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도시를 여행하다 보면
모든 여행지에는 그곳을 대표하는 얼굴이 있어. 여행지의 이름을 말하면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듯 동시에 떠올리는 곳. 시간이 없어서 딱 한 군데만 둘러볼 수 있다고 한다면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듯 같은 걸음으로 향하는 곳. 그러니까 이런 곳이야. 파리의 에펠탑라든지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 같은.
누군가 나에게 포틀랜드의 얼굴을 물어본다면 아마 Powell’s Books일 거라고 대답해 줄 거야. 세계에서 가장 큰 독립 서점이지. 포틀랜더들이 특히 사랑하는 공간이기도 해. 누군가 또 나에게 이 서점의 위치를 묻는다면 또 이렇게 대답해 줄 거야.
첫째, 포틀랜드 다운타운에서 가장 북적이는 사거리를 찾아갈 것.
둘째, 그 번잡한 사거리에서 사람들로 가장 수선스러운 입구를 찾을 것.
그렇다면 바로 그곳이 바로 Powell’s Books!
사실 독립 서점이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골목 구석에 자리잡은 작은 책방을 떠올리곤 해. 한번 상상해 봐. 단정하게 정돈된 매대 위로 언제나 고요한 책의 공기가 맴도는 곳. 딸랑, 문을 열고 들어서면 빳빳한 새 책 냄새가 코끝을 스치는 거야. 한쪽 벽에 뚫린 커다란 창으로는 오후의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지. 서점 주인은 책에 푹 빠져서 손님이 들어오는 것도 아직 눈치채지 못했나 봐. 서가에는 애정을 듬뿍 담아 고르고 고른 책들이 정갈하게 놓여 있네. 어쩐지 나른한 공기에 하루의 긴장이 스르르 풀려. 나도 모르게 목소리를 낮추고 발걸음마저 살금살금 옮기게 돼. 이 평온함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
다시 포틀랜드로 돌아오자. 시선을 다시 번잡한 웨스트 번사이드 사거리로 옮겨 보는 거야. 건물 하나를 덮는 커다란 간판에 큼지막한 글씨가 쓰여 있어. POWELL’S BOOKS CITY OF BOOKS, EST. 1971.
쌓여 있는 책이 너무 많아서 서점 곳곳에 골목골목이 피어나 있는 곳. 사람들로 가득한 입구를 지나면 거대한 책의 미로가 보여. 발을 딛자 삐걱거리는 바닥에서 오래된 시간의 흔적이 들리네. 어떤 골목에 들어서면 몇십 년은 묵은 듯한 책의 냄새로 괜히 정겹기까지 해. 하지만 또 어떤 골목에는 이제 막 인쇄된 새 책들이 가득해. 책마다 그것을 읽어야 하는 이유가 적힌 쪽지가 붙어 있고 말이야. 책이 일상인 로컬들과 책을 만나러 온 관광객들로 언제나 북적거리는 공간이라 목소리를 크게 높여야 해. 수많은 직원들은 좋은 책을 소개해 주려고 서점 곳곳을 활기차게 움직이고, 서가에 꽂힌 책들에도 역시나 생기가 가득해.
책의 골목을 헤매다 보면 마치 다양한 주제로 구획된 박물관에 있는 것 같다가도, 서점 이름이 새겨진 굿즈들로 빼곡히 채워진 한 쪽 벽을 마주치면 가장 인기 있는 관광지에 온 것만 같아. 자꾸만 발걸음이 빨라져. 모든 것이 생기 있게 살아 움직이는 통에 내 심장까지 바빠지는 거야.
Powell’s Books는 그런 곳이야.
오래된 먼지들이 가장 힘차게 움직일 수 있는 곳.
사실 말이지, 자주 서점에 가게 돼. 가장 마음이 놓이는 장소라서. 이 도시의 첫 인상은 생각만큼 평온하고 다정하지 않았거든. 가끔 그럴 때가 있어. 혹시나 실망할까봐 기대를 애써 참았는데도 불쑥 찾아온 실망에 또 실망하게 될 때. 혹시나 그 뒤에 따를 실망이 두려워서 얼마쯤 마음의 벽을 쳐 두었는데도 속절없이 찾아온 실망의 물결이 애써 쌓은 담을 와르르 무너뜨릴 때.
물론 이미 겪어서 알고 있었던 일이야. 다만 겪고 또 겪고도 아직 무뎌지지 않은 탓이지. 이 정도면 실망하지 않을 거라고, 또 다시 섣부른 기대를 했기 때문일까. 포틀랜드에 오고 며칠은 자주 우울해졌어. 거리에는 스스럼없이 말을 거는 노숙자가 넘쳐났고, 여름의 날씨는 시시각각 변하기 바빴고, 지나치게 '힙'한 도시 분위기는 좀처럼 적응이 되지 않았거든. 눈만 마주쳐도 따스하게 인사해 줄 사람들로만 가득할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약에 취해 존재만으로 위협이 되는 사람들을 마주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 매일이 찬란하고 아름답게 빛나는 여름날일 거라고 감히 바라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아직 차가운 바람에 뼈마디가 시린 유월의 저녁을 상상하지는 못했지. 잡지에서 튀어나온 듯 생생한 화보의 현장을 목격할 수 있을까 미리 설레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거리를 활보하는 모든 사람들의 스타일이 나와는 억만 년 떨어진 듯한 첨단을 달릴 거라고는 헤아리지 못했네.
사실 말이야, 새로운 경험을 해 보고 싶다며 떠나온 곳이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모든 것에 서툴러 줄기차게 실수만 하고 싶지는 않았어. 말이 좋아 이방인이고 낯섦을 즐기는 여행객이지, 돈이 든 가방을 꼭 움켜 쥐고 고양이처럼 바삐 눈을 굴리며 종일 두려움에 떨고 싶지는 않았다는 말이야.
나는 서투른(혹은 서툴러 보이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야. 더딘 실력으로 새로운 것을 더듬더듬 극복하기보다는 편안하고 익숙한 자세로 무언가를 잘 해내는(혹은 그런 모습을 보이는) 편이 더 좋은 사람. 어설픈 완벽주의가 있었던 것 같기도 해. 완벽하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모자란 것을 부정하려고 애쓰는 사람. 완전하지 못한 부분을 발견하면 그것을 다시 온전히 채우는 것이 아니라 아예 떼어 내 버리는 거야. 실은 결함 투성이면서 스스로의 눈을 가리기 바빴지. 서툰 영어 실력을 보여야만 하는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해 전화 영어를 그만둘 정도였어. 면허를 따고 몇 번 운전을 하다가도 이내 비슷한 이유로 포기했단다. 어불성설이지만, 초보임을 굳이 모두에게 들키기가 싫다는 게 그 이유였어.
그런 내가 완전히 낯선 도시에 왔어. 한없이 서투르고 미숙했지. 카페에 가서 'Latte' 발음 하나 제대로 하기가 어려웠고(라떼도 라테도 아닌 그 중간의 발음이라니, 라 테이~ 하는 그 발음이 이렇게나 어색할 일인지), 벨이 달려 있지 않은 버스를 탔을 때는 어떻게 나의 하차 의사를 밝힐 것인지 주위를 살피며 한참을 고민해야만 했어. 지갑 속에 동전이 너무 많아 불룩해졌는데도 센트와 페니 같은 것을 알맞게 골라내는 일이 아직 헷갈려서 그냥 지폐를 내밀고는 또 잔돈을 한 가득 받아 들었지. 비슷한 일이 몇 번이고 반복되자 어느새 스스로가 한심하게까지 느껴졌어.
누군가의 여행기에서는 낯선 사람이 친절하게 말도 잘 걸어주고, 생각지도 못한 흐뭇한 사건이 매일 생기고, 한국에서는 몰랐던 스스로의 멋진 모습을 잘만 발견하던데! 나는 왜 그다지 알고 싶지 않은 것들만 먼저 보게 되는 것인지. 내가 그저 잠깐의 용기에 취해서 시간이며 돈이며 낭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용기고 도전이고 나발이고 내게 맞지 않는 옷을 섣불리 무리해서 입은 건 아닐까. 마음 속 깊은 구석에서 이것만큼은 절대 피하고 싶었던 생각이 벌써 스멀스멀 피어나려고 했어. 아, 괜히 왔다.
그렇게 마음이 한없이 쪼그라든 상태에서 만난 곳이 서점이었어. 서점을 가득 메운 책들을 보는 순간, 반짝이는 눈으로 책을 고르고 바닥에 철푸덕 앉아 오늘의 문장을 들여다보는 사람들을 보는 순간, 출렁이던 내 마음은 드디어 고요해졌어. 그래, 마침내 익숙한 곳이었다. 낯선 동네였지만 서점의 풍경과 그곳의 공기, 적당한 번잡함과 새 책의 냄새는 익숙했어. 책을 고르는 사람들의 마음이 어떨지, 문장을 읽어 내려가는 그 머릿속이 어떤 것인지도 이미 잘 알고 있었어. 어떤 목적으로 서가를 헤매는지, 어떤 과정을 거쳐 책을 집어 계산대로 가져가는지까지도.
나는 자연스레 어린이책이 모여 있는 층으로 향했어. 문장을 읽는 일조차 혹시나 스스로 서툴게 느껴질까 두려웠거든. 쉽고 단순한 문장이 머릿속에 술술 들어오자 제법 신이 났어. 페이지를 가득 채운 그림은 눈길이 닿을 때마다 직관적으로 읽혔지. 단순한 문장으로 쉽게 마음을 다독여 주는 그림책의 힘은 애초에 잘 알고 있었지만, 새로운 도시에 떨어진 서투른 독자가 되어 이렇게까지 위로를 받게 될 줄은 몰랐어. 어떤 그림책 평론가의 말이 여기 와서 다시 떠오르게 될 줄은 더더욱.
"아이들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 봅시다. 갑자기 어느 날 낯설고 거대하고 복잡한 세상에 도착했습니다.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새로 배워야 할 대상이죠. 때문에 아이들 마음은 불안과 질문으로 가득 차 있어요.아이의 내면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그 불안과 질문에 답해 줄 수 있는 이야기, 그러니까 문학이 필요합니다.이 세상에 대해 안심하도록, 그래서 성장할 용기를 내도록 말입니다.”
(소피 반 더 린덴, 그림책 비평가)
낯선 도시를 여행하다 보면 어린 아이의 마음을 더욱 잘 이해하게 되는 것 같아. 하나하나 새롭게 익숙해지며 홀로 서야 하는 마음은 참 외로운 거야. 은연 중에 품게 되는 기대들이 실망으로 변하는 과정들은 매번 참 낯설어. 겪고 겪어도 무뎌지지 않고, 해도 해도 어려운 일들은 자꾸 원망스럽고 말이야.
혹여나 서투른 자세로 무언가를 간절히 배워 가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아무래도 모든 것이 어려운 과정을 여행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낯설고 거대하고 복잡한 길목에서 불안함에 헤매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막연함과 불확실성으로 점철된 이 세상에서 그 마음을 지키는 것이 점점 더 힘겨워지는 사람이 갈 길을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해 줄 거야.
첫째, 가장 익숙한 것을 찾을 것.
둘째, 그중에서도 가장 쉬운 것을 다시 손에 잡아볼 것.
그러니까, 익숙한 것에서 먼저 위로를 얻어 보라고. 마음껏 기대해도 되는 곳에서 먼저 마음을 놓아 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