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대리 구석자리의 J는
오늘도 다른 사람의 문장을 고친다.
거의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자리에서,
고요한 키보드 소리만이 귀를 스친다.
구겨진 와이셔츠, 평범한 브랜드의 넥타이, 손질되지 않은 부스스한 머리.
겉으로 보기에 그는 평범한 샐러리맨으로
그저 문장의 오류를 고치는 직원일 뿐이다.
그의 손끝이 자판을 두드릴 때면
어딘가의 감정이 묘하게 꺾여 있는 느낌이 들었다.
문장은 어긋난 지점을 알려주지만,
마음은 늘 조용히 비켜 있다.
“왜 나는 이 문장을 고치고 있지?”
그렇게 묻는 순간,
J는 자기가 고쳐야 하는 게 문장만은 아니라는 걸 알아챈다.
자판 앞에 앉은 지 여섯 시간째가 흘렀다.
“이 교열 언제까지 가능하세요?”
그 말에 그는
“금요일까지요.”라고 대답했다.
기억하기론 오늘 J의 대화의 전부다.
원고 중 한 문장에서 자주 본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그랬구나. 아, 진짜요?"
누군가의 소설 속,
누군가의 인물들이 서로에게
아무 의미도 없는 위로를 주고받는 장면.
J는 그 문장에서 손이 멈췄다.
소설 속 인물은
그 말을 듣고 눈물이 핑 돌았지만,
그는 ‘진짜요?’라는 말이
‘나는 지금, 네 이야기를 빌미 삼아
내 이야기를 꺼내고 싶어’라는 뜻의 또 다른 표현이라는 걸 너무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커서로 문장을 드래그했다.
"그랬구나."
까지만 남기고 나머지는 지웠다.
감정도 그렇게 지울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집에 돌아온 J는
정리되지 않은 침대 옆에 가방을 내려놓고
물도 마시지 않은 채 그대로 바닥에 앉았다.
아무 말도, 아무 음악도,
아무 생각도 흐르지 않았다.
불을 켜지 않았다.
어둠이 아주 천천히 커튼 틈을 타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괜찮냐는 말을
누군가에게 들은 적이
최근엔 있었던가.
그런 생각을 하며
무릎을 껴안고,
이마를 기대었다.
오늘 읽은 단어 중에
‘진심’이라는 글자가 몇 번이나 나왔는지
굳이 세지 않았다.
사람들은 늘 이상했다.
말투도, 표정도,
대화 속엔 늘 빠져나갈 말의 여지를 만들어 놓았다.
“진심이에요.”라고 말하면서,
그 뒤엔 꼭 덧붙일 무언가를 남겨두었다.
그렇게 모든 말은 다
구겨진 영수증처럼 정리되지 않은 채
자리를 떠났다.
J는 그 잔여물을 혼자 수거하며 살아왔다.
누구에게도 꺼내놓지 못한 감정은,
세상 바깥으로 걸어 나간 그 사람에게로만 향했다.
“그냥 당신이 그랬던 것처럼
나도 조용히 사라지면 되는 거지.
그게 내가 원하는 평화가 아닐까?”
그는 멍하니 거울을 바라봤다.
서롤 포기함으로써 얻게 된 평화가 정말 평화일까?
그런 생각을 하며 무언가가 그를 짓누르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그 사람에게 기대했던 것은 결국 내 허상이며,
때문에 되돌아온 건 필연이었을까?
거울 속의 자신을 보며,
J는 어느 순간 그 감정마저도 인정하게 되었다.
그 어떤 위로도 그가 만들어낸 이 허무 속에서의 의미를 찾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가 깨닫게 된 건, 이 가짜 평화가 결국 나를 지킬 수는 없다는 사실이었다.
아주 깊은 데서 속삭였다.
‘나를
진짜 붙들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