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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의정원 Jan 26. 2024

디즈니 입사한 한국인 "입시미술 안 배워 다행이다"

[인터뷰] '오늘도 나는 디즈니로 출근합니다'를 쓴 김미란씨의 도전 ②

과거 얘기를 좀 해보겠습니다. 무턱대고 미국으로 왔고, 거기서 디즈니가 세운 예술학교인 칼아츠(캘리포니아 인스티튜트 오브 디 아츠, California Institute of the Arts)에 입학했어요. 처음부터 칼아츠를 가야겠다고 마음먹고 미국에 온 건 아니었죠?

"네. 처음엔 그런 학교가 있는지도 몰랐어요. 우연히 미국에서 애니메이션 <알라딘>을 보게 됐는데요, 머릿속이 복잡해지더라고요. 애니메이션을 하려고 미국에 왔는데 그때까지 뭘 어디서 공부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있었으니까요. 심란한 마음으로 서점에 갔는데 <아트 오브 알라딘>, <아트 오브 애니메이션> 같은 책이 있는 거예요. 유학 오기 전 한국에서 자료를 좀 찾아보려고 서점을 아무리 뒤져봐도 애니메이션에 관한 책 한 권이 없었거든요.


신기해서 보고 있는데, <알라딘>을 만든 스태프 프로필에 전부 칼아츠라고 적혀 있어서, 대체 뭐지 하면서 찾아보게 됐죠. 그렇게 칼아츠가 디즈니에서 만든 예술학교라는 걸 알게 됐고, 여기를 꼭 가야겠다고 마음먹게 됐어요. 어떻게 보면 디즈니가 제 길을 알려줬다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 한국에서 그림을 배운 적이 없다고 들었는데, 커뮤니티 칼리지에서 일 년 남짓 그림을 배우고 칼아츠 입학한 것도 그렇고, 프로듀서 쇼(매년 캐릭터 애니메이션과 학생들이 제출하는 1분 전후의 애니메이션 필름 중 교수들이 선정한 작품을 외부 극장에서 하루 동안 상영하는 행사)에 선정된 것도 그렇고, 게다가 3년 만에 조기 졸업했어요. 천재 아닌가요?(웃음)

"아, 무슨 말씀을... 칼아츠는 정말 천재투성이입니다. 특히 유럽 애들은 정말 잘해요. 게다가 워너 브라더스나 디즈니를 거치면서 수없이 많은 천재를 만났어요. 그 사람들의 실력을 본 이상 제가 스스로 천재라고는 절대 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저는 진짜 그냥 보통이에요.


다만 저에게 있는 재능이라면 그들보다 더 많이 그리고서도 또 그릴 수 있다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게 고통이나 힘겹게 억지로 그리는 게 아니라 즐거워요. 프로듀서 쇼를 준비하기 위해서 엎고 새로 그린 것들, 중간에 버린 것들을 포함하면 2500장 정도의 그림을 그렸어요. 단 1분짜리 애니메이션을 만들기 위해서요.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기 위해서 2명의 주인공이 동시에 각자 다른 움직임을 보여주는 방식의 애니메이션을 제작했거든요. 그래서 남들보다 훨씬 많은 그림이 필요했죠. 


그것뿐 아니라 다른 과제들, 개인 드로잉용으로 그린 그림이 또 일 년에 1200점이 넘었어요. 왜 소설가의 재능은 '될 때까지 쓰는 거'라고 하잖아요. 저도 그런 것 같아요. 그리고, 그리고, 또 그렸어요. 그게 저의 재능이라면 재능이 아닐까 싶어요."



- 요즘 확실히 애니메이터, 캐릭터 아티스트를 꿈꾸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그들에게 칼아츠는 굉장한 워너비 학교임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요즘 한국 학생들도 많아 졌다고 들었어요. 먼저 졸업한 선배로서 칼아츠 입학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조언 해준다면?

"저의 삶에서 운이 좋았다고 생각하는 지점들이 몇 개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한국에서 미술을 배우지 않았던 것이라고 할 수 있어요. 정확히 말하면 한국의 '입시 미술'을 배우지 않았던 거죠. 한국의 입시 미술은 너무 획일적이에요. 물론 기본기나 테크닉을 배우는 데는 한국만 한 곳이 없어요. 그런데 칼아츠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테크닉이 아니라 자기만의 확실한 색깔, 개성이거든요. 어느 정도 기술은 보지만 창의성이 없으면 칼아츠는 못 가요. 오히려 기술이 좀 부족해도 개성이 있으면 합격할 가능성이 있죠.


책에도 소개한 저의 베스트프렌드를 칼아츠에서 만났어요. 근데 그 친구가 칼아츠를 수석으로 입학했다고 해서 나중에 뭘 제출했냐고 물어보니까 어렸을 때부터 그렸던 스케치북 중에서 한 10권 정도 제출한 게 전부래요. 처음엔 뭐지? 이랬는데 나중에 친해지고 나니 알겠더라고요. 그 친구는 일상의 모든 것이 다 아트예요. 이 친구는 누가 봐도 예술 하려고 태어난 애라고 해야 할까요. 머릿속에 우주가 있어요. 그런 사람을 뽑아요, 칼아츠는."


모든 것이 불안하고, 불투명했지만 이제 와 돌아보면 즐거운 시절이었다. 아무런 대가 없이 순수한 마음으로 좋아하는 그림을 온종일 그릴 수 있다는 오직 그 사실 하나만으로 말이다. 당시 나는 얼마나 많은 그림을 그렸을까? 모르긴 몰라도 칼아츠에 도달할 정도는 되었나 보다. 7개월 뒤 나는 다섯 개의 검은 별을 넘어 칼아츠 캐릭터 애니메이션과에 합격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막막하기만 했던 사막에서의 여정이 드디어 끝이났다. - <오늘도 나는 디즈니로 출근합니다> 중에서 


- 졸업하고 워너 브라더스에 입사했습니다. 아까 잠깐 언급하기도 했지만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세요. 어떤 곳이었나요? 워너 브라더스는.

"고마운 곳이죠. 미국에서 취업하려면 영주권 취득이 필수에요. 그게 결혼이 아니라면 회사에서 얻는 수밖에 없는데 그게 정말 쉽지 않습니다. 저는 당시 주니어 아티스트였음에도 영주권을 취득할 수 있도록 해줬는데, 업계에서 전무후무한 일이었어요. 사실 워너 브라더스도 다니면서 이런저런 문제들이 많았지만 그것만으로도 정말 감사한 곳이라고 할 수 있죠.  본격적으로 캐릭터 아티스트로서의 길을 걸을 수 있었던 것도 그랬고."


- 9.11테러 때문에 영주권 취득을 못할 뻔했다고 책에서 읽었어요.

"맞아요. 정말 나비효과라고 해야 하나... 그런 시건이 일어난 것도 비극적이지만 그것 때문에 영주권 심사가 거의 다 된 상황에서 처음부터 다시 검토한다고 했을 때는 정말 절망적이었죠. 진짜 어떤 심정이었는지 말로는 다 못 합니다."


- 그런데 왜 워너 브라더스를 그만두셨나요?

"앞서 제가 지금 하는 일을 좋아하는 이유 중에 하나가 캐릭터를 가지고 재미있게 놀 수 있기 때문이라는 말을 했잖아요. 그만큼 재미라는 건 저희 일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요소입니다. 캐릭터 아티스트들이 캐릭터를 가지고 논다고 표현하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요. 디즈니의 캐릭터를 가지고 노는 게 재미있는 이유는 종류도 많고, 포즈도 다양하고, 할 수 있게 너무 많아요. 그러니까 질릴 틈이 없어요.


그런데 워너는 잘나가는 몇몇 캐릭터만 반복적으로 그려야 했거든요. 그러니까 나중엔 싫증이 나더라고요. 게다가 이렇게 계속 같은 캐릭터만 그리면 캐릭터 아티스트로서도 더 이상 성장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개인적으로 회사를 선택할 때 재미와 성장 이 두 가지가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보거든요. 처음의 워너는 저에게 재미와 성장을 다 줄 수 있는 회사였지만 나중엔 아니게 된 거죠."


             

▲  베이비 벅스버니와, 실베스터, 대피 덕 - 워너 다닐때 연습한 캐릭터



사람의 길은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길을 닦아주고, 이정표를 만들어주고, 동행해주는 사람들이 있어야 길이 만들어지고 비로소 걸을 수 있다. 처음엔 내가 처한 상황 때문에 캐릭터 아티스트가 될 수밖에 없었지만, 나중에는 진심으로 이 일을 사랑하게 되었고 나의 의지로 이 길을 걷기로 했다. 나에게 캐릭터 아티스트라는 길을 만들어 준 건 결국 나의 선배들인 셈이다. - <오늘도 나는 디즈니로 출근합니다> 중에서 


- 앞으로의 꿈을 여쭤보고 싶습니다. 언뜻 다 이룬 것 같기도 한데요(웃음).

"지금 제가 디즈니에 다니고 있긴 하지만 사실 언제까지 다닐 수 있을지는 모르죠. 디즈니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직장이지만, 언젠가 디즈니를 떠나게 되더라도 웃으면서 고마운 마음으로 나올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럴 수 있을 것 같아요. 말했듯이 제가 사랑하는 건 그림 그 자체지 디즈니는 아니니까요.


그런 점에서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김미란이라는 제 이름을 건 작가이자 아티스트로 사는 것, 오롯이 그림으로 나를 보여주는 것이 제 남은 꿈이에요. 그걸 위해서 몇 년 전부터 저만의 세계를 담은 작업을 계속 시도하는 중이에요. 내용적으로도 그렇고, 스타일적으로도 그렇고. 그런 날이 오면 언젠가 저의 공간에 들러주시면 좋겠습니다."



-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우선 책이 나와서 쑥스럽고 기뻐요. 살면서 수많은 천재들에게 배우고, 함께 일해왔는데, 나처럼 평범한 사람이 책을? 뭐 이런 생각도 들지만 이왕 쓴 책이니까 많이 읽어 주셨으면 좋겠어요. 내년 봄에 한국에 한 번 들어갈 예정인데 그때 이런저런 행사들을 계획 중이니 만날 수 있길 바랍니다. 그때까지 저는 제 자리에서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그림을 그리면서 살 테니 여러분들도 각자의 자리에서 즐겁고 기쁘게 지내길 바랍니다. 몸도 마음도 춥지 않았으면 하고요."


 

 '디즈니 애니메이터'는 디즈니의 애니메이션밖에 못하고, '디즈니 캐릭터 아티스트'는 디즈니의 캐릭터 아트밖에 못한다.  언젠가는 나를 소개할 때 자의든 타의든 '디즈니'도, '캐릭터'도 떼어질 날이 올 것이다. 그때쯤이면 아티스트 김미란의 작품 세계도 어느 정도 완성되어 있지 않을까? - <오늘도 나는 디즈니로 출근합니다 >중에서 


인터뷰를 마치고, 생각했다. 김미란은 천생 아티스트구나. 그는 아티스트로 태어나지 않았으나, 아티스트로 죽을 것이다. 디즈니라는 회사를 벗어나서도 그럴 것이다. 나는 그가 정말로 언젠가 디즈니를 나왔으면 좋겠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긴 시간 동안 자신이 구축해 온 세계를 펼쳐 보였으면 좋겠다. 그날을 기쁘게 기다릴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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