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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하 노피곰 도다샤. 다시 정읍

오랜 친구와 떠나는 첫 여행은 정읍이다

by 천둥벌거숭숭이

흐르는 시간을 손으로 잡을 수는 없다. 하지만 영원했으면 하는 순간들은 언제나 존재한다.

친구의 오랜 연애가 끝이 났다. 아름다운 시작이었지만, 끝은 허무하고 마치 급하게 꺼진 불씨처럼 검은 재로 여기저기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내가 특별히 해줄 것은 없지만, 함께 할 수는 있다.

새롭게 맞이하게 될 솔로의 시간을 환영하기 위해 조금은 먼 곳으로 가고자 한다.

정읍. 샘의 도시. 물이 맑은 곳에 가면 우리의 마음도 조금은 더 맑아지지 않을까.

부산에서 정읍까지는 쉼 없이 달려가야 4시간 남짓 걸린다.

10년이 넘도록 장롱면허였지만, 이제 막 운전을 시작한 친구가 운전하고 싶다고 했다. 친구야, 네가 운전을 한다면 우리는 제시간을 넘어 영영 도착하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 나를 믿어봐.

새벽 5시부터 출발하는 길은 새까만 어둠으로 뒤덮였지만, 곧 해는 떠오르니까.

섬진강휴게소에서 바라본 하늘과 4시간만에 만난 정읍역 공영주차장
정읍역 뒤편에 위치한 공영 2 주차장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차들을 부지런히 달린다. 각자의 이야기를 싣고 묵묵히 어디로들 가시는지.

친구의 최근 근황을 들으며 가는 길의 차 안은 설렘과 기대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장시간 운전에 휴식은 필수. 오늘의 쉼터는 섬진강 휴게소. 상행선과 하행선을 잇는 다리가 고전적이다(낡았다는 표현의 순화버전).

날은 어느새 환해져 있었고, 가을이 오면 으레 떠나야 하는 이들이 모인 장소로 휴게소 안이 가득하다.

다들 내장산으로 가시나요? 저희도 곧 갑니다. 간단히 주전부리를 먹고 다시 페달을 밟고 핸들을 조작한다.

오랜만입니다. 정읍역.

정읍역 주차장은 언제나 만석이다. 내비에 정읍역 주차장을 찍으면 공영 1 주차장을 가리킨다. 하지만 나는 공영 2 주차장을 이용한다. 늘 한산하기 때문이다. 바로 옆에 있음에도 사람들은 공영 1 주차장으로 향한다. 정읍역을 이용하시는 차량이용객들은 공영 2 주차장에 한 번 가보시길. 어르신 전용 주차공간과 여성전용 주차공간까지 넉넉히 준비되어 있습니다. 평일 저녁과 밤, 그리고 주말은 이용료가 무료입니다.

달하 노피곰 컨퍼런스센터와 카페 메뉴
달하 노피곰 카페 웰컴음료 딸기 요거트 스무디 최고

약속시간은 10시. 9시 15분 정읍역 도착. 제일 멀리서 출발했지만, 일찍 도착한 것은 아닐까.

나보다 일찍 온 사람이 몇 명 있다. 멀리서 오는 사람들은 전날부터 숙소를 이용할 수 있다는 소식에 어제부터 도착한 사람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일찍 온 사람들에게는 이점이 주어진다. 바로 달하 노피곰 카페에서 마시는 웰컴음료. 나의 선택은 딸기요거트스무디. 아침을 거른 사람은 달디단 음료로 칼로리를 채운다.

달하 노피곰 바로 옆이 컨피런스 센터다. 선택하는 여행. 리보 3기에 선정되어 1박 2일 동안 정읍을 돌아보는 여행을 할 예정이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은 하얀색 단체 티셔츠와 이름표. 단체 관광객 혹은 어린이들이 되어 인솔자들을 부지런히 따라가면서 정읍을 여행할 예정이다. 엄마가 아닌 단짝과 함께하는 여행에 조금씩 실감이 나는 중이다.

정읍사문화공원 내 아양사랑숲과 축제현장
정읍사문화공원과 천년의 기다림, 여인의 망부석

정읍 리보 투어 3기의 여행 테마는 역사, 휴양, 액티비티 중 하나를 선택해 정읍을 돌아보는 것이다.

역사가 강렬히 당기지만, 역사유적지나 박물관은 여럿이서 가는 것보다 혼자서 천천히 돌아보는 것을 즐기는 사람이므로 과감히 패스, 친구와 함께하는 휴양코스로 정했다.

총 4명씩 5개의 조가 만들어졌고, 액티비티 1조, 그 외에는 모두 휴양을 고른 사람들로 이루어졌다.

10월은 지역축제의 계절. 정읍에도 많은 축제가 진행되고 있었고, 그러므로 이번 여행은 큰 차 없이 각 조의 조장의 차로 여행을 하게 되었다. 시간도 단축하고 오히려 좋아.

첫 번째 목적지는 백제가요 정읍사 문화공원이다.

천년의 기다림. 달님에게 소원을 비는 여인의 망부석이 있는 곳이다. 정읍중학교에 주차를 하고 부지런히 정읍사문화공원으로 걸어갔다. 조금씩 비가 내리는 것이 심상치 않은 날씨다. 이렇게 흐린 날 사진이 잘 나온다.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보자.

정읍사달빛사랑숲 안내표와 스티커 보물찾기
소원을 이루어주는 사랑달

흥겨운 춤사위로 마치 우리를 맞이해 주는 것만 같은 정읍사문화공원에서의 시작이 즐겁다.

간단한 설명을 들은 후에 시작된 보물 찾기는 리보에서 준비한 스티커를 찾는 것이다.

아주 오랜만에 하는 보물 찾기에 열이 바짝 올랐다. 하지만 쉬이 보이지 않는다.

공원 사이사이에 자리 잡고 있는 조형물에 붙어있다고는 하지만 내 눈에만 보이지 않는 것인지.

겨우 하나를 찾았고, 1시간을 이리저리 돌아다녔지만 결국 찾은 것은 스티커 한 장이다.

정신없이 돌아다니다 보니 이제야 내가 어디 있는지 주변을 둘러보게 된다. 나 혼자라면 쉽게 포기했을 테지만, 친구와 함께하니 더 열의를 가지게 된다. 벌써부터 옆에서 땀을 한 바가지 쏟고 있는 친구를 보며 다시 전의를 일으키지만 떨어진 체력은 쉽게 올라오지 않는다.


천년의 기다림에도 굳건하게 서있는 망부석. 달님에게 더 높이 떠 있기를 바라며 기다리는 이의 밤이 환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정읍사에 그대로 녹아 있다.

간절한 마음은 지금도 존재한다. 누구나가 품고 있는 소망을 빌어볼 수 있는 곳. 사랑달을 이리저리 보면서 스티커를 찾았지만 누군가의 흔적만이 남아있을 뿐. 다만 남아있는 사랑달에 나의 소망을 담아본다.

그렇게 열심히 찾았지만 우리 조에서는 스티커 단 2장(나 1장, 친구 1장)만 찾았다(다른 조원은 데이트를 야무지게 즐겼나 보다). 5조에서는 17장이나 찾았다. 이 사람들이 범인이다. 이미 다 쓸고 간 곳에서 스티커를 찾는 어리석은 영혼이었구나.

차라리 보물 찾기를 일찍 포기했더라면 정읍사문화공원에서 진행 중인 행사를 야무지게 즐겼을 텐데.

그래도 정읍시민들에게 나누어주는 오리고기와 치킨을 맛보고 도장까지 야무지게 획득한 것은 비밀이 아니다.

정읍사문화공원 정읍맛집 새미찬 셀프비빔밥
줄 서서 담다 보니 욕망의 비빔밥 완성

이렇게 땀을 흘렸으면 밥을 먹는 것이 무조건 옳다.

정읍사문화공원 바로 앞에 위치한 새미찬은 정읍맛집으로 인정받는 곳이다.

출발 전부터 오픈채팅방에 점심메뉴 투표에서 당당히 1위를 차지한 비빔밥을 먹기로 한다. 현지인 추천은 언제나 신뢰도가 높다. 비록 담당자는 다른 메뉴를 먹었지만.

셀프 비빔밥은 직접 재료를 골라서 자신의 그릇에 담아 비벼 먹는 것이다.

20명 남짓한 인원이 줄을 서서 재료를 담는다. 허기와 기다림과 넘치는 욕망이라는 탈을 쓴 인간은 자신이 가진 위의 크기를 간과한 채 종류별로 다 담고 말았다.

욕망의 비빔밥은 거대하고 다채롭다. 인공감미료를 넣지 않고 만들었다는 재료에는 각자가 가진 고유의 맛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자극적인 입맛의 소유자는 쉽게 당황했지만, 고추장맛으로 기꺼이 돌파해 간다.

엄마가 오면 참 좋아할 곳이다. 다음에 정읍을 다시 방문한다면 꼭 들러야지.

그렇게 내가 저지른 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기 위해 부지런히 숟가락을 들었지만 쉽지 않다. 최선의 식사를 마치고 장렬하게 패배한 전사는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언제나 식탁 앞에서 과욕은 금물이다.


이제 겨우 점심을 먹었을 뿐이지만, 하루를 온전히 다 쓴 기분이다.

남들보다 이른 시간부터 움직여서 그렇게 느낄 수도 있다.

해도 뜨지 않은 깜깜한 새벽을 달리는 기분은, 내 안의 갇혀있던 틀을 깨부수는 것과도 같았다.

그리고 오랜 시간 함께했던 친구와의 여행이라는 점이 무엇보다 특별하다.

긴 연애의 끝은 고독만이 남는다. 연인관계란 모든 이해할 수 없는 인간관계를 초월한 만남이자 당사자들만의 삶으로 점철된 시간을 공유한 단 두 사람만의 이야기가 있다.

소란했던 시간이 허무로 다가올 때. 기꺼이 슬픔을 받아들이는 사람과 외면하는 사람, 다시 손을 내밀어보는 사람들도 분명 존재할 것이다. 나는 친구가 지금 이 순간을 덤덤히, 지나간 시간들을 토대로 더 멋진 사람이 될 거라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동안 함께하지 못한 것들을 일부러 시간 내서 친구와의 시간을 공유하고 공감할 인생의 순간을 만드는 것, 그것이 이번 여행의 내 목표다.

선택하는 여행, 우리의 테마는 휴양. 그리고 가을에 만나는 내장산의 모습은 어떠할지 벌써부터 기대가 크다.

내 생에 두 번째 만나는 내장산과 친구. 그리고 나와 함께 이 여정을 함께할 이들이 있어 조금은 마음이 뭉클하다.

든든한 포만감과 시작되는 내장산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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