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다페스트
부다(언덕)에 위치한 위풍당당한 왕궁 '부다 캐슬'
두나 강변의 페스트(평원) 지구에 우뚝 솟아 석양을 받아 빛나는 이 나라의 상징 '헝가리 국회의사당'
첫째 날 (2006. 5. 25)
- 드넓은 평원을 가득 덮은 황금물결,
바람결 따라 흔들리며 무르익어 가는 밀밭 위로 리스트의 광시곡 선율이 퍼져 가듯
한가롭고 평온한 분위기의 속에 살아 숨쉬는 문화의 향기가 가득한 나라,
헝가리.
암스텔담을 경유하여 부다페스트로 가기 위해서는 "스카이 유럽"이라는 저가 항공사의 비행 편을 이용해야 했는데 스키폴 공항에서 출발하는 그 비행기는 뜻밖에도 예정시간 보다 2 시간가량 늦게 출발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예기치 않은 기상악화라든지 기체에 문제가 생길 경우를 제외 하고는 승객이 다 차지 않았다 해서 출발을 늦추는 것은 듣지도 보지도 못했기에 이런 식으로 시간을 어기는 것을 처음 겪는 나로서는 참으로 황당하고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무엇보다도 영문도 모른 채 막연하게 현지 공항에서 나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을 부다페스트의 사람들에게 처음부터 큰 실례를 저지르는 일이기 때문에 내 마음은 무척 당황스러웠다. 내가 부다페스트에서 머무는 동안 나를 안내해 줄 그들에게 최대한 폐를 끼치지 않고자 하는 내 마음과는 달리 출발부터 삐걱거리는 것인데 원래부터 잘 알고 지낸 사람이라면 몰라도 소개를 받아 관광 안내를 부탁하는 나의 입장으로서는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우선 공항 대합실의 공중전화를 이용해 출발 지연 상황을 설명한 뒤 언제 도착할지 모르는 나의 비행기를 마냥 기다리면서 공항에 나와 있을 필요 없이 집에 계시라고 부탁하며 시내에 있는 그 집까지 찾아 갈 수 있는 방법을 의논했다. 다행히 공항에서 그 집까지 가는 교통편은 어렵지 않았다. 비록 처음 가는 길이라 조금은 염려스럽기도 했지만 어디를 가든 낯선 나라에서 맞닥뜨리는 것은 항상 난생 처음 겪는 것이기에 그동안 잘 해냈던 것처럼 아무 문제없을 거라는 긍정적인 생각으로 비행기가 뜨는 시각을 알리는 전광판만 바라보며 마냥 기다렸다.
비행기가 늦게 떠나도 승객들의 표정은 의외로 담담했다. 탑승구 앞에서 마지막 안내가 있을 때까지 언제까지고 기다릴 수 있을 것 같은 편안한 표정들의 사람을 보면서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 사람들 같으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아주 명확하다. 어찌 보면 참을성이 부족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오히려 매사에 적극적이면서도 능동적인 태도로 이런 어이없는 상태를 바로 잡으려 애쓸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적극적인 면을 좋아한다. 다만 때때로 너무 지나칠 때도 있어서 문제지만 사태해결에 있어서 수동적인 것보다는 능동적인 태도가 이럴 때는 훨씬 바람직하다고 생각되었다. 하지만 이 곳 사람들은 그런 모습을 전혀 보이지 않는데 그 만큼 그들의 마음에 여유가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런 상황도 잘 참고 견디는 것에 단련된 것인지 혹은 이런 상황이 다반사이기에 이럴 경우에는 마음에 두지 않고 아예 체념한 것은 아닌지 모르지만 이왕이면 좋게 봐 넘겨서 여유 있는 모습이라고 단정 지었다.
그렇게 밤은 깊어 갔고 2 시간도 훨씬 지나 늦게 출발한 비행기는 부다페스트 현지 시각으로 밤 11 시 30 분경 도착했다. 너무 늦은 시간이라서 그런지 모르지만 일반적인 대중교통은 끊어지고 다시 연락을 취한 나의 전화에 하바스씨는 공항 대기실에 각 방향으로 운행하는 작은 승합버스를 모는 기사들이 있을 거라며 그 중 하바스씨 집 근처까지 오는 버스를 찾아보라고 했다. 전화를 놓고 자세히 살펴보니 많은 승객들이 군데군데 모여 있는 속에 운행 방향과 장소의 이름을 외치며 호객을 하는 기사도 보였다. 그 중에서 하바스씨가 이야기한 쪽을 가는 버스 운전사를 만나서 헝가리 돈으로 버스 삯을 지불하니 조그만 버스로 안내를 한다. 승합차보다는 조금 크지만 옛날 우리나라에도 있었던 아주 작은 버스, 즉 마이크로버스라고 불렀던 작은 크기의 버스에 이미 많은 사람들이 타고 있어서 가방을 들고 탈 자리는 없었다. 사람들 타기에도 부족한 공간이라 버스기사는 나의 큰 가방을 버스 뒤쪽에 달려 있는 조그만 공간에 밀어 넣으면서 어디 왔느냐고 물었다. 한국이라고 하니 조금은 신기한 듯 바라보는 그의 무덤덤한 표정이 익히 들어 왔던 속내를 잘 비치지 않는 공산주의 국가 사람들의 표정은 아니었을까. 비록 최근 들어 많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 나라를 여행하고 있어서 한국사람 보는 것이 어렵지 않겠지만 그렇게 밤늦게 찾아오는 동양인을 보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공항을 떠나 시내를 향하는 길은 키가 큰 가로수가 끝없이 이어지는 길이었는데 마치 시골길을 달리는 것처럼 한적해서 적막감까지 느끼게 하였다. 아마도 공항과 도심지 사이에는 사람이 많이 살지 않는 시골인지도 모른다 . 창밖으로 보이는 먼 어둠 속에서 간혹 깜박이는 불빛이 그 곳에 집이 있다는 것만 짐작할 수 있었고 가로등도 제대로 없이 가로수만 서있는 길을 달리는 그 기분은 마치 유년시절 부모님을 따라 먼 길을 털털거리는 버스로 한참이나 달려가던 고향으로 가는 신작로를 떠오르게 했다. 순간 마치 현재가 아닌 과거 속으로 들어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런 조용하고 차분한 분위기는 도심지라 해서 달라지는 것이 없었다. 비록 늦은 밤이기도 했지만 우리나라와는 달리 시내 중심을 향해 달리는 길 양쪽의 인도에는 의외로 사람들의 왕래가 없어서 마치 통금이 있던 우리의 70 년대 연상케 하였다.
그래도 가로등 불빛에 비치는 건물들의 모습과 특히 밝게 조명시설을 한 웅장한 역사적 건물과 성당들이 현재 내가 있는 곳이 낯선 나라라는 느낌을 갖기에 충분했다. 비록 우리의 대도시 밤 풍경처럼 휘황찬란하지 않지만 고풍스런 건물들이 적막한 밤기운 속에서 묵직하고 웅장하게 서 있는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특히 페스트 지역을 지나서 두나강을 건너면서 보게 된 부다 언덕에 서있는 성당의 첨탑과 부다 캐슬의 웅장하고 당당한 모습은 성채를 밝히는 우아한 조명 아래서 독특한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강을 건너서 얼마를 더 가니 (그 다음날 알게 되었지만 강을 건넌 다리의 이름이 마르기트 다리였다) 세 갈래로 나뉘어 지면서 내가 내려야 할 장소인 조제프 거리에 닿았다. 운전기사가 찾아 주는 가방을 받아 들고 두리번거리니 길 건너편에서 부다페스트에서 머무는 동안 나를 안내해 줄 반가운 웃음을 띤 사람 좋은 인상의 피터 하바스씨가 나를 알아보며 손을 흔들었다. 나 외는 아무도 내리는 사람도 없고 더욱이 동양인이다 보니 그도 나를 단번에 알아보았을 것이다.
삼거리에서 그의 아파트는 몇 발자욱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는데 들어서면서 본 건물의 내부 모습은 무척 낡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마도 지은 지 오래된 탓이리라. 사실 유럽의 대부분의 도시에는 비록 낡고 보잘 것 없어도 사소한 것 하나도 역사가 깃든 유물로 인정하고 내부를 개조하거나 수리를 해서 변화를 주는 경우는 있어도 대부분의 건물들이 지어진 그 당시의 외관을 유지하며 입구의 바닥에는 건물의 준공 연대를 적어 두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건물 외부의 장식도 없이 소박하게 지어진 직육각형의 단순한 콘크리트로 지어진 아파트인 것으로 봐서 아마도 공산치하에 지어진 건물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더욱이 조금 낡은 집이었지만 계단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엘리베이터도 설치되어 있는 것으로 봐서도 유럽에 흔히 볼 수 있는 100 년 정도 된 건물이 아닌 50 ~ 60 년대 지어진 건물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이 승강기의 단점은 올라 갈 때는 이용이 가능해도 내려 올 때는 계단을 이용해야 하는 것이었다.
하바스씨의 설명에 의하면 공산주의 국가시절 전력을 절약하기 위해서 이렇게 만들어졌다고 한다. 엘리베이터 내부의 벽은 합판으로 만들었는지 마치 뱀이 허물을 벗듯 페인트칠과 나무의 결이 벗겨지고 있었으며 수리를 한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러시아의 고르바초프 대통령 시절 공산권 개방 이후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변신한 대부분의 구소련 위성국들과 마찬가지로 헝가리도 자유민주주의 국가 체제로 바뀌었지만 경제적 사정은 여전히 어렵다는 신문의 기사를 읽은 것이 새삼 떠올랐다. 그래도 다른 동구권 공산국가 보다는 형편이 조금 낫다는 이 나라의 수도 한 복판에 자리하고 중산층이 사는 규모가 큰 아파트인데도 이 정도 밖에 안 된다는 사실에 안쓰러운 마음마저 들었다.
비록 늦은 밤이었지만 나를 환영하기 위해 식구들 모두가 잠자리에 들지 않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틀에 걸쳐 먼 극동에서 날아 온 나의 방문이 이들에게도 평소에는 쉽게 가질 수 없는 좋은 경험과 즐거운 만남이 되기도 하기에 이렇게 밤 늦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지만 다시 한 번 비행기의 연착으로 인한 본의 아니게 폐를 끼친데 대해서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우선 머물 방 안내를 받고 가방과 짐을 내려놓은 뒤 잠시 거실의 소파에 앉아서 따뜻한 차 한 잔과 함께 가벼운 대화를 나눈 뒤 내 방으로 다시 들어가니 우리나라에서 부다페스트에 도착하기까지 거의 이틀 동안 이어진 여정에서 오는 긴장이 풀어지면서 순간 엄습하는 피로에 쏟아지듯 쓰러져 잠에 빠져 들었다.
하바스씨 댁 거실에서 바라본 길 건너편의 성당, 고색창연한 모습이 인상적이다
둘째 날 (2006. 5. 26)
- 우랄 알타이어 : 우리말과 헝가리의 어원은 같다 고한다.
눈을 뜨니 어느새 높이 솟은 아침 햇살이 커튼을 뚫고 방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커튼에 나염된 다양한 원색이 만드는 빛의 현란한 흐름이 마치 중세 교회의 스테인드 글래스를 보는 듯 아름답게 느껴졌다. 그러면서 귓가를 스치는 안주인의 아침 준비 소리... 내가 머무는 방이 부엌 바로 옆이어서 가볍게 스치는 접시 소리까지 잘 들렸다. 잠이 덜 깬 눈으로 시계를 보니 아뿔사, 이미 8 시가 훨씬 넘어 있었다. 나의 늦잠 때문에 다른 사람의 아침식사까지 늦을 것 같아 염려스러워 얼른 일어나 밖으로 나오면서 마주친 하바스씨, 함께 나누는 아침인사는 서로가 서로의 언어는 모르니 영어로 간단하게 할 수 밖에 없지만 웃음 가득 머금은 그의 얼굴이 말 그대로 인자한 할아버지 같았다. 하긴 우리 나이로 예순이 넘은 노인이니 할아버지는 할아버지다.
다행히 늦잠을 잔 나를 기다리지 않고 아침 일찍 식사를 한 그의 아들은 이미 출근한 뒤였고 (딸은 대학교 기숙사에서 생활하고 있어서 집에는 머물지 않았다) 부부만 남아서 내가 일어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부인이 나의 식사를 준비하는 동안 세수를 한 뒤 잠시 거실 발코니에서 그 집 앞을 가로지르는 거리를 내려다보았다. 아침 시간이라 간밤에 합승버스에서 내렸던 삼거리 쪽에는 많은 사람들이 전차나 버스를 타기 위해 정류장에 서 있는 모습들이 보였고 우리나라의 대도시만큼은 아니어도 가장 복잡한 출근시간인 만큼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는데 지난밤에 보았던 적막한 풍경과는 달리 거리가 활기차게 느껴졌다. 다만 고풍스럽다 못해 낡고 빛바랜 건물들의 모습에서 한 때 전 유럽을 주름잡던 대 제국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쇠락한 뒷모습을 보는 것 같아 안쓰럽기도 했지만 그렇게 낡고 보잘 것 없을지라도 시간의 흐름을 담은 건물이나 돌 조각 하나라도 그대로 보존하는 그들의 정성이 느껴졌다. 하긴 이렇게 낡고 퇴색한 모습이라도 옛 것을 그대로 잘 유지하는 것이 단지 돈이 없어서 건물들을 새로 보수하지 못한 것이 아님을 아침 식사 후 나선 부다 캐슬로 향하는 길목에서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부다페스트 주 교통수단인 트램 (전차)
아침 식사는 따뜻한 수프와 함께 두 가지의 햄과 치즈를 곁들인 빵으로 하였는데 헝가리라고 해서 일반적으로 알려진 서양식 아침 식사와 다르지 않았다. 식사를 하는 동안 하바스씨는 한국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여러 가지를 물었으며 즐거운 대화를 이끌어 갔다. 특히 우리나라 말이 헝가리의 언어와 함께 같은 뿌리에서 나왔다는 것에 큰 흥미를 가졌다. 사실 그들의 언어인 "헝가리안 마쟈르" 어는 유럽 대부분의 나라와는 달리 우리말처럼 "우랄 알타이"어 계통이라서 비록 단어나 그 소리가 매우 달랐지만 문법에서 우리와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는데 단적인 예만 들더라도 다른 유럽인들처럼 성명을 쓸 때 이름을 앞에 쓰고 성을 뒤에 두는 것이 아니라 우리처럼 성 을 앞에 쓰고 이름을 뒤에 적고 부르며, 주소도 일반적인 서양의 방식(집 이름과 번지수부터 적기 시작해서 거리, 구역, 도시 이름 순으로 쓰는)이 아닌 우리처럼 도시 이름부터 시작해서 동네 이름 혹은 거리 이름을 쓰고 집이 앉아 있는 번지수를 적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을 부를 때는 "피터 하바스"라 하지 않고 "하바스 피터" 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생소한 유럽이지만 마치 우리의 이웃에 온 듯한 느낌이 들며 친근하게 느껴졌다. 헝가리라는 이름의 어원도 시베리아에서 살던 유목민인 "훈"족의 명칭에서 유래된 것이기에 만주 벌판을 달리며 시베리아를 통해 서역과 교통하던 우리의 먼 조상과 이들의 조상이 사이좋게 지내던 이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상상도 해보았다. 사실 헝가리를 제외하고는 유럽에서 "우랄-알타이"어계통의 언어는 핀란드어 밖에 없는데 핀란드인들도 시베리안루트를 따라 동쪽에서 서쪽인 유럽의 북쪽으로 와서 정착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여러가지 단어를 들며 헝가리 말과 우리말의 공통점을 찾으려 애써 보았지만 언어학자가 아닌 이상 그 것을 찾는 것은 쉽지 않았다.
마음씨 좋은 안주인의 따뜻한 미소와 함께 제공된 식사를 마치고 하바스씨와 함께 시내 구경을 나섰다. 하바스씨는 교육계에서 일을 하시던 분으로 이미 은퇴를 하셨다고 하며 현재도 계속 교육계의 명예 장학사로서 고문을 맡아서 일을 보고 계신다고 했다. 하지만 은퇴 이후 누리는 가장 큰 즐거움은 그 동안 미루어졌던 가족과의 시간을 많이 가지는 것과 최소한 일 년에 한 번은 온가족이 함께 2 주 정도 가까운 외국으로 휴가를 다녀오는 것이었다. 여유롭게 보이는 이 분의 사는 모습을 보면 우리가 막연하게 듣고 배우고 상상해 왔던 "여행과 거주에 대한 이동의 자유가 없이 국가와 당의 지시에 따라서 개인의 자유라고는 전혀 없는 공산주의 국가의 인민들"의 모습과 연관을 짓기 힘들었다. 게다가 하바스씨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공산주의 시절에도 그들의 삶은 그다지 통제된 것은 아니었다고 했다. 비록 오늘날처럼 무제한으로 누리는 완전한 자유는 아니었지만 우리가 생각했던 이상으로 이들도 나름대로 그 체제 안에서 개인의 사생활에 관한한 자유로운 삶을 누려 왔던 것이었다. 그러기에 자유를 향한 이 나라 사람들의 자유에 대한 불굴의 의지가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가 시작됨과 동시에 헝가리 공산당을 굴복시킨 것이리라.
다만 비록 공산체제를 벗어 던지고 자유경제 체제로 바꾸긴 했지만 오랜 세월동안 당국의 관리 하에 살림을 꾸려 온 이 나라의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자본주의 세계와 벌어지는 치열한 경쟁을 극복하고 경제적, 정치적 성공을 이루기란 쉽지 않은 것이었다. 그러기에 공산당 독재시절 모든 것을 계획과 통제 하에서 자신의 능력 너머 특별히 노력해야 할 필요가 없는 삶을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이 치열한 자유 경제 체제의 경쟁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힘들 뿐만 아니라 최근 들어 심해지는 정치와 경제의 불안 속에서 삶의 질이 공산주의 시절 보다 못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가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도 언젠가는 극복하게 될 것이며 그 때에는 이 힘든 시기가 지난 시절의 추억이 되어 마치 할아버지가 손주에게 역사를 이야기 해 주듯 한낱 이야기 거리가 될 것이라는 것을 거리에서 마주치는 많은 활기찬 젊은이들을 보면서 느낄 수 있었고 이 들도 우리나라의의 젊은이들과 마찬가지로 미래에 대한 꿈과 희망을 가지고 밝게 살아가는 것을 하바스씨의 아들과 딸에게서 다시 한 번 더 느낄 수 있었다.
- 부다 캐슬 (Buda Castle)
부다캐슬로 들어 가는 성문.
부다페스트에서 가장 유명한 명소인 "부다 캐슬"까지는 하바스씨 집에서 대략 3 Km 정도의 거리였지만 차를 타는 대신 걸어갈 것을 권했다. 버스나 전차를 이용해서 목적지로 가는 것은 편리한 점은 있지만 이동하는 동안에 보고 느낄 수 있는 여행의 묘미를 잃는 단점이 있기에 웬만한 거리의 경우 걸어 다니는 편이다. 목적지까지 한 달음에 내달려서 건축물이나 기념물을 재빨리 보고 또 다른 곳으로 부리나케 이동하는 것보다 천천히 걷는 발걸음에서 얻는 것이 훨씬 많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시간에 쫓기는 일정이 아닌 이상 걸어가면서 천천히 감상하면서 많이 보고 느끼려 했던 나로서는 오히려 잘 된 일이었다. 더구나 길 안내까지 맡아서 앞장 서 주시는 하바스씨가 있지 않은가. 나는 운이 좋게도 하바스씨 덕분에 단순한 관광이 아닌 그가 살아오면서 겪었던 격동의 시절에 있었던 여러 가지 이야기와 애환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함께 덤으로 들을 수 있었다. 특히 1956 년에 있었던 헝가리 국민들의 소련의 침공에 부다페스트 시민들의 항전에 대해서는 자신이 직접 겪었던 것이기에 더욱더 생생하였다.
동유럽의 여러 나라를 자신들의 지배하에 두고 각 나라에 꼭두각시 정부를 만들어서 그 나라들을 다스리며 서유럽과 미국에 대항해 더욱 강한 공산체제를 구성하려던 일이 지난 세기에 있었던 것은 모두가 잘 아는 바이다. 헝가리도 소련의 침공에 예외가 아니었고 이 불법 공격에 대한 부다페스트 시민들의 저항은 참으로 대단했고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는 비극이 벌어졌지만 그 자유를 위해 피를 뿌린 희생도 헛되이 소련의 침공을 저지하는 항거는 실패로 끝난 사건이 우리에게도 잘 알려져 있다. 그 때 항쟁을 하던 대학생들 중 한 사람이었던 하바스씨의 누나 (수잔) 와 그녀의 동지였고 서로 의지하던 사이였던 청년 (스티븐) 은 소련과 공산당의 추적을 피해서 국외로 탈출하면서 (처음에는 루마니아로 갔으며 그 곳에서 미국으로 망명을 했다고 한다) 결국 조국 헝가리로 오랫동안 돌아오지 못하였다. 그러다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헝가리도 공산주의를 버리고 민주주의 국가로 바뀌면서 가까스로 방문을 할 수 있었다. 그러는 동안의 이산가족의 아픔을 뼈저리게 겪은 사람들이 바로 하바스씨와 그의 가족이었던 것이다.
1956 소련군의 헝가리 침공 때 난사한 총탄의 흔적이 남아 있는 건물 앞에 선 하바스씨
그 때 탱크를 앞세우고 총으로 무차별 난사할 때 피해를 본 대상은 부다페스트 시민뿐만이 아니었다. 그 때 많은 건물들도 소련군의 무차별 공격에 엄청난 피해를 보았으며 총탄 세례를 받았던 건물들의 상흔이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부다 캐슬로 올라가는 길에 칠이 벗겨지고 도장해 놓은 시멘트벽이 떨어져 나간 평범한 건물들을 맨 처음 보았을 때 어려운 경제 사정 탓에 오래되고 낡은 건물들을 보수하지 못한 것으로 오해를 하였는데. 하바스씨의 설명을 듣고 비로소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낡고 볼품없는 건물들이 바로 그 당시 손상을 입었던 건물들이며 역사의 흔적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이 나라 사람들의 역사의식이 그 때의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는 배려를 한 것이었다.
부다 캐슬에서 바라 본 국회의사당
부다 캐슬은 두나강을 중심으로 이 도시의 남쪽 언덕에 자리한 성곽이다. 이곳에는 현재 대통령 집무실로 활용하는 건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시절 합스부르크 왕가의 왕궁으로 썼던 궁궐이 남아 있으며 화려한 조각의 첨탑이 유명한 고딕식 건축인 마챠시 성당, 그리고 도시를 굽어보고 있는 지점에 서 있는 어부의 요새가 있는데 어느 곳이든지 산 아래 두나강과 페스트 지역을 볼 수 있으며 그 느낌은 우리나라에 흔히 있는 산성의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는 것과 비슷한 기분이었다. 아마도 산봉우리에 자리 잡은 성곽이기에 그러리라. 그런데 위급할 때만 활용하던 우리의 산성과는 달리 이곳의 성 안에는 늘 사람들이 살고 있는 오래된 마을이 있고 지금은 부다페스트의 중심가가 페스트 지역의 평지에 자리 잡고 있지만 옛날에는 도시의 중심가가 바로 오늘날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이 곳 성 안의 오래된 거리였던 것이다.
성 안에는 옛날부터 지금까지 운영하고 있는 여러 가지 상점들이 있는데 특히 우리네 한약방과 같은 그들의 전통방식으로 꾸려 가는 약방이 눈에 띄었다. 의약 기술이 발달한 오늘날에도 이 나라 사람들의 전통의약에 대한 애정이 각별해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애용을 한다고 한다. 하바스씨가 약방에 대해 언급을 할 때만 해도 그저 우리의 민속촌에 전시되어 있는 한약방처럼 과거의 삶의 모습을 보여 주기 위한 것으로만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하바스씨는 진열되어 있는 의약재료들을 가리키며 요즘도 많은 사람이 전통 의약품을 널리 사용한다고 하였다. 아마도 우리도 전통 한약재를 꾸준히 쓰듯 헝가리인들도 그들의 전통 의약품을 애용하는 것 같았다.
전통 의약품을 파는 가게
사실 이 나라의 기초 과학 수준은 상당히 높은 편이며 노벨상을 받은 과학자도 나왔다고 했으며 그 훌륭한 기술로 제조하는 약품의 효능이 우수하다고 알려져 있는데 특히 천연 재료로부터 약품 원료를 추출하는 기술이 발달하여 우리가 즐겨 먹는 파프리카로부터 뽑아 낸 비타민 C 정제 알약은 세계적으로도 상당히 유명하며 관광객들에게도 인기 있는 기념품이기도 하였다.
성 안을 둘러보면서 느낀 것 중 가장 인상적인 것은 대통령 집무실이었다. 이 건물은 놀랍게도 우리가 걸어가는 길 바로 옆에 서 있었는데 건물 모습이 무척 소박하여 보통 건물과 같아 보였으며 수문장처럼 보이는 초병 두 사람만 보일 뿐 특별한 경호를 하고 있지 않았다. 하바스씨가 말하지 않았다면 그 곳이 대통령 집무실인 것도 몰랐을 것이다. 그만큼 나라의 수장이 머무는 집무실의 앞길조차 이렇게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을 정도로 자유로우니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그 옆을 지나가면서 올려다 본 건물의 창을 통해 정확한 내용물은 볼 수 없었지만 내부의 천장이 어떤 무늬로 꾸며 있는지 또 헝가리 국기와 함께 어떤 것이 실내에 걸려 있고 장식되어 있는 것도 조금이나마 보였다. 어떻게 보면 너무도 허술하게 느껴져서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이 느껴졌는데 이 정도의 경비는 공산치하에서도 같았다니 우리가 익히 알아 온 엄격하고 통행의 자유조차 없는 으스스한 공산국가의 이미지와는 너무도 다른 것이었다. 최근 우리나라도 청와대 부근을 개방하여 사람들이 자유롭게 통행 할 수 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경비가 삼엄해서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익히 들어온 나로서는 이 나라가 지니고 있고 국민들이 누리는 자유가 얼마나 훌륭한지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으며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와 삶의 질이 이들보다 무조건 낫다고만 할 수 없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하긴 물질적 풍요가 꼭 삶의 질과 비례하는 것은 아니라는 걸 잘 알지만...
헝가리 대통령 집무실, 그 옆의 길을 누구나 자유롭게 다닐 수 있다
어부의 요새는 부다 캐슬의 중심지가 되는 삼위일체 광장의 동쪽에 자리 잡고 있는데 이곳에서 내려다보는 두나(다뉴브, 혹은 도나우)강의 풍경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어디든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바라보는 풍경이 멋지지 않은 곳이 있으랴만 조금은 밋밋한 평야 위로 솟아 오른 다양한 건물들이 함께 어우러져 그려 내는 페스트 지역의 풍경을 바라보는 것은 과히 압권이었다. 특히 19 세기 후반에 지어진 국회의사당의 아름답고 웅장한 모습과 성 이슈테반 성당을 두나강 위를 가로지르는 8 개의 다리 중 가장 아름답다는 세체니 다리와 함께 잘 감상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이 곳 어부의 요새다. 맑은 햇빛과 푸른 하늘 아래 펼쳐진 광활한 평원 위에 건설된 웅장한 도시의 모습에서 과거 이 나라가 누렸던 부귀영화를 짐작할 수 있었다.
회랑으로 연결된 어부의 요새에는 장난감 집처럼 뾰족한 지붕을 이고 있는 작은 전망대가 있는데 아마도 이곳이 지난날 외적의 침입을 받아 어부들이 보초를 서며 방어를 담당하던 자리라 한다. 사방을 잘 감시할 수 있는 틘 장소인 만큼 오늘날에는 관광객들에게 가장 즐겨 찾는 전망대가 되어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지나간 역사에서 나라가 위급하면 언제나 위정자들보다 백성들이 먼저 앞장서서 외적을 물리친 것처럼 이 나라도 전쟁이 일어나면 민초들이 먼저 나서서 외적을 물리쳤나 보다. 그러기에 이 요새의 이름이 어부들이 노력과 희생을 기리는 것으로 삼았으니...
잔잔히 흘러가는 강물 위로 평화롭게 떠다니는 배들을 이 곳에서 바라보면 과연 이곳이 우리가 익히 들어
왔던 삼엄한 공산국가가 맞나 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모든 것이 편안하고 평화로우며 아름답게만 보였다.
삼위일체 광장과 어부의 요새에서
마챠시 (Matyas) 성당 앞에서
몸을 돌려 광장을 향해 걸어 나와 바로 옆에 있는 마챠시 성당으로 들어갔다. 유럽의 도시 대부분이 그렇듯 크건 작건 광장이 있으며 그 것을 중심으로 성당 혹은 교회가 서 있는데 이곳도 다르지 않았다. 특히 왕궁 옆에 있는 이 성당이 이 나라에서 가지는 위상은 높은 첨탑처럼 하늘을 찌를 듯 하며 부다페스트는 물론 이 나라 전체를 통 털어서 가장 중심이 되는 성당이다. 13 세기에 고딕식으로 지어진 성당은 준공 이래로 항상 국왕의 대관식이 열렸고 많은 국가행사를 치르던 곳이다. 하지만 역사의 흐름에 따라 많은 굴곡을 거치기도 했는데 특히 16세기 중반 터키의 지배하에 있을 때는 성당 내부의 프레스코 성화가 지워지면서 이슬람교도의 모스크가 되기도 했다. 그러다 17 세기 후반 터키가 물러나면서 다시 손질을 한 뒤 카톨릭 성당으로 돌아 온 후 지금까지 이어져 오는데 19 세기 이 나라의 황금기 때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하여 본래의 모습으로 복원되어 현재까지 그 모습을 잘 지니고 있는 이 나라 역사의 상징적인 건축물이다.
마챠시 성당 안에서 공연 연습중인 합창 단원들과 연주단원들
마침 우리가 들어갔던 성당 안에서는 곧 있을 합창공연을 대비한 단원들의 연습이 한창이었는데 하바스씨의 딸 비라그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성당에서 울려 퍼지는 합창곡들은 웅장한 내부의 벽에 메아리치면서 아름다운 화음을 이루고 있었는데 그들이 선택한 곡들이 성가들은 아니었다. 성당에서 하는 만큼 종교에 관련된 곡으로 하는 줄 알았지만 하바스씨는 연주회장이 단지 성당일 뿐 곡의 선택은 합창단 재량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종종 이렇게 합창단들이 성당에서 연주회를 갖는다고 하였다. 그러기에 연주회에는 기독교 신도이건 아니건 누구나 와서 감상한다는 것이다.
성당 안은 생각보다 어두웠는데 아마도 지나친 인공조명이 가하는 위험으로부터 성당 내부의 중요한 유물을 보호하기 위해서 많은 조명등을 설치하지 않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사실 유럽의 많은 역사유물과 공간에는 비록 어둡더라도 최소한의 인공조명만 설치한 것을 많이 볼 수 있는데 특히 채색이 되어있는 공간일수록 그 본래의 색이 바래지지 않도록 조명을 최소한으로 한다. 하지만 마챠시 성당 안은 얇은 금박을 입힌 내부의 장식 덕분에 신비스러운 느낌의 환한 빛이 흐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 나라 사람들의 문화재에 대한 세심한 배려가 곳곳에 스며있는 것을 성당 안 구석구석 깨끗하게 손질한 것으로 봐서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성당이 쌓아 온 세월을 얼마나 오래된 것인가를 퇴색되어 가는 성화들에서 잘 느낄 수 있었다. 성당 내부를 한 바퀴 돌며 구경한 뒤 합창단의 리허설을 조금 감상하고 나서 하바스씨가 그의 딸에게 눈짓을 하였다. 연습을 마치면 밖에서 보자는 신호였던 것이다.
다시 밖으로 나와서 근처의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햇살이 상당히 따가운 것이 벌써 한여름과 같은 느낌이 들었다. 모두 함께 다른 음료수는 필요 없이 전통 헝가리식 맥주를 주문하고 그늘 아래 앉아 있으니 하바스씨의 딸과 그녀의 약혼자 함께 우리가 있는 곳으로 왔다. 잠시 동안의 대화였지만 몇 가지 알 수 있었던 것은 이 나라의 경제 사정이 여의치 않아서 많은 젊은이들이 취직을 못해서 힘들어 하며 다수의 젊은이들이 외국으로 직장을 구해서 떠난다는 것이었다. 하바스씨의 딸 비라그의 약혼자도 영국에 있는 회사에 취직이 되어서 가을에는 영국으로 이사를 간다고 하였다. 하지만 비라그는 아직 졸업을 하지 않은 상태라 졸업 후에 결혼식을 올린 뒤 영국으로 가서 합칠 거라고 했다. 그래도 이 경우에는 상당히 잘 풀린 경우이지만 대다수의 젊은이들은 힘든 경제 사정으로 인해 취업을 못해서 무척 힘들어 하며 그 것이 사회적 문제가 되고 갈등을 불러일으키면서 나라 전체의 분위기가 상당히 좋지 않다고 했다. 이런 저런 경제 사정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니 이 나라의 젊은이들도 우리의 젊은이들이 겪는 어려움과 다를 바 없는 것을 새삼 느꼈다. 그래도 이 나라는 유럽연합의 일원이기에 자국뿐 아니라 이웃나라 혹은 멀리 떨어진 나라라도 유럽연합에 속한 나라라면 어디든 거주이전의 자유와 함께 취직이 가능하지만 우리나라는 그렇지도 못하니 이들보다 형편이 낫다고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페 앞에서 바라본 부다 캐슬의 중심가, 관광객을 위한 마차가 지나간다
부다 캐슬의 안을 둘러보니 생각보다 훨씬 넓은 언덕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고 한 쪽에는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초기 헝가리 건국시절에 조성되었던 성의 유적을 발굴하는 곳도 있었다. 벽돌로 쌓은 초창기 성의 유적에서 이 나라의 역사도 짧지 않은 것을 알게 되었고 부서진 벽돌 한 조각조차 소중하게 다루는 이들의 역사에 대한 애정을 곳곳에서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성안의 시가지를 형성하는 집들이 최소한 이백 혹은 삼백 년이 되는 비록 오래 된 것들이지만 사람들이 계속 살면서 식당이나 카페 혹은 기념품 상점으로 계속 활용하는 것이 인상 깊었다. 그에 비해서 보존을 위해 비워둔 채로 관리하는 우리의 실정을 다시 한 번 돌아보게 되며 어느 쪽이 더 합리적이고 효율적으로 유지하는 것인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부다 캐슬 안의 유적 발굴 장소, 부다페스트는 로마시대 때부터 이 지역 중심 도시로 형성되기 시작했다.
부다 캐슬 안에는 여러 가지 다양한 건축물들이 있었는데 그 어느 것보다도 화려하고 웅장한 건물은 역시 왕궁이었다. 이제는 왕실도 왕정도 없어진 상태라 그냥 역사적 유물로 보존하고 있을 뿐이지만 여전히 예전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시절 누렸던 영화의 절정을 화려하고 웅장하게 잘 나타낸 건축물로서 외관만 보아도 찬탄을 금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왕궁의 입구에 서있는 철제 대문 위 앉아 황금반지를 물고 있는 까치 혹은 까마귀 조각상이었다. 어쩌면 왕실의 상징인지 모르겠으나 내 생각으로는 일종의 액막이로 만든 것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즉 유럽에서는 까치나 까마귀를 같은 종류의 새로 인식하며 보석을 훔치는 도둑으로 비유하는데 왕실의 보석이나 귀중품, 혹은 나라의 보물을 도난으로부터 막기 위한 액막이로 만들어서 올려놓은 지도 모를 일이다. 마치 우리나라 조선시대 때 화재를 막기 위해 대궐 앞에 해태의 상을 만들어 세운 것처럼...
부다 캐슬 안의 오래된 건물을 활용한 레스토랑
왕궁 정문에 장식된 황금반지를 물고 있는 까치 혹은 까마귀
성 이슈트반 (Szent Istvan) 성당과 세체니 (Szechenyi) 다리
이 왕궁의 입구 옆에 있는 언덕에서 내려다보는 두나 강과 페스트 지역의 경치도 매우 훌륭했는데 어부의 요새에서 바라보는 모습과는 또 다른 풍경이었다. 즉 남쪽에 우뚝 솟은 바위산인 겔레르트 언덕으로 이어지는 숲으로 뒤덮인 경치가 이어지면서 그 언덕 앞부분 강을 향한 절벽 위에 높이 서있는 승리의 여신상도 조금이나마 보였다. 이 여신상은 강을 따라 이어지는 페스트 지역의 도로에서 아주 멋지게 잘 보이는 이 도시의 상징적인 동상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페스트 지역의 상징적인 건물이라 할 수 있는 성 이슈트반 성당과 함께 이어지는 세체니 다리의 모습이 가장 훌륭했다.
왕궁 앞의 언덕 아래에는 왕궁 쪽으로 바로 올라올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케이블카가 있다. 사실 우리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형태의 케이블카를 유럽에서는 곤돌라라고 부르며 여기서 케이블카라고 하면 이렇게 굵은 강철 밧줄로 톱니바퀴를 단 기차를 끌어 올리는 것을 말한다. 비록 부다캐슬이 높지 않아서 걸어서 오르내리는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지만 어린이나 노약자가 아니더라도 한 번쯤은 타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케이블카였다.
부다 캐슬을 오르내리는 케이블카
부다 캐슬 관광을 마치고 비라그와 그의 약혼자와 헤어진 뒤 내려오는 길에 관광안내로 인한 수고로움에 대한 보답으로 점심 대접을 하기로 했다. 하바스씨는 오는 길에 보이는 여러 음식점 중 평소에도 종종 그 맛을 즐긴다는 중국음식점을 골랐다. 이 세상 어디든 볼 수 있다는 중국음식점, 중국음식에 대한 인기는 헝가리 사람들에게도 상당하다고 한다. 하지만 유럽의 대부분의 나라에서 그렇듯 한국음식점은 이 곳에서도 찾기가 쉽지 않은 듯 했다. 부다페스트 어디엔가 한 두 곳 쯤 있을지 모르나 아쉽게도 한국음식점이 어디 있는지 하바스씨는 모른다고 했으며 그의 친구들이나 그가 아는 사람들도 한국음식을 맛 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 유럽의 다른 나라 사람들과는 달리 이 나라의 사람들도 매운 음식을 즐겨 먹는데 갖은 양념으로 감칠 맛 나는 한국 음식의 맛을 한 번이라도 경험하면 그 익숙한 맛에 쉽게 빠져 들며 잊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점심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 온 뒤 하바스 부인이 주는 따뜻한 차 한 잔을 들고 휴식을 취했다. 하바스씨는 피곤한 탓인지 낮잠을 잠시 즐겨야겠다고 하며 방으로 들어갔다. 아무래도 연세가 있으시니까 오전 내내 걷고 안내하는 것이 많이 피곤했을 것이다. 그 동안 나는 안주인인 캐시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집의 여러 가지를 구경하였다. 동양에 대한 관심이 큰 듯 집안의 몇몇 장식품들은 중국에서 온 도자기라든지 동양풍의 물건들이 눈에 띄었지만 무엇보다도 하바스씨의 부모와 조부모 사진과 더불어 캐시의 부모와 조부모 및 온 가족의 사진들이 거실 한복판 가장 눈에 띄는 장소의 액자 속에 진열되어 있었는데 이들의 삶 또한 우리네 인생처럼 얼마나 가족의 소중함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느끼게 하는 순간이었다. 그 외 하바스씨의 긴 공직 생활동안 받았던 상장이나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물품들도 벽난로 위에 소중하게 진열되어 있었다.
- 루카치 (Lukacs) 온천
잠시 눈을 붙이고 다시 일어난 하바스씨가 온천을 가기 위해 준비하면서 날더러 수영복과 수영모를 챙기라고 하였다. 목욕을 가는데 웬 수영복과 수영모인가 하며 의아하게 생각했지만 막상 그 곳에 가서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이 곳 온천장은 우리의 공중목욕탕과 같은 곳이 아니라 남녀가 함께 종류가 다양한 여러 개의 탕 안에서 함께 온천욕을 즐기는데 우리의 일반 수영장과 같은 곳이었다. 그러기에 모두가 수영복과 수영모를 당연히 착용해야 하는 것이었다.
하바스씨 집에서 루카치 온천까지는 걸어서 10 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원래는 신경통이나 외상 환자들이 이용하던 곳이라고 하며 노인들과 환자들은 무료로 이용하는 곳인데 생각보다 큰 규모에 놀라웠다. 야외 수영장이 몇 개가 있으며 -그 중 가장 넓은 곳은 스파 시설이 있는 온천 수영장이었다- 실내에도 여러 가지 온천탕이 구비되어 있었는데 중세풍의 오래된 건물에서 느껴지는 예스러운 멋과 온천이 주는 따뜻하고 편안한 분위기가 어울리는 이곳에서 한국에서는 쉽게 느낄 수없는 독특하고 색다른 온천욕을 즐길 수 있었다. 이 온천은 이미 로마시대 때부터 이용해 온 곳으로서 근육통 해소에 큰 효능이 있다고 하는데 부다페스트로 방문하시는 연세든 분들이 이용할 만한 곳이라 생각된다. 그래서인지 루카치 온천에는 예상대로 많은 노인들이 이용을 하고 있었는데 그렇다고 젊은 사람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헝가리는 온천이 풍부한 나라이며 국제적인 규모의 온천장만 해도 450 군데나 된다고 한다. 부다페스트에만 해도 100 여 군데가 된다고 하니 그 엄청난 숫자에 사실 무척 놀랐으며 헝가리 국민은 물론 인근 국가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전 유럽에서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온천에 관한한 천국과 같은 나라라 할 수 있겠다. 사실 오래 전 TV에서 본 어느 여행 프로그램에서 이 나라의 온천에 대한 것을 본 적이 있어서 약간의 정보는 가지고 있었지만 이렇게 많은 수의 온천장이 있으리라고는 미처 알지 못 했다. 사실 이 나라 사람들은 거의 매일 온천을 마음껏 즐길 수 있는 시설이 지천으로 널려 있어 온천의 혜택을 차고도 넘칠 정도로 톡톡히 보고 있는 셈인데 온천을 좋아하고 즐기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부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온천을 즐기고 돌아오니 맛있는 냄새가 현관문을 열면서부터 내 코를 사로잡으며 시장기를 더욱 더 크게 자극하였다. 그것의 진원지인 부엌 옆을 지나면서 열심히 음식을 장만하는 하바스 부인에게 인사를 건네면서 물어보니 굴라쉬라고 하는 헝가리 전통음식이라 한다. 음식의 내용물은 무엇인지 알 수 없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우리의 입맛에도 맞을 듯 구수하게 느껴지면서 입안에 군침이 돌게 하는 아주 좋은 냄새였다. 다시 거실에 나와 잠시 하바스씨와 유니쿰(Unicum ; 다양한 약초를 넣어서 만드는 헝가리 전통주로서 알코올 도수가 높은 술)을 작은 잔으로 함께 들며 대화를 나누며 함께 식사를 할 아들이 직장에서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헝가리 음식에는 동양의 맛이 가미되어 있는데 이 나라의 역사에서 보듯 동양과 서양이 만나는 곳에 자리한 지리적인 특성이 음식에도 나타난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매운 고추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고춧가루를 즐겨 쓰는 헝가리 사람들은 굴라쉬에도 고춧가루를 빠트리지 않는다. 굴라쉬의 그 생김새와 맛은 우리의 육개장과도 비슷하지만 우리 맵지는 않았다. 어느 음식인들 제대로 하려면 손이 많이 가지 않으랴만 이 굴라쉬라는 음식도 그러했다. 여러 가지 채소와 향신료(월계수 나무 잎도 넣는다)를 깍두기처럼 썬 우리의 장조림에 주로 쓰는 기름기 적은 살코기와 함께 국물에 넣어서 오랜 시간 뭉근하게 끓이거나 오븐에 오랫동안 그 열로 익혀 요리한다. 익혀지는 동안 여러 양념이 함께 어우러지면서 소고기의 구수한 맛을 더해서 먹기 좋은 국의 형태로 되며 누구에게나 맞는 그 친밀한 맛으로 인해 이 나라 뿐만 아니라 유럽 전역에서 인기 있는 보편적인 음식이 되었다. 마치 파스타가 이태리 사람들만의 음식이 아닌 것처럼... 그런데 다른 유럽의 여러 나라와 달리 헝가리에만 유독 고춧가루가 다양한 음식에 많이 애용하는 것을 보면 이 나라 사람들의 입맛에 고추가 잘 맞다는 뜻인데 그 또한 이 사람들의 뿌리가 동방에서 시작된 것이 한 원인은 아닐까 하는 억측도 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