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poema Jul 03. 2023

들라크루아 일기_18220903

9월 3일 화요일, 루루

외젠 들라크루아의 일기


1822년 9월 3일 화요일, 루루*


그토록 여러 번이나 계획했던 일기쓰기를 시작한다. 가장 강렬하게 원하는 것은, 오직 나만을 위한 일기를 쓰는 것이다. 그러니 진실할 것이며, 그러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더욱 나은 사람이 될 것이다. 내가 변덕을 부린다면 이 글이 나를 꾸짖을 것이다. 나는 행복한 기분으로 시작한다.

나는 지금 형 집에서 머물고 있다. 방금 전 루루의 종탑이 울렸고, 저녁 아홉시 혹은 열 시가 된 것 같다. 밝은 달빛 아래에서 5분 동안 앉아있었다. 문 앞에 있는 작은 벤치에 앉아 정신을 집중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오늘의 나는 행복함에도 불구하고 어제 밤에 느낀 그 감각을 다시 되살릴 수가 없다……. 그때는 보름달이 떠 있었다. 형의 집 맞은편 벤치에 앉아, 나는 감미로운 순간을 맛보고 있었다. 우리는 저녁을 함께 한 이웃들을 배웅하고는 연못을 한 바퀴 돌고 나서 집으로 돌아왔다. 형은 신문을 봤고, 나는 이곳에 올 때 챙겨온 미켈란젤로의 그림을 보며 특징을 공부했다.** 그의 위대한 그림을 보는 것만으로 나는 깊은 감명을 받았고 유쾌한 기분에 빠져들었다. 맑은 하늘 위에는 아주 둥글고 붉게 빛나는 달이 나무 사이에서 조금씩 위로 떠오르고 있었다. 나는 몽상에 빠져있고 형은 사랑에 대해 얘기를 하고 있는 그 때, 멀리서 리제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심장을 요동치게 만드는 그녀의 목소리. 그녀에게 있어 다른 무엇보다 가장 강력한 매력은 목소리이다. 왜냐하면 그녀는 전혀 예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녀에게는 라파엘로가 아주 잘 아는 뭔가가 있었다. 청동처럼 매끈하고, 동시에 섬세하면서도 단단한 그녀의 팔처럼. 그녀의 얼굴은 정말 예쁘진 않지만, 그럼에도 젊은 여성의……관능이랄까 정숙이 뒤섞인 미묘한 매력이 있다……. 그러니까 그녀가 온 것은 이삼 일 전 일요일, 우리가 디저트를 먹고 있을 때였다. 몸을 너무 꽉 조인 옷을 입고 온 것이 맘에 들지 않았음에도, 그날의 그녀가 마냥 좋았다. 무엇보다 내가 좀 전에 말한 천상의 미소 때문에. 누군가의 야한 농담이 그녀를 간질였고, 그녀는 자신의 감정이 드러날까 눈을 내리깔았다. 그렇지만 용모와 목소리에서 그녀가 흥분한 게 느껴졌다. 왜냐하면 나의 사소한 질문에 답하면서도, 그녀는 (목소리가) 조금 흔들렸고 나를 단 한 번도 쳐다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숄 아래로 가슴이 떨리는 게 보였다. 내 기억으로는 바로 그날 저녁이었다. 마을에서 돌아오는 길에, 집에서 정원으로 이어지는 어두운 복도에서 나는 그녀에게 입을 맞췄다. 다른 사람들은 앞서 지나갔고 나는 그녀와 함께 뒤에 남은 참이었다. 그녀는 계속해서 멈추라고 말했지만, 목소리는 아주 작고 사근사근했다. 이 모든 건 별 일 아니었다. 아무렴 어떤가? 그녀에 대한 추억은 내가 걷는 길 위에서, 그리고 나의 기억 속에서 알랑거리는 한 송이 꽃이 될 뿐, 나를 열정에 사로잡히게 만들지는 않을 것이다. 그녀의 목소리는 내 기억에서 사라져가는 엘리자베스****를 떠올리게 한다.


━ 일요일에는 펠릭스*****로부터 편지를 한 통 받았는데, 내 그림이 뤽상부르 박물관에 걸렸다는 소식이었다.****** 화요일인 오늘까지도 여전히 그 소식으로 벅차다. 고백하건대 이것은 나에게 대단히 좋은 일이어서 생각만 해도 나의 하루는 즐거움으로 물든다. 지금 이것 말고는 다른 생각을 할 수 없고, 오직 파리로 되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다. 아마도 그곳에 가면 타인들이 애써 감추는 질투만 보일 테고 지금 느끼는 성취감도 곧 싫증날 테지만 말이다. 게다가 거기에는 리제뜨도 없고, 나를 숨 쉬게 하는 평화도, 달빛도 없다.

월요일, 그러니까 어제 밤의 기분을 되찾기 위해, 나는 달콤했던 저녁의 기억을 그림으로 남기고 싶었다. 내가 제일 편하게 느끼는 벤치에 앉아, 내 눈에 보이는 풍경을, 내 화첩 속에 남기고 싶었다. 나의 아이디어와 내적 기쁨을 다시 되찾고 싶다……. 아무쪼록, 내가 계속해나갈 수 있기를!


━ 파리에 도착하면 바쁘게 지내기 위해 하려고 했던 계획들을 잊지 말 것, 그리고 떠오른 그림 주제를 놓치지 말 것.


[각주] 프)는 프랑스어버전 영)은 영어버전에 있는 각주입니다.


* 프) 외젠 들라크루아는 루루에 있는 친형 샤를 들라크루아의 집에서 휴가를 보내곤 했다. 루루는 투렌 지방, 로쉬 주에 속하는 지역으로 루앙과 가까운 곳이었다. 외젠 드 보아르네 왕자의 참모를 지내기도 했던 샤를 들라크루아는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루루의 집을 물려받았다.

  영) 루루는 로슈 도(앵드르 에 루아르)에 있는 마을이다. 들라크루아는 형 샤를 들라크루아 장군의 작은 집에 와서 종종 휴가를 보냈다. 1779년 파리에서 태어난 장군은, 제국 군대에서 뛰어난 업적을 쌓았다. 외젠 왕자의 참모를 지냈던 그는 1815년 드비나 강에서 부상을 당하고 상트페테르부르크에 포로로 잡혀간다. 그는 1816년 육군원수로 승진하고 임금의 반을 받으며 퇴임 한다. 그는 여관주인의 딸과 결혼함으로 가족과 사이가 나빠진다. 그러나 외젠은 늘 형에 대해 강한 애착을 드러냈다.

** 영) 들라크루아는 거장들의 그림을 똑같이 그리거나 그들의 선을 따라 연습했다.

*** 프) 젊은 화가 들라크루아의 관심을 끌었던 “리제뜨”에 대해, 그는 1822년 8월 18일 친구 삐에레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나는 지금 자네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매력적인 여성으로부터 약 3미터 떨어진 채 이 편지를 쓰고 있네. 이 도시의 다른 미인들과는 아주 다르지! 햇볕에 그을린 단단한 팔은 마치 청동처럼 흠잡을 데가 없어. 그녀의 모습은 고대의 사냥꾼을 떠올리게 한다니까. 우리의 친구 펠릭스 (기유마르데)에게 말해줘. 신여성이라면 질색하는 그마저도 리제뜨를 보면 무장해제하게 될 거라고. 게다가 그녀뿐만이 아니야. 이곳의 시골 여인들 모두 당당해보여. 모두가 라파엘로의 그림에서나 볼 수 있는 얼굴과 몸매를 가졌지. 파리 여자들의 맥 빠진 무미건조함과는 차원이 다르다니까. 하지만 슬픈 일이 있어! 몇 번의 도둑키스에도 불구하고 나의 체를리나와는 잘 될 것 같지가 않아. 사랑은 잔인해.>> (들라크루아의 편지 89쪽)

**** 영) 엘리자베스 설터는 영국 여인으로 들라크루아의 누이인 마담 베르니낙의 여종이었다. 외젠은 그녀와 함께 잠자리를 가졌고 그녀의 초상화를 그렸다.

***** 프) 들라크루아의 절친한 친구 중 하나인 펠릭스 기유마르데를 칭한다. 그의 이름은 이 일기 초반에 거의 매번 등장한다.

   영) 들라크루아와 어렸을 때부터 절친하게 지낸 펠릭스 기유마르데는 국민공회 소속이자(1792-5) 외젠의 아버지 샤를 들라크루아의 친구였던 페르디낭 기유마르데의 아들이다. 그는 스페인의 대사가 되었고 고야가 그린 그의 초상화는 현재 루브르에 있다.

****** 프) 1822년 살롱전에서 선보인 단테의 조각배는 뤽상부르 박물관에서 전시되었다가 현재는 루브르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정부는 이 작품을 천이백 프랑에 사들였다. 당시 들라크루아가 그림의 판매와 관련해 연락을 취하던 사람은 왕립 박물관(*루브르)의 박물관장 포르뱅 백작이었다. 들라크루아는 이 사안을 논하는 편지에 이렇게 적었다. <<이천사백 프랑을 받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만약 제 요구가 과하다고 생각하신다면, 현 상황에 맞는 적당한 가격을 정해주시면 전적으로 따르겠습니다. 저에게 보여주시는 적극적인 호의에 감동한 제가 어찌 당신이 정해주시는 작품 가격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겠습니까. 당신은 많은 그림 가운데서 제 작품을 골라 관심을 갖고 보아주시는 분이니까요.>> (들라크루아의 편지 87쪽)

   영) 단테의 조각배는 1822년 살롱전에서 선보인 작품이다. 이 그림은 정부가 1,200프랑에 사갔다. 현재는 루브르에 있다.

(단테의 조각배)


작가의 이전글 동화_풍선 날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