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으로의 긴 여로
아이는 눈을 감았다. 이제 여행을 떠날 시간이다. 그러나 이것은 몸을 움직여하는 여행은 아니었다. 아이의 밤여행은 머릿속에서 하는 여행이었다. 잠을 자기 위해 눈을 감으면, 아이의 시야에 아주 기나긴 복도가 펼쳐진다. 깜짝 놀라 눈을 뜨면 별자리 스티커를 붙여 놓은 천장이 보인다. 다시 잠을 청하기 위해 눈을 감으면 아까 그 복도가 똑같이 펼쳐진다. 벌써 며칠 째 이어지고 있는 이상한 현상이었다. 아이는 처음에 너무 혼란스러워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그러나 마냥 그렇게 잠을 물리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잠을 자야 했다. 아이는 잠이 좋았다. 그 포근함이 좋았다. 그러니 일단 눈을 감아야 했다.
아이는 다시 눈을 감았다. 복도가 펼쳐져 있다. 그 길을 걷다 보면 양쪽으로 수없이 달려 있는 문이 아이를 반겼다. 아이는 요 며칠 이리저리 길을 참 많이도 헤맸다. 오른쪽 첫 번째 문으로 들어가 보고 왼쪽 세 번째 문으로도 들어가 봤다. 오른쪽 첫 번째 문으로 들어간 날, 아이가 만난 건 수북하게 쌓인 장난감이었다. 아이는 그곳에서 꽤나 긴 시간을 보냈다. 그동안 갖고 싶었지만 사지 못했던 장난감이, 그야말로 수북하게 쌓여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는 껑충껑충 뛰며 모든 장난감을 섭렵하겠다는 듯이, 마치 며칠이나 굶은 아기 호랑이처럼 장난감을 가지고 놀았다. 그리고 그날은 그렇게 잠을 이루지 못한 채, 엄마가 깨우는 소리에 아쉬워하며 그 방에서 나와야 했다. 눈을 감았으나 잠을 자지 못한 꼴이니, 아이는 학교에서 내내 졸았고, 선생님께 꾸중을 들었다.
그다음 날은 왼쪽 세 번째 문이었다. 거기에는 그동안 먹고 싶었던 모든 음식이 그득했다. 엄마가 먹지 말라던 달콤한 사탕부터, 초콜릿 폭포, 과자로 만든 집까지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였다. 아무리 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았다. 아이는 신이 났다. 아무리 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은 데다가 질리지도 않았다. 아이는 그렇게 그 방에서 밤새 시간을 보낸 후, 학교 가자고 이름을 불러대는 짝꿍의 목소리에 어쩔 수 없이 눈을 떠야 했다. 아직 입에는 단맛이 남은 것 같았지만, 역시 잠을 자지 못해 허공에 붕 뜬 기분이 들었다.
아이는 학교에 가는 내내 짝꿍이 하는 말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고, 이날엔 졸다 못해 거의 자다시피 해서 교실 뒤에서 팔을 들고 서 있어야 했다. 아이는 이제 더 이상 방을 헤매는 짓은 그만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꼭 잠의 방을 찾아, 단잠을 자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렇지만 어떻게 해야 하지? 도저히 그 수많은 방문을 모두 열어보고 달아난 잠을 찾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아이는 시무룩한 기분이 되었다.
한편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짝꿍은 아이가 걱정이 됐다. 요 며칠 계속 잠을 못 잔 듯 수업시간 내내 졸았고, 선생님 말씀에도 집중하지 못했다. 뭔가 이유가 있음이 분명하다. 꼭 그 이유를 물어봐야겠다 다짐했다.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의 뒷모습이 위태위태해 보인 그 순간, 짝꿍은 아이에게 물었다. 아이는 그냥 어깨를 으쓱해 보이더니 말했다. 잠으로 가는 방을 찾을 수 없다고. 짝꿍은 무슨 뜻인지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친구에게 단잠을 선물해주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짝꿍은 어쩐지 비장해진 마음으로 집으로 향했다.
아이는 어젯밤, 기나긴 복도를 지나 몇 번째인지 모를 문으로 들어갔다. 이곳에서는 제발 잠을 자고 싶었다. 그러나 거기에 나타난 것은 아이가 제일 좋아하는 오락을 모아 놓은 오락실이었다. 아이는 엄마의 잔소리 없이 오락을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자 기쁨의 환호성을 질렀다. 그러고는 잠의 방을 찾을 생각도 없이, 내일을 걱정할 틈도 없이, 정신을 빼고 오락만 했다. 그렇게 재밌게 오락을 한 것은 실로 오래간만이었다. 아이는 기분이 좋았다. 비록 내일 교실 뒤에서 벌을 받는다고 해도, 이 방은 또 오고 싶었다. 그렇지만 문제가 있었다. 이 복도에는 방문이 너무 많은 데다가, 오늘은 몇 번째 방문인지 세지도 않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이 방에 또 오는 것은 아마도 진짜 꿈속에서나 가능할 일이었다.
오락에 빠져 있는데, 누군가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는 게 느껴졌다. 이 방에 나 말고 다른 사람이 있나? 뒤를 돌아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아이는 혹시 하는 마음에 눈을 떴다.
별자리 스티커를 붙인 천장이 보이더니, 시야에 엄마의 얼굴이 들어왔다.
잘 잤니?
분명히 고이 자는 모습이었기에 엄마는 아이가 단잠을 잤으리라고만 여겼다. 엄마는 아이의 감은 눈앞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절대 알 수가 없었으리라. 아이는 엄마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지만, 거짓말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냥 고개를 흔들어 보였다. 그러고는 짝꿍과 함께 학교 갈 준비를 했다.
아이는 오늘도 꾸벅꾸벅 졸았고, 선생님은 한 번만 더 그러면 집에 전화를 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아이는 늘 엄마는 물론이고 선생님의 말도 잘 따르는 일이었기에, 이런 일은 선생님을 놀라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렇게 선생님께 혼나본 적이 없는 아이 역시 놀란 건 마찬가지였다. 더 이상 이럴 수는 없다. 꼭 잠의 방을 찾아야 한다. 그러나 그 방법을 알 수가 없는 아이는 이내 울상이 되었다.
바로 그때였다. 짝꿍이 뭔가를 내밀었다. 하얗고 포근한 무언가를. 그것은 긴 귀를 늘어뜨린 토끼인형이었다. 짝꿍은 토끼 인형을 안고 자면 잠이 잘 온다며, 나는 필요 없으니 너에게 줄게,라고 말했다. 이미 울상을 짓던 아이는 더욱 울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고맙고 어쩐지 미안한 마음이 동시에 들었다.
아이는 입을 떼며 눈물이 날까 그냥 고개만 세차게 끄덕였다. 그러나 그 바람에 또르르 눈물이 떨어졌다.
그날 밤, 아이는 반쯤은 믿고 반쯤은 의심하는 마음으로 토끼 인형을 품에 안았다. 그러고는 눈을 감았다.
눈앞에 긴 복도가 펼쳐져 있다. 아이는 한숨을 푹 쉬고 고개를 떨어뜨렸다. 오늘도 글렀어. 그런데 품속에 안은 토끼 인형이 꼬물꼬물 움직이더니 품에서 나와 바닥으로 멋지게 착지를 했다. 그런 후 나만 따라오라는 듯이 뒤를 한 번 돌아보았다. 아이는 신기하기도 하고 얼떨떨하기도 한 마음으로 천천히 발을 뗐다. 토끼는 깡총깡총 뛰면서 아이가 잘 따라오는지 계속 뒤를 살폈다. 가끔 한숨을 쉬는 것으로 보아 아이의 걸음 속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걸었을까. 몇 번째인지도 모를 문 앞에서 토끼가 걸음을 멈췄다. 토끼는 아이를 보고 끄덕이더니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 문을 열어 봐.”
아이는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은 마음에 토끼를 다시 품에 안았다. 그리고 조심스레 방문을 열었다. 방은 어둑어둑했기에 눈이 적응하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아이는 눈을 떴다 감았다 하며 방 안을 살피기 위해 노력했다. 어둠에 눈이 적응하자, 드디어 방 내부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방 벽에는 연한 하늘색의 벽지가 발라져 있었는데, 아주 작은 토끼들이 규칙적으로 점점이 박혀 있었다. 신기하게도 천장에는 집에 있는 것과 똑같은 별자리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그리고 하늘하늘한 커튼이 창문 사이 미풍으로 흔들리고 있었고, 창문 아래에는 한눈에 봐도 푹신해 보이는 침대가 자리하고 있었다. 아이는 어리둥절했지만 곧 이해했다. 토끼인형이 나에게, 아니 짝꿍이 나에게 단잠을 선물했구나. 아이는 토끼를 그대로 안은 채 침대 안으로 들었다. 토끼는 이미 잠든 상태였다. 아이는 기분 좋은 미소를 짓고는 이불을 턱 밑까지 끌어올렸다. 따스하고 포근한 이불속에서 아이는 곧장 잠에 빠져들 수 있었다.
밤으로의 긴 여로가 그렇게 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