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 벗고 봐야 하는 어린 시절의 친구
짱구는 못말려 극장판: 폭풍수면! 꿈꾸는 세계 대돌격 (2016)
초등학생 때는 투니버스에서 짱구를 방영해줄 때가 제일 좋았다. 가끔 좀 이상해 보이고 거부감이 드는 장면도 있었지만, 그리고 사실 그렇게 웃기거나 재미있지도 않았던 것 같지만, 그냥 짱구는 내 친구였다. 마치 십 대 중후반부터의 내가 외롭거나 심심하거나 밥친구가 필요할 때면 미드 '프렌즈'를 틀어놓았던 것처럼, 어린 나는 짱구를 틀었다. 조금 커서는 짱구가 싫었다. 이 애니메이션을 내가 즐겨보며 자랐다는 게 싫었고, 내 또래 사람들이 함께 즐겨보며 자랐다는 게 싫었고, 열 살 가까이 어린 내 동생도 그걸 즐겨보며 자라고 있는 게 싫었다. 일일이 지적하자면 진이 다 빠질 만큼 작품 자체에 깊게 뿌리내려 핵심 개그 코드로 작동하는 여성 혐오와 성희롱, 견고한 가부장제와 "정상가족" 이데올로기, 여성이나 성소수자에 대한 희화화와 스테레오타이핑이 불쾌했다. 아동을 대상으로 하는 애니메이션이 이렇게 혐오와 편견을 조장해도 되는 건가 하는 문제의식도 컸다.
인권의식이 성장했다는 건 긍정적인 변화겠지만, 한때 좋아했던 무언가를 커서 보니 싫어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이 씁쓸한 일이다. 짱구가 싫다고 하면서도 넷플릭스에 올라온 극장판을 클릭하게 된 건 그런 미련에서였을 테다. 사실 나는 이런 글을 쓰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우리 짱구가 달라졌어요, 시대에 맞추어 성장하고 있어요- 같은 글을. 그리고 더 이상 즐겁게 볼 수 없게 된 어린 시절의 친구와 다시 친해지고 싶었던 것 같다. 유년을 함께했던 그 세계를 다시 좋아하고 싶었다. 감동적이고 사랑스러운 장면을 보면 마음껏 추억에 잠기고, 예전만큼은 아니겠지만 종종 짱구의 가족과 친구들이 어떻게 사는지 최신 작품을 보고도 싶었다. 하지만 슬프게도 다섯 살 짱구는 2016년작에서도 여전히 비키니 수영복을 입은 "예쁜 누나들" 수십 명과 엉덩이를 튕기며 노는 꿈을 꾸고 신형만 씨는 룸싸롱(것으로 추정되는) 명함들을 던진다. 아무리 그게 짱구의 정체성이래도 이제는 돌아보고 다듬을 때가 되지 않았나, 아쉬웠다. 불편함이 윤리의식에서 기인했다면 아쉬움은 남은 애정과 미련에서 기인했다.
미련 가득한 아쉬움을 접어두고, <짱구는 못말려 극장판: 폭풍수면! 꿈꾸는 세계 대돌격>(이하 '꿈꾸는 세계')은 몇몇 리뷰에서 이야기하듯 디즈니 <인사이드 아웃>의 짱구 버전이라고 생각해볼 수도 있겠다. '꿈꾸는 세계'는 제목처럼 ‘꿈’을 소재로, 트라우마를 직면하는 과정과 친구들 사이의 우정, 가족들의 사랑까지 알차게 다뤄낸다. 다섯살 친구들이 "떡잎마을 방위대 파이어!"(나는 방범대가 더 익숙하다)를 외치는 장면, 짱구네 가족이 "잘 자요 파이어!"를 외치는 장면, 짱구와 친구들을 히어로처럼 구해주는 거대 짱아와 롱다리 흰둥이 등은 저항 없이 사랑스럽다. 아이들의 꿈을 몽글몽글하고 다채로운 색감으로 표현한 장면들은 시각적인 즐거움도 준다. 다만 보라의 악몽 장면은 성인인 나도 흠칫했는데 아이들이 보면 울거나 덩달아 악몽을 꾸지 않을지 걱정됐다.
인기가 많은 여성 캐릭터가 등장하면 늘 질투하던 역할을 떠맡던 유리가 이번에는 제일 먼저 보라와 친구가 된다. 친구가 되자고 다가오는 유리에게 보라는 '무슨 일이 있어도 날 싫어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라고 한다. 유리는 보라에게 실망하고 화를 내기도 했지만, 사과를 요구하고 화해를 청하는 모습에서 약속을 지켰다는 것이 드러난다. 혼자 남겨진 보라에게 혼자 찾아가 악몽을 꾸지 않도록 도와주겠다고 큰소리치고, 마지막엔 직접 맥이 되어 보라의 악몽을 먹는 짱구의 모습은 역시 주인공답다. 방어적으로 스스로를 고립시키던 보라는 결국 마음을 열고 떡잎마을 방위대원이 되어 울음을 터뜨리게 된다. 친구들이 각자의 특기로 보라의 악몽을 없애기 위해 분투하는 장면은 뭉클하다.
마지막에 보라를 안아주는 건 의외로 짱구의 엄마인 봉미선 씨다. 어른이 아이를 위로하는 모습이 좋았다. 어른이라면 응당 아이에게 잘해주어야 하니까. 친구들의 우정이 보라를 더 이상 외롭지 않게 해 주었다면, 아들의 꿈을 통해 보라를 찾아온 미선 씨의 포옹으로 보라는 죄책감을 내려놓을 수 있게 됐다. '무슨 일이 있어도 싫어하지 않는' 우정, 그리고 무슨 일이 있어도 싫어하지 않는 사랑은 아동 영화에서 아무리 말해져도 과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꿈꾸는 세계'는 그 이야기를 제법 성실하게 해낸다. 그 우정과 사랑이 있어서, 보라는 '넌 세상에서 제일 나쁜 애'라고 말하는 어린 자신에게 사라지지 말고 내 안에 계속 살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짱구는 못말려'는 마냥 좋아하기에는 여전히 걸리는 부분이 많은 애니메이션 시리즈이지만, 그 속에서 이야기하는 우정과 사랑은 아직 유효하다. 약간은 흐린 눈으로 봐야 하는 어린 시절의 친구가, 시간의 흐름에 발맞춰 점차 성장할 수 있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