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큐레이션과 전시작이 일품, 구내식당은 덤인 구포도서관
질문을 참 좋아하는 사람이다.
누군가를 알아가는 데에 질문만큼 좋은 관심이 없고, 답변만큼 서로에 대한 호감을 알아가는데 더 좋은 것이 있을까.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취향이 그 사람이 뱉어내는 말에 스며들어 있다. 그래서 나는 특히 책 읽기를 좋아하는가 보다. 이해하기 어렵고 설명하기 모호한 나의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기에 글이 적격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느 날은 책을 고르는 것 자체가 싫어질 때가 있다. 그런 경우에는 책을 소개하는 유투버의 영상을 찾는다.
남들이 읽지 않는 책이 읽고 싶어졌다. 찾고 찾고 찾다 보니 금단의 영역까지 와닿은 기분이 든다.
그렇게 만난 책의 이름은 [소돔의 120일].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괴랄한 것, 지저분한 것, 끔찍한 것. 그 이상을 담은 책.
심지어 영화까지 만들어졌다는 충격적인 이야기. 영화를 소개하는 영상까지 보았더니 궁금증이 극에 달한다. 차라리 1975년도에 만들어져서 다행이라는 어느 한 유투버의 말이 와닿는다. 기술의 도태가 있었기 때문에 영화를 다 볼 수 있었다고. 배우들의 어색한 연기와 더불어 괴랄한 장면들이 현실에 와닿지 않았기에 다행이라고.
얼마나 이상하길래. 어떻게 해서든 읽고 싶은 책이 정해졌다.
그래서 나는 그 책이 있는 구포도서관으로 향하게 되었다.
수국이 아름답게 핀 초여름에 왔던 기억이 스멀스멀 떠오른다.
선명한 자기 색을 뽐내던 잎들은 저물고 그 흔적만이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다.
그래도 반가워. 언제나 너의 자리에서 자신의 시간으로 살아가는 네가 있어서 다행이야.
부디 내가 읽고자 하는 책이 그 자리에 있었으면 하는 소망을 담아 힘차게 입구를 통과한다.
집에서 구포도서관까지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최소 1시간 30분. 넉넉하게 잡으면 2시간 정도 소요된다.
수고한 나 자신에게 정수기물을 공급하며 옆에 있는 텀블러 세척기를 본다.
참 좋은 세상이다. 일회용품 사용을 줄이기 위해 다회 사용할 수 있는 텀블러 사용을 권장하는 것.
개인이 사용하는 텀블러를 세척해 주는 기기가 도서관에도 생겼다.
씻어서 가지고 나왔지만, 어떻게 작동되는지 보고 싶어서 한번 안내 지침을 따라본다.
시원한 물줄기로 씻어내는 모양이다. 커피나 다른 음료를 먹고 난 후 사용하면 정수물을 온전히 마실 수 있다.
복지가 날로 좋아지는 것이 느껴진다.
도서관만큼 개인의 취향이 돋보이는 곳이 또 있을까.
문적원 입구에 북큐레이션이 진행 중에 있다.
청소년문학 추천 도서에 덕후 이야기가 눈길을 이끈다.
좋아하는 것을 하다 보면 자신이 알고 싶은, 혹은 하고 깊은 분야의 깊이가 깊어진다. 모두와 대화할 수는 없지만 취향과 결이 비슷한 사람과 함께라면 밤을 지새워도 할 이야기가 무궁무진하다. 언제나 다른 이들의 생각이 궁금한 사람은 모든 것을 흥미롭게 바라보게 된다.
그리고 나는 오늘 구포도서관에 방문한 목적을 달성한다.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발행하자마자 금서로 지정될 정도로 어마무시한 내용을 담은 책의 이름은 [소돔의 120일].
소돔이라는 지방에서 120일간 벌어진 이야기.
인간의 욕망에 제약이 없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들여다볼 수 있는 아주 흥미롭고 지저분하고 때로는 추악한 내용이 세세히 나열되어 있다.
다행히 자리가 한산하여 옆사람 눈치 보지 않고 읽을 수 있었다. 도서관에서 읽기에 심히 불온서적이라 아니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도서관 바로 앞이 지방교육청이라니. 심히 교육적인 공간이라 아니할 수 없다.
낯 두꺼워지는 책내용에 심히 집중하다가도 누군가의 인기척이 들리면 화들짝 놀란다. 결국 다 읽지 못하고 대출해서 집에서 다 보기로 마음을 먹는다.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있고, 어떤 이들의 생각은 보통의 상상력을 뛰어넘기도 한다. 그래서 반드시 다 읽어내고 싶다.
평일의 도서관이 이렇게 한산하다니. 혹은 공부하는 사람들이 모두 열람실에 갔기 때문에 책 읽기에 최적의 공간이 된 것은 아닐까.
평소에 다양한 책들을 읽어 버릇해서 부산에 소재해 있는 대부분의 도서관을 다 둘러보았는데, 그중에 북구에 위치해 있는 도서관들은 다른 지역보다 관리가 잘 되어 있다. 도서관에서 앉아 책 읽을 자리를 다른 사람이 선점하여 하루 종일 공부하지도 않으면서 자리만 잡는 사람들의 병폐를 막아두니 책 읽는 사람에게는 더없이 좋은 도서관이 되었다. 부산시 전체 도서관도 이렇게 관리되면 참 좋을 것이다.
야무지게 이동하고 원하던 책까지 구했으니, 이제는 밥을 먹을 차례다.
구포도서관은 생각보다 크다. 여러 개의 건물이 공존해 있는데, 그래서 그런지 구내식당까지 마련되어 있다.
바로 하늘정원이 매점이자 구내식당을 차지하고 있다.
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간단히 허기를 채울 수 있다는 극강의 장점을 보유하고 있다.
급식처럼 국과 반찬이 고루 나오는 정식을 시킬 수도 있었지만, 한결같은 인간인 나는 오늘도 변함없이 돈가스를 시킨다. 구포도서관 돈가스는 오천 원. 굉장히 합리적인 가격이다.
무인 발매기에서 식권을 뽑고 기다리면 어느새 번호가 불린다.
직접 만든 수프가 희미한 오뚜기 수프의 맛과 닮았다.
돈가스는 진짜 급식에 나오던 냉동 돈가스를 튀긴 맛. 돈가스 소스에 약간의 변주를 한다. 양파를 더 넣고 푹 끓여 파슬리를 얹는 것. 5천 원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최고의 돈가스 정식이다.
수제로 만든 돈가스의 맛과 비교할 수는 없다. 멀리 나가지 않고 간단히 먹을 수 있는 것으로 만족.
최근에 맛있는 돈가스를 먹었다면 만족할 수 없지만, 오랜만에 외식이라거나 배가 극히 고픈 사람이라면 충분히 만족시킬 수 있는 맛이다. 그러나 오늘 나는 그렇게 배가 고프지 않았다.
다음에 구포도서관에 방문한다면, 인근에 있는 다른 맛집을 한번 찾아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취향을 향해 달려온 하루다.
나는 무엇을 좋아하는가. 무엇이 나를 움직이게 만드는가.
읽고 싶은 책을 손에 넣었고, 읽어보니 내 취향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알았다.
괜찮다는 말 대신에 좋고 싫음을 명확하게 말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것이 취향이다.
짧지 않은 시간을 살아왔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아직도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선뜻 말하지 못해 고민하는 순간을 마주하곤 한다.
취향을 알기 위해, 나 자신을 알기 위해 보낸 오늘 하루가 전혀 아깝지가 않다.
매일 마주하는 오늘은 나를 알아가기 위한 여정이라고 생각한다.
부지런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남이 볼 때의 나태함을 즐기고, 혼자 바지런히 움직이는 것을 좋아하는 나는 혼자 오늘도 열심히 하루를 보냈다.
호기심이 강하지만 끈기가 오래가지 않는 허술한 나지만 오늘도 거침없이 하루를 보냈다.
그것으로 만족하는 나는 한없이 단순한 사람이다.
그리고 나의 취향은 언제나 변화하고 진화한다.
내일의 내가 기대되는 오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