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 50 가마에 5년을 내어 준 소녀

by 이한나

"낙지, 갈치, 갈비, 게장 다 해놨어. 니들 이거 다 먹일라고..."

시어머니는 우리를 보자마자 자신의 요리 목록을 알려주셨다.

허겁지겁 먹어대던 나는 더 이상 입에 넣을 수 없는 작은 위장을 탓하며 어머니에게 아우성을 친다.

"어머니... 나 진짜 배 터질 거 같아~"


이런 말을 할 때면 어머니는 한결같이 훌라후프를 건네주시며 '양쪽으로 700개씩 해봐! 쑥 내려가~'라는 말을 자주 하신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얘들아~ 우리 아파트 한 바퀴 돌고 오자~ 여보는 좀 자고 있어."

아마도 아버지를 피해 우리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 많았던 게 분명하다. 그러나 유난히도 반짝이던 아버지의 눈빛을 발견한 어머니는 아버지가 잠들기를 기다릴 바에야 우리를 데리고 나가는 게 낫겠다고 판단하셨나 보다.


마음이 편안해서였을까? 어머니는 우리를 향해 이야기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나는 내가 살아온 인생을 글로 쓰고 싶었어. 그렇게 열심히 쓰고 있는데 자꾸 니 아버지가 못쓰게 하는 거여. 내가 공책 한 권은 빼곡히 써놨다니게. 얼마나 하고 싶은 말이 많은디... 근데 자기 이야기(아버지) 나올까 봐 걱정이 되는지... 못쓰게 하더라. 아무래도 죽고 나서 써야 되나? 하하"


"에이... 어머니 우리 그냥 편안하게 천천히 쓰자고요. 너무 한 번에 다 하려고 하지 마시고... 일기 쓰듯이 천천히 생각하면서 쓰세요. 아버지한테는 그냥 일기라고 하면 안 되나?... 어쨌든 어머니 어릴 때 이야기부터 해봐요. 초등학교 때는 어떠셨어요?"


"뭐... 그냥 가난했어. 우리 엄마 아빠는 자식은 왜 이렇게 많이 낳았나 몰라. 늘 쌀 걱정하고... 뭐 제대로 먹을 수나 있었나? 어릴 땐 다른 생각 없었어. 내 머릿속에는 한 가지 우리 아빠처럼 살지 말아야지! 그러니까 난 저렇게 가난하게 먹을 거 걱정하면서 살지 말아야겠다 이 생각하나밖에 없었어. 그래서 초등학교 졸업하고 조금 있다가 식모살이 간 거지. 영숙(가명)이 네로..."


"영숙이는 아까 학교 같이 다녔다는 친구 아니에요? 친구 집으로 식모살이를 갔다고???"


"뭐 어때??!!! 그때 내 친구들 이력서 써서 서울에 있는 라면 공장으로 취직하고 그랬는데 난 그거 하나도 안 부럽더라. 걔네들 삐쭉 구두 신고, 화장하고 내려오는데... 저것들 삐쭉 구두에 옷사입느라 돈 하나도 못 모으겠구나 그런 생각이 번쩍 나서... 나는 서울로 가지 말고 식모살이 해야겠구나 생각했지. 다른 생각 안 했어. 영숙이네서 5년간 식모살이 하면 쌀 50 가마를 준다는데 그걸 왜 안 하니?"


"가서 뭐 하셨는데??"


"일어나면 밥하고, 치우고, 청소하고, 빨래하고, 나가서 밭매고, 또 밥하고, 치우고... 그러고 밤 되면 자고."


너무 오래전 일이라 힘들었던 순간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일까?

나보다 훨씬 작은 몸을 가진 어린아이였는데...

열여섯 나이에 저런 일을 했다고?


아무렇지 않게 웃으면서 지난 일들을 이야기하는 나의 시어머니...

나는 의아한 마음으로 "안 힘들었어요?"라고 물었다.


"왜 힘들어? 5년 동안 쌀 50 가마를 준다는데 왜 힘들어? 그 생각만 하면 하나도 안 힘든겨. 쌀 50 가마.

내가 일하면 쌀 50 가마 준다고 하니까 일을 하면서도 너무 좋은 거여. 막 신이 났지. 쌀 받을 생각에... 나 진짜 재밌게 일했어. 그때 쌀 50 가마가 얼마나 큰지 아니? 그 50 가마 받아서 30 가마는 우리 친정집 싹 다시 짓고, 20 가마로 우리 아빠 빚도 갚고 아빠 쓰라고 드리고..."


어머니는 그 어떤 때보다 목소리 톤이 올라갔고, 어깨를 들썩이며 이야기를 하셨다.

기울어져가는 친정을 살리고, 아버지의 빚을 갚아드리고, 목돈을 부모님께 드린 것이 어머니에게는 큰 기쁨이었던 것이 틀림없었다.


"어머니... 다시 과거로 돌아가도 또 식모살이 갈 거야?"

"가야지. 다시 집 짓고 하려면 가야지."

어떠한 망설임도 없이 즉각적으로 다시 똑같은 시간을 살아가겠다고 말하는 시어머니.


그런 시어머니가 측은해지기 시작했다.

오롯이 누군가를 위해 살아온 인생... 자신의 삶을 살아본 적이 없는 인생.

그런데도 똑같은 선택을 한다고 하는 시어머니의 대답을 들으니 속상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던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근데... 어머니 삶이 없었잖아. 물론 가족을 위해 당연한 것일 수도 있지만 어머니 삶은 없었잖아. 내 맘대로 나 자신을 위해 살아간 건 아니잖아. 어머니 인생을 살고 싶진 않았던 거야?"


어머니는 말씀이 없으셨다.

잠시 침묵 뒤에 말을 이어가신 어머니...

"근데 난 다시 돌아가도 또 할겨... 누가 등 떠밀었나? 내가 가고 싶어서 간 거니까 그게 내 인생이지. 내가 살고 싶었던 대로 살았던 거여. 엄마 아빠는 나 식모살이시키고 싶었겠어? 내가 무조건 간다고 하니까 못 말리는 거지. 나는 다른 거 없었어. 가난한 우리 집, 엄마 아빠, 언니 오빠, 내 동생들 조금이라도 더 먹을 수 있다면, 조금 더 가르칠 수 있다면 그냥 하는 거여. 그게 내 목표였으니게... 그거 이뤘으니까 나는 내 인생을 산거여."



아차... 나는 실수했다.

나는 함부로 남의 인생을 판단했고, 동정했다.

어머니의 삶에 있어서 큰 자랑이자 기쁨을 '가여운 희생'으로 정의해버렸다.


그녀는 어린 나이에 가정을 일으킨 드라마의 주인공이었다.

당차고, 강한 소녀였으며

자신을 낳아준 부모와 형제를 자신의 인생 목적으로 삼았던 소녀였던 것이다.


그녀는 친구들을 보며 구두, 옷, 화장품을 사기보다 악착같이 돈을 모으기 위한 방법으로

식모살이를 선택했고, 자신의 삶의 목적이었던 가족들을 부양할 생각에 스스로를 토닥이며 5년이라는 시간을 성취 과정으로 여길 줄 아는 지혜로운 소녀였다.


목표지를 향해 달려가던 열정.

상황과 사람을 탓하기 보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는 힘

자신의 선택을 신뢰하며 끝까지 버텨내는 뚝심


나는 그녀가 살아온 소녀의 삶을 다시는 불쌍하게, 안쓰럽게 여기지 않기로 했다.

그녀는 그 어떤 누구보다도 당당하고, 멋진 소녀였기에...


나는 이제 어머니에게 존경을 표하는 마음으로 멀리서나마 박수를 보내는 며느리로 남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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