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울: 그러지 않아도 돼

by 문창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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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듣고 싶었다. 사람들의 표상으로 구축된 이 좁디좁은 세상에선, 수많은 ‘해야 해!’란 외침이 귓가를 떠나질 않는다. 성취와 욕망의 오랜 헤게모니는 앞으로도 쉽사리 힘을 잃을 기미가 보이지 않고, 우리는 그저 가만히 있는 것을 죄악시하는 시선에 길든 지 오래다. 삶은 늘 목적을 향해 달려나가는 질주가 되고, 그 앞에서 비(非)목적적인 수많은 순간들은 바래고 지워진다. 이것은 목적이 없거나 그것을 이루지 못한 내 삶을 ‘무의미’란 프레임 안에 욱여넣는 타인들의 폭력으로 이어지고, 어느새 나 스스로가 나에게 행하는 자학에까지 도달한다.


「소울」은 이런 세상을 살아가는 이들의 영혼을 달래주기 위해 나온 작품임이 틀림없다. 사실, 이전의 다른 픽사 영화들에 비하면 「소울」이 보여주는 상상력과 비주얼은 놀라울 정도로 놀랍지가 않다. 죽은 영혼들이 빛을 향해 나아가는 우주, 태어나기 전 영혼들의 세상, 영혼들의 성격을 심드렁하게 정해주는 데에서 보이는, 신적 존재들의 무심함까지. 영혼들의 귀여운 생김새를 제외하곤, 이 영화는 이미 많은 이들이 상상하고 사유해봤던 것들을 그저 차용하고 있다. 심지어 스토리의 전개마저도, 위기나 긴장감을 거의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시종일관 안전하다.


다른 픽사의 영화들이 주로 기발한 상상력이나 아이디어에서부터 창조된 것에 반해, 이 작품은 메시지로부터 창조된 것으로 보인다. 즉, 메시지가 우선이며, 메시지를 주기 위해 만들어진 영화다. 이미 주고자 하는 메시지부터 정해놓고 그것을 향해 성실하게 달려가고 있기에, 그 중간중간에 빚어내는 에피소드들의 번뜩이는 인상과 재미는 다소 부족하다. 영혼 ‘22’의 변심으로 인해 ‘조 가드너’가 자신의 육체를 찾지 못하게 될 뻔한 순간이 이 영화의 서사에서 가장 큰 위기적 순간이었음에도, 이마저도 ‘테리’라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에 의해 순식간에 종결된다. 위기를 허무할 만큼 빠르게 매듭짓고 ‘22’의 지구 통행증을 비추는 부분에서, 이 영화가 메시지의 영화라는 점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결국 「소울」이 좋은 영화인가에 대한 여부는 더더욱 그 메시지가 무엇이냐에 따라 갈리게 되는데, 결과적으로 「소울」은 좋은 영화라 불리기에 충분하다. 거창한 목적 없이 살아가는 이들이 단순하다며 거들먹거리던 이들이야말로 오히려 ‘단순한 자들’이라 때려주는 후련한 영화이자, 빛나는 업적을 이룬 위인들을 그저 칭송하고 좇으려 하지 않는 용감한 영화다. ‘조 가드너’가 마침내 깨달음을 얻고 무아지경의 세계에 진입하는 과정에서 보여주는 ‘도시 – 지구 – 우주’의 단계적 부감숏은 목적을 향한 인간의 집착이 얼마나 덧없는지, 그리고 목적과 의미를 동일시하는 태도가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보여주는 효과적인 연출이다.


게다가 재즈 피아니스트가 되기 위해 열망하던 주인공의 영화가 관객들 앞에서 멋들어지게 연주하는 모습이 아닌(영화 「라라랜드」가 자연스레 떠오른다.), 집 밖으로 나서며 미소를 짓는 모습을 엔딩 씬으로 사용했다는 점은, 이 영화의 메시지를 가장 탁월하게 전달해주는 지점이자, 전체를 통틀어 가장 훌륭한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지점이다. 꿈을 이룬 재즈 연주자의 엔딩이 재즈 연주가 아니어도 된다는 건, 별 것 아닌 듯하면서도 참으로 뭉클하다.


일상을 모두 유의미한 순간들이라 선포하는 것은 가치의 전복이 아니라 귀환이며, 이 귀환은 늘 불 속에 있었으면서 작은 불티(Spark)를 쫓아다니던, 우리의 길 잃은 영혼의 귀환이기도 하다. 산전수전 다 겪어본 노인이 아등바등 살아가는 젊은이에게 말하듯, 불치병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난 이가 만사에 불평을 털어놓는 이에게 말하듯, 영화 「소울」이 관객에게 말하듯, 이젠 내가 나 스스로의 영혼에게 말을 건네봐도 괜찮을 성싶다. 그러지 않아도 돼, 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