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초 익산은 봄비로 그득했다. Bee Gees(비지스)의 ‘Holiday'가 어울릴 듯한 봄 그리고 빗방울들. 봄비를 맞으며 영화 <홀리데이>의 주 촬영장인 교도소세트장을 찾았다. 봄비가 높은 교도소세트장의 벽면을 물들이고, 어디선가 “유전무죄 무전유죄(有錢無罪 無錢有罪)”를 외치던 ’지강헌‘ 역의 이성재의 목소리가 들릴 듯하다.
정지된 시간과의 낯선 조우
차가운 콘크리트와 빛 한 점 새어 들어오지 못하는 창살, 그리고 원죄를 깨끗이 씻고 있는 갇힌 영혼들. 익산시 성당면에 위치한 교도소세트장의 선을 넘어 들어오면 모든 것들은 암울하다. 하지만, 교도소세트장의 암울한 이미지들은 익산시를 널리 알리는 역할을 한다면 아이러니일까?
최근에는 드라마 <아이리스>와 <수상한 삼형제>의 촬영지였고, 영화 <홀리데이>, <거룩한 계보>, <타짜> 등 많은 작품들이 촬영되면서 전주와 함께 익산이 영화의 메카로 급부상하는데 커다란 역할을 하고 있다.
교도소세트장의 육장한 철문을 열고 들어가면 일순 정지된 시간과 낯선 조우를 하게 된다. 봄비에 젖은 몸도 한기를 느끼게 하겠지만, 날카로운 창살과 벽과 벽의 차가운 기운이 더욱더 낯선 이질감을 불러일으켜 매서운 한기를 느끼게 한다. 정지된 시간처럼 갇힌 채 하루하루 반복되는 사람들이 작은 창살에 기댄 채, 갱생이란 단어와 함께 원죄를 묻는 교도소. 교도소세트장의 풍경은 봄과는 거리가 먼 한겨울이다.
빗물에 젖은 구두의 발자국이 찍혔다가 마르는 동안, 발걸음 소리는 교도소 내부를 울린다. 가지고 간 작은 카메라 셔터를 누를 때마다 한 장, 한 장이 그림이 되어 박히고, 백열전구의 조명 뒤로 어둠이 깔려 빛과 음의 불편한 조화가 교도소라는 공간을 더욱 실감나게 한다. 정준호, 이성재, 최민수, 김혜수 등 당대 최고의 스타들의 어두운 죄수복이 작은 창살 틈으로 보일 듯하고 그들의 목소리가 삐걱대는 문틈으로 들릴 듯하다.
‘변하지 않는 것은 죽은 것이다’
곳곳에 걸린 푯말들은 날이 선 면도칼과 같다. ‘이동 중 잡담금지’, ‘보행 시 일렬로’, ‘질서 확립’, ‘변하지 않는 것은 죽은 것이다’ 등. 행동의 제약과 꽉 틀어 막힌 채 답답함을 주는 구호들. 반듯반듯한 철문들과 어둔 페인트칠이 낯선 설레임보다 범죄에 대한 두려움과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고, 때론 카메라 프레임 속에 갇힌 듯한 착각을 주는 익산 교도소세트장.
익산 교도소세트장은 폐교된 옛 초등학교를 리모델링하여 지은 곳이다. 학교의 흔적은 운동장과 본관 건물에서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지만, 리모델링된 교도소세트장은 속칭 ‘학교’로 불리는 교도소이니 학교와 교도소세트장은 자연스러운 변화라고도 할 수 있다.
사실 교도소세트장은 일반인들에게 볼거리와 영화 산업의 밑거름 역할도 하지만, 지역경제에도 효자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아이디어 하나로 변화된 폐교가 일일대여료 200~300만원의 영화 세트장으로, 그것도 전국 유일무이한 교도소세트장이라면 그 가치는 무궁무진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 곳 교도소세트장은 언제나 쉽게 찾을 수 있는 곳은 아니다. 영화촬영지인 만큼 부대시설이나 관리상태가 최적으로 유지되어야 하는 만큼 내가 원하는 시간 또는 보고 싶을 때 찾는다고 해서 문을 열어주는 곳은 아니다. 자칫 계획 없이 방문 했다가 촬영 중이거나 휴무인 경우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으므로 익산시청 문화관광과에 문의를 한 뒤 방문하는 것이 좋다.
구경을 마치고 부슬대는 봄비를 맞으며 교도소 문을 열고 나선다. 서둘러 달려오는 봄기운이 철문을 경계로 환하다. 두부처럼 피어오른 목련이 곧 꽃을 피울 기세다. 문득 생두부를 든 노모가 어디선가 반길 듯한 봄, 봄이다.
황등, 장터에서 길을 잃다
봄비의 한기를 업고 ‘익산’이 아닌 ‘이리’를 회상한다. 익산역 앞, 번화했던 중앙동의 많은 사람들, 한여름 이리역 광장에서 더위를 피해 런닝구 바람에 나와 돗자리를 폈던 이들, I-ri Station 이라고 파란글씨로 역사 지붕에 걸려있던 이리역 간판.
그리고, 몇 해 전 30주년을 맞은 이리역 폭파사고.
회상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즈음, 이리역, 아니 익산역으로 향하던 차가 시골길에서 잠시 길이 막힌다. 대리석과 돌공예로 유명한 황등. 황등 오일장이 한적한 시골길을 분주하게 만들고 있었다. 익산역은 잠시 접고 장구경과 함께 요기를 할 요량으로 서둘러 주차를 한다.
잠시 비가 그친 사이, 시골장의 촌스러움에 매료되어 여기저기를 기웃거린다. 장닭이며, 갓 젖을 뗀 어린 누렁이, 고구마며 각종 봄나물들이 봄비를 머금은 채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있었다. 흥정의 소리가 흥겹고 사투리가 정겨운 촌동네 황등의 오일장 풍경.
한기와 함께 허기가 자꾸 길을 재촉한다. 황등의 맛은 시골스럽지만 손맛으로 정평이 나 있다. 시장비빔밥, 순대국밥, 선지국밥 그리고 육회비빔밥들.
오일장의 분주함 속에서 추위와 허기를 달랠 메뉴가 자꾸 정해지지 않고 있었다. 이것이 먹고 싶으면 저것이 아쉽고, 저것을 먹자니 그것 또한 안 먹을 수 없고, 이것, 저것, 그것 모두 각각의 맛을 지닌 채 발길을 우왕좌왕하게 했다.
황등의 맛은 길을 잃게 할지도 모른다.
과거, 현재, 미래가 버무려진 영화 ‘이리’
1977년 11월 11일 오후 9시 15분. 귀청을 찢는 굉음은 아주 작은 소도시 ‘이리’에겐 씻을 수 없는 상처가 되었다. 이리역 폭발사고.
화약 호송원의 아주 작은 실수로 벌어진 이 사건은 이리역에 거대한 구멍을 뚫었고, 역 앞 모든 건물들을 순식간에 무너뜨렸다. 수많은 부상자와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던 소도시 ‘이리’는 한 달여 동안 신문과 방송 1면을 차지하게 되면서 모든 국민들의 뇌리에 각인이 되었다.
그로부터 30년 뒤. ‘이리’는 익산으로 개명이 되었고, 30여 년 전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다.
영화 <이리>의 메가폰을 잡은 재중교포 ‘장률’ 감독은 30여 년 전의 ‘이리’와 현재의 ‘익산’ 그리고 미래의 ‘익산’을 무덤덤하게 영상에 담았고 보는 이로 하여금 불편함을 느끼게 제작하였다. 그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장률 감독은 익산시에서 이제는 아무도 살지 않는 모현아파트를 보고선 영화 속 주된 배경으로 낙점을 했다고 한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공존하는 공간 모현아파트. 5층의 주공의 마크 위로 날선 금이 가 있고, 켜켜이 낡은 시멘트와 페인트칠이 벗겨지고, 현대식 아파트에 비하면 병들고 늙은 노파 같은 모현아파트. 이렇듯 장률 감독은 작은 소도시 ‘이리’의 아픈 기억을 모현아파트에서 봤을지 모른다. 과거의 아픔을 가진 채 늙어가고, 또 모든 이의 뇌리 속에서 서서히 지워지는 기억처럼 늙고 병든 현재의 모현아파트. 또한, 재개발이 되어져 새롭게 탄생할 미래의 아파트 속에서 과거의 ‘이리’와 현재의 ‘익산’ 그리고 미래의 ‘익산’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일 수도 있다.
봄비에 젖은 모현아파트는 차단막이 쳐지고 재건축이 될 준비로 분주했다. 영화 속, 주된 풍경이었던 모현아파트 경로당과 모현아파트 다리만이 쓸쓸하게 영화 속 풍경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었다.
익산 역사의 한 페이지를 담당했던 1단지 주공아파트인 모현아파트. 폭발사고 이후 지어져 익산시의 발전에 기여를 했고, 많은 이들의 삶과 눈물과 웃음이 녹아있던 아파트가 곧 허물어진다.
2015년 현재 모현아파트는 재개발되었다.
그 자리에 e편한세상이 들어섰다.
익산, 희망을 찍다
교도소세트장을 돌고, 익산 황등 오일장에서 허기로 길을 잃고, 허물어져 가는 모현아파트를 보고 집으로 돌아가는 저녁. 영화 속 감추어진 익산은 <홀리데이>, <아이리스>, <수상한 삼형제>등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 속에서 교도소세트장의 특별함도 있지만, 우리 주변에 흔한 풍경들이 많았다. 무심결에 차 속에서 지나쳤던, 영화 <이리>의 배경 모현아파트와 모현아파트 다리, 엄정화 주연의 <호로비츠를 위하여>의 신동아파트, 원빈과 김혜자 주연의 <마더> 속 북부시장 등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 숨겨진 익산은 한국 영화 필름 속에서 묵묵히 빛을 발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