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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월 Jul 25. 2022

쉽게 미워하지 않고 어렵게 사랑하는 법

박서련 장편소설 '마법소녀 은퇴합니다' 리뷰

당신은 마법소녀가 될 운명이예요
가능한 한 폐 안 끼치고 죽는 방법 없을까? (8쪽)


소설의 첫 문장은 '마법소녀'라는 제목의 이미지와는 조금 다르게, 현실적으로 음울하다. 주인공 '나'는 스스로를 '무능의 결정체'로 생각하는 인물이다. 그는 직장에서 해고당한 뒤 신용카드 리볼빙 빚 300만원을 갚지 못해 자살하려고 한다. 한도인 500만원까지 기다리다가 죽으나 지금 죽으나 인생이 끝나는 건 시간문제니까, 그걸 기다리고 죽느니 얼른 죽어버리겠다는 결심이다. 그리고 300만원을 갚지 못해 자살하려고 한다는 그 사실조차 스스로 한심하고 부끄럽게 여겨서 아무도 모르게 죽기를 바란다. 하지만 마포대교 난간에 앉아 망설이며, 지나가는 취객이 오지랖을 부려서 '왜 혼자 여기 울며 앉아있는지' 묻고 관심을 보여주기를 내심 바라기도 한다. 그러니까 '내 발로 여기까지 왔지만 누구에게 떠밀려 온 것 같다'는 독백처럼, '나'는 죽고싶다기보다는 삶을 지탱할 자신이 없는 상태다.


'나'가 게으르게 살아서 가난해진 건 아니다. '나'는 '열심히 살았'고 '정말 사치하지 않았'으며, '최대한 낭비 없이 노력해왔'지만 '그냥 살기만 했는데 빚이 늘어났'다고 독백한다. 소설에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가 반영되어, '나'는 팬데믹으로 인해 일자리를 잃은 상황이다. 그러나 '나'는 팬데믹으로 일자리를 잃지 않았어도 자신은 점차 가난해졌을 거라고, '오랜 시간에 걸쳐 티 안나게 조금씩 가난해'졌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혹여 그런 '나'에게 죽을 생각 하지 말고 당장 아르바이트라도 해서 착실하게 빚을 갚아보라고 훈계하는 건 딱히 의미가 없다. 누구에게나 빚 300만원이 아득해서 죽고 싶을 만큼 약해진 상태가 찾아올 수 있으니까. 이 주인공이 특별히 게으르고 나약한 사람이라서 마포대교 난간에 선 게 아니라는 뜻이다.


곧 동이 틀 것 같아 이제는 정말로 삶을 '해치워야' 한다고 생각하는 '나'에게, 머리부터 발끝까지 천사처럼 새하얗게 옷을 입은 사람이 다가온다. 그리고 "당신은 마법소녀가 될 운명이에요"라고 말한다. 운명, 그것도 '마법소녀가 될 운명'이라니 낭만적인 이야기다. 어릴 때 '해리포터' 시리즈를 보고 호그와트의 입학 통지서를 기다렸다는 이야기들처럼, 마법소녀가 나오는 애니메이션 시리즈를 보고 자란 아이들은 한번쯤 마법소녀가 되기를 꿈꿨을 법하다. 아마 박서련 작가도 그 중 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는 작가 노트에 '진짜로 완전히 평범한 지구인으로 태어'나 '삼십대가 되기까지 전생에 마법세계의 공주였다는 증거도 전혀 발견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가끔은 마법이나 기적을 간절히 필요로 한다'고 썼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마법소녀의 꿈을 키웠지만 스스로에게서 어떤 마법적 단서도 찾지 못한 채로 어른이 되어버린, 그럼에도 마법과 기적이 필요한 이들을 위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예언의 마법소녀인 아로아는 자신의 '아로아미러'에 주인공 '나'가 나타났다며, 당신이 내가 찾던 '시간의 마법소녀'라고 말한다. 그 말은 삶에게 떠밀려 죽음의 앞까지 갔던 '나'에게 새롭게 나타난 또다른 삶의 가능성, 희망이었다. 동시에 한편으로는 마포대교 난간에 서서 남몰래 바랐던 타인의 관심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에게 아로아는 새로운 삶의 길을 열어준 매개이자 그 희망 자체이기도 하다. '나'는 행운의 상징이라고 남몰래 보관해두었던 은행의 777번 번호표 자리에, 반짝이는 아로아의 명함을 붙인다.


쉽게 미워하지 않고 어렵게 사랑하는 길


박서련 작가가 만든 세계는 '마법소녀'라는 설정 외에는 현실과 다를 바 없는 세계고, 마법소녀도 신비한 존재보다는 일종의 직업인으로 다루어진다. 그들은 '활동 과정에서 일어난 기물 파손의 책임 소재' 라든가 '보험사의 가입 거절 문제' 같은 걸 고민하며, 협회를 만들어 활동하고, 괴수나 악당이 아니라 테러범이나 불의의 사고 같은 것들을 상대한다. 그리고 지독할 만큼 현실적이게도, 이 세계에서 최종 빌런은 '대마왕'이나 '외계인', 혹은 '큰 전쟁' 같은 게 아니라 '기후 재난'이다. 아로아가 속한 '전국 마법소녀 협동조합(이하 '전마협')'은 기후 재난으로 인한 세계 멸망을 막기 위해 시간의 마법소녀를 찾는다. 그 과정에서 '나'를 찾았지만, 진짜 시간의 마법소녀인 '이미래'가 각성하면서 잘못 짚었다는 게 밝혀진다.


작중 아로아의 추측으로 언급되는 마법소녀의 등장 이유는, '세계의 의지가 힘의 균형을 이루려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한순간 가장 무력해진 존재에게 우주가 균형을 이루기 위해' 힘을 부여한다. 그래서 마법소녀들은 가장 약하고 간절할 때 각성하여 가장 필요한 힘을 얻는다. 힘이 소녀들에게만 찾아오는 것도 그런 이유다. '시간의 마법소녀'인 '이미래'는 가정 폭력을 당하고 있던 순간에 힘을 얻어 세계에서 가장 강한 마법소녀로 각성한다.

저는 지구에 인류의 존재가 불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최초에는 저의 사적인 고통에서 시작된 생각입니다. 하지만, 보다 큰 차원에서도 저의 의견이 옳다고 믿습니다. 인간의 역사는 투쟁의 역사입니다. 지구인은 서로에게 해를 끼치고 이 행성에도 해를 끼칩니다. 저는 저와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 이 힘이 주어진 데에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이 힘을 사용하여 보다 빠른 인류멸망을 이루고자 합니다. 인류가 지금이라도 그간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마지막을 준비하기를 바라며 알립니다. (...) 지금부터 기후 재난의 도래가 가속됩니다. (135-136쪽)


사상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시간의 마법소녀 이미래는 기후 재난을 막도록 도와달라는 전마협의 제안에 되려 기후 재난을 가속화해 세계를 멸망시키기로 작정한다. 인류는 서로에게 해를 끼치고, 지구에도 해를 끼치므로 그 존재가 불필요하다는 게 이미래의 신념이다. 팟캐스트 '책읽아웃'에서 진행자인 황정은 작가는 "인류를 멸절시키려는 이미래와의 결투는 '염세와의 싸움' 같기도 하다"는 점을 짚어낸다. 이에 박서련 작가는 "문제를 직면하고 보면 염세에 빠지지 않기가 어렵다"며 "누구나 염세의 시기를 지날 수밖에 없"다고 대답했다. 그러니까 "쉽게 미워하지 않고 어렵게 사랑하는 길로 가는 것이 성장"이라는 것이다. 염세에 빠지기는 너무 쉽고, 그걸 이겨내고 사랑하기는 너무 어렵다. 이미래는 그만큼 성장하지 못했는데 힘을 얻어버린 인물이다. '세상은 썩었고 인류가 멸망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에게 그걸 실현할 만한 힘이 생겨버린 것이다.


국민 여러분, 시간의 마법소녀를 저지한 이후의 세계에 대한 상상력을 요구합니다. 최선을 다해 시간의 마법소녀를 '설득'하는 것은 저희의 몫입니다만, 성패를 떠나 국민 여러분께서 이 사태를 최후의 경고로 받아들여주시지 않는다면 아무런 의미도 없을 것입니다. (144-145쪽)


전마협 의장인 '제작의 마법소녀' 연리지를 통해 발화된 이 대사는 언뜻 작가의 목소리가 드러나는 것 같기도 한 경고의 메시지다. 마법소녀들은 기후재난을 해결할 수 없다. 이미래는 기후 재난의 근본적인 원인이 아니므로, 그를 막는다고 해서 기후 변화의 형태로 오는 예견된 종말이 취소되지는 않는다. 종말을 막기 위해서는 소수의 히어로가 전투를 통해 빌런을 물리치는 것이 아니라, 다수의 시민들이 육식을 줄이고, 일회용품 사용을 줄이고, 새 물건 소비를 줄여야 한다. 세상을 구하는 건 그런 재미없고 귀찮은 실천이다.


세상을 구하다가 편의점 아르바이트 출근을 놓친 주인공에게 아로아가 말한다. "흔한 얘기인걸요, 세계를 구하고 본인은 망하는 거." 세계를 구하고 개인이 망하지 않기 위해서는 힘과 책임이 분배되어야 한다. 소설 속에서 시간의 마법소녀가 힘을 잃자, 그 대신 더 많은 사람들이 마력을 갖게 된다. 이에 아로아는 '약간의 마력을 지닌 선량한 다수의 힘을 모아 기후 재난에 맞설 수도 있을 것 같'다고 말한다. 이미래나 그를 막기 위해 애쓰던 마법소녀들처럼 '능력을 가진 소수'에 의해 세계의 멸망이 좌지우지되는 것이 아니라, 큰 힘은 아니지만 조금씩의 힘을 가진 '선량한 다수'의 힘을 모아서 종말에 맞서는 것. 그것이 너무 허황되지도, 그렇다고 냉소적이지도 않은, 이 세계가 찾은 최적의 해피엔딩이다.


시간의 마법소녀를 저지한 뒤 '나'는 제목처럼 은퇴를 선언한다. 빚을 갚기 위해 하루하루 PC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가끔 라면을 빨리 끓이는 데에 몰래 힘을 사용하기도 한다. 그리고 오랫동안 마음 한 구석에 품고 있던 시계 디자이너의 꿈을 구체적으로 소망하기 시작한다. 쉽게 세상을 버리지 않고 어렵게 살아가는 길을 택하며, 이야기는 마무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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