영어 공부에 신경을 쓰라는 이야기였다. 당시에는 남의 동네 일이라며 듣고 흘렸던 이야기인데 이제야 떠올랐다.


상담 후 배고프다는 아이를 데리고 학원 근처 김밥집을 찾았다. 아무 것도 모른채 허겁지겁 돈까스 김밥을 먹고 있는 아이가 왠지 얄미웠다. 레벨 테스트 통과 못 한다고 큰일 나지 않는다며, 별거 아니라며 스스로에게 계속 최면을 걸어보지만 쉽지 않았다. 10분도 참지 못하고 아이를 향해 결국 한 마디 뱉고 말았다.

“어떻게 기본 레벨 테스트를 통과 못해? 그동안 읽으라는 영어책은 읽지도 않았지?”

한 번이 어렵지 입을 열고 나니 담지 못할 말들이 쏟아졌다. 아이는 잎에 김밥을 가득 문 채 눈시울이 빨개져 가고 있었다. 1부로도 모자라 2부, 3부 이어지는 잔소리는 이성을 잃은 마녀의 부르짖음이었다. 결국, 아이는 펑펑 울고 있었다.


우는 아이를 보니 다시 제 정신으로 돌아왔다.

‘아이 자존감을 떨어뜨리는 말은 하지 않았어야 했는데.’

이번 테스트는 딸 아이만 받은 게 아니라 나도 함께 받은 것 같았다. 테스트 하나에 아이를 향한 믿음이 송두리째 흔들렸으니 엄마로서 거의 낙제점이다. 엄마의 마음도 이렇게 테스트받는 줄 알았다면 좀 더 단단하게 동여매고 왔을 텐데. 아직은 엄마로서 여물지 않았다는 걸 확인한 그 날 저녁, 봄 날씨에 어울리지 않게 바람이 매섭게 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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