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 하나만큼의 용기가 필요할 때
어떤 말을 습관처럼 기억한다.
미하엘 엔데의 동화책 <모모>에 등장하는 문장의 첫머리다.
도로 청소부 배포는 이렇게 얘기했다. “얘, 모모야. 때론 우리 앞에 아주 긴 도로가 있어. 너무 길어 도저히 해낼 수가 없을 것 같아, 이런 생각이 들지.” (중략) “한꺼번에 도로 전체를 생각해서는 안 돼. 알겠니? 다음에 딛게 될 걸음, 다음에 쉬게 될 호흡, 다음에 하게 될 비질만 생각해야 해. 계속해서 바로 다음 일만 생각해야 하는 거야.” 그리고 또 덧붙였다. “한 걸음 한 걸음 나가다보면 어느새 그 긴 길을 다 쓸었다는 걸 깨닫게 되지. 어떻게 그렇게 했는지도 모르겠고, 숨이 차지도 않아.” 그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렇게 말을 맺었다. “그게 중요한 거야.”
<모모>, 비룡소, 1999
그런 날이 있다. 3분 40초짜리 노래 한 곡을 겨우 들을 수 있을만한, 딱 그만큼의 배터리가 남아있는 날. 누군가에게 겨우 몇 자 안부를 적을 수 있을만한, 딱 그만큼의 연필심이 남아있는 날. 그리고 하루를 겨우 버틸 수 있을만한, 딱 그만큼의 기운이 남아있는 날. 그리고 아마도, 미세먼지가 아주 심한 날이었다. 집까지 걸어갈 길은 아득한데 하필 그날따라 손에 든 것은 한 짐이었다. 나를 지탱하던 배터리 한 마디가 긴박하게 깜빡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이깟 미세먼지가 뭐라고 이렇게까지 짜증이 날 일인가 싶었지만, 그냥 그런 날이었다. 하루를 잘 버티다가도 아주 사소한 원인 하나에 속절없이 무너지는 날.
뻑뻑하게 충혈된 눈으로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그리고 겨우 한 걸음을 옮겼다. 겨우겨우 한 걸음 옮기면 그 다음 걸음만 생각했다. 할 수 있는 건 그게 다였다. 그 다음 쉬게 될 호흡, 그 다음 딛게 될 걸음만 생각했다. 한 호흡, 그리고 또 한 걸음. 그러자 어느새 집이었다. 정말로 집이었다.
자주 그런 날을 살았다. 오로지 하루의 끝에 도착할 집만 생각하던 날들. 출근길의 희망이라고는 그저 ‘오늘도 오늘의 해가 질 거야!’ 뿐이었고, 사무실에서 기댈 수 있는 위로라고는 고작 ‘다 지나간다’는 당연한 명제였다. 간신히 충전한 배터리 한 마디로 하루를 버티던 나날, 그러다 문득 퇴사를 결심했다. 놀랍게도 곧장 포틀랜드로 왔다. 할 수 있는 건 그게 다였다. 그냥 그런 날이었다. 디뎌야 할 다음 걸음이 바다 건너 낯선 땅이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날.
그해 여름, 세 달의 시간을 포틀랜드에서 보냈다. 그곳에서도 나는 습관처럼 분주해졌다. 종일 쫓기고, 이름 모를 무언가를 계속 도둑맞았다. 시간이었다. 시간에 쫓겨 다급해질 때마다, 도둑맞은 시간이 늘어갈 때마다 괜히 그 이름을 불러 보았다. 얘, 모모야.
어릴 적 읽었던 동화 속 주인공의 이름이었다. 회색빛 시간 도둑으로부터 모두의 시간을 지켜 주는 판타지의 제목이기도 했다. 포틀랜드는 모모와 많이 닮아 있는 도시였다. 동화처럼 순수하고 아름다웠다는 게 아니다. 그보다는 차라리 마구 뒤엉킨 머리, 자유분방한 매무새 같은 것이 닮았다는 쪽이 맞을 것이다. 아무래도 가장 비슷했던 점은 시답잖은 일에도 흔쾌히 제 시간을 허락한다는 거였다. 당장 중요하지 않은 것에 시간을 내어 주는 일, 이를테면 영양가 없는 고민에 종일 귀를 기울이거나 뜬구름 같은 주제로 한참 토론을 벌이는 일, 내 것이 아닌 이웃의 정원에서 잡초를 뽑으며 수다를 떨거나 하는 일들.
자주 편지를 썼다. 문득 조급해질 때마다, 초조함에 울고 싶을 때마다 막연한 이름을 의지했다. 사실 막연한 바람이었다. 어쩌면 판타지가 아닐 수도 있다는, 어쩌면 그것을 정말로 지켜 줄지도 모른다는.
모든 시작은 그 이름이었다. 모모에게.
얘, 모모야.
퇴사를 했어. 포틀랜드에 왔지. 마른 장작처럼 회사를 다니다가 어느 날 작은 불씨에 화르륵 사직서를 던졌다는 이야기, 그리고 먼 나라로 떠났다는 무용담은 많이 들어왔지만 정작 내가 그 주인공이 될 줄은 나조차도 정말 몰랐다.
알잖아. 어릴 때부터 우리는 지극히 추상적인 단어들, 그래서 멀게만 느껴지는 글자들을 끊임없이 배워 왔다는 걸. 배려와 정직, 배신과 절망 같은 수많은 단어들. 그런데 살다 보면 가끔, 희미한 달빛만큼이나 아득했던 단어들이 피부에 닿을 듯 가까이 느껴지는 순간이 오더라.
'용기'라는 단어는 내가 꽤 좋아했던 직업과 달마다 들어오는 돈과 앞으로의 불안을 담보로 두더라도 어쨌든 퇴사를 말하는 마음이라든지. '팀장님, 혹시 시간 괜찮으세요?' 같은 문장을 몇 번씩 메신저 창에 쓰고 지우고 하다가 퇴근 직전에 드디어 전송하는 행위라든지.
용기란 그저 전쟁터에서 "돌격, 앞으로!"를 외치는 것인 줄만 알았지. 하지만 용기는 오히려 자신감의 반의어였어.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는데도 애써 목소리를 쥐어 짜내는 게 차라리 용기일까. 나조차도 예상하지 못했던 갑작스런 퇴사를 하면서, 그렇게 단어 하나를 다시 새롭게 배웠네.
어렸을 적 좋아했던 놀이 중에 '점 이어 그리기'가 있었어. 백지 위에 마구 흩어진 점과 점 사이를 선으로 잘 연결해서 어떤 그림을 만드는 거였지. 그런데 모모야, 무작위로 찍힌 점들 사이에서 모양을 이룰 만한 다음 점을 찾는 일은 생각보다 어려운 거야. 타인이 미리 찍어 놓은 점들 사이를 헤매다 보면 쉽게 지치게 돼. 정해진 점을 찾아 연결해서 모두가 기대하는 그림을 꼭 완성해 내야 한다면 더더욱.
내 삶의 길에도 아주 많은 점들이 찍혀 있어. 때론 도저히 해낼 수 없을 것 같아, 이런 생각이 들지. 지금껏 애써 알맞은 선을 그어왔는데도 자꾸만 아득해지는 거야. 차근차근 정규 교육을 받고 대학을 가고 취업을 하고 했는데도 도무지 그럴듯한 그림이 보이지 않아. 그러면 서두르게 되지. 급한 마음에 아무 선이나 그어 보는데 점점 더 꼬여만 가. 원인만 늘어날 뿐 그럴듯한 결과는 없으니 더 긴장되고 불안한 거야. 누군가는 이미 완성된 그림을 걸어두는데, 내 자신이 초라해서 견딜 수가 없어. 초조한 마음에 눈앞의 점을 모조리 죽죽 그어 보는데 마음은 더 무거워져. 제법 훌륭해 보이는 점들은 저 멀리 있는데, 이미 의미 없는 선들로 가로막혀 더 이상 나아갈 수가 없지. 이게 정말 끝이라고? 고개를 저으며 발만 동동 구르게 돼. 가끔은 몰래 울기도 하고. 하지만 누군가 그랬지.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거야.
원인이 아닌 결과를 스스로 그려본 것은 처음이었어. 수많은 점의 미로에서 잠시나마 도망치고 싶어서, 이미 내 그림이 너무 뻔한 것이 왠지 억울해서, 그려진 점을 연결하기보다 새로운 점을 한번 찍어 보고 싶었어. 그동안의 막연한 꿈이 실재가 되어 나타나도록. 그런데 사실 말이지, 어렴풋이 떠올려보기만 했던 환상을 현실에서 적확하게 마주하는 일은 참 두려운 거야. 직장을 다니면서 그나마 모아왔던 적금을 홀랑 깨는 것도, 지금껏 밟아온 노선을 이탈하는 것도 많은 것이 망설여졌지만 어쨌든 한번 해 보기로 했어. 부들부들 떨리는 걸음으로.
그렇게 포틀랜드에 왔어. 작은 가능성이라도 점으로나마 하나 더 찍어 놓고 싶어서. 그렇다고 내 삶이 어마어마하게 달라지진 않겠지만 지금이 아니면 용기조차 못 낼 것 같아서. 언젠가 나아가야 할 점들은 여전하지만, 적어도 숨이 차지는 않아. 적어도 다음 걸음은 디딜 수 있을 것 같아.
용기 내어 점을 찍었어. 작지만 새로운 시작을 했지.
그게 중요한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