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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승환 Jan 23. 2017

빛이 파괴된 세계의 잔존하는 빛

— 송승언 시의 이미지

   

   



1. 잔존하는 빛     


역사적 시공간과 글의 종류가 다른 세 편의 글. 그러나 관통하는 하나의 이미지.     


밤의 거대한 어둠이 혼자이고자 할 때 숲속에는 어둠을 꿰뚫어보고 있는 부엉이가 있고, 풀밭에는 섬광을 발하면서 자기 존재를 알리는 개똥벌레가 있고, 산길과 들길에는 길손을 안심시키는 등불이 있다. ― 김남주의 「서문을 대신하여」     


그는 비와 어둠에 이중으로 치여 정신없이 허둥대면서 생각했다. 장딴지를 지나 어느새 무릎께까지 차오른 물에 휘둘려 걸음을 떼어놓기가 매우 힘들었지만 어둠에 눈이 익으면서부터는 걷기가 한결 수월했다. 오른쪽으로 돌아 몬티 디 피에트랄라타 거리로 접어들자, 어둠 속에 발이 묶인 채 서 있는 버스들이 가물가물하게 눈에 들어왔고, 침수된 집들 창문에서 희미한 양초 불빛과 사람들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  

   

인간 존재가 우리의 경탄 어린 시선 아래 반딧불―빛나고, 춤추고, 떠돌고, 잡히지 않고, 저항하는 존재―가 되는 그런 예외의 순간들…중략… 반딧불의 살아있는 춤은 어둠의 한복판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또한 그것은 공동체를 만들려는 욕망의 춤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 조르주 디디-위베르만     


1985년 9월. 시인 김남주는 ‘남민전 사건’으로 투옥되어 있던 광주교도소에서 소설가 황석영에게 편지를 쓴다. 김남주는 자신이 감옥에서 번역한 하이네, 아라공, 브레히트, 네루다 등의 시선집 출간을 황석영에게 부탁한다. 종이와 연필조차 허락되지 않는 감옥에서 우유곽을 해체한 은박지에 못 끝으로 시를 눌러 쓰던 시절의 김남주였다. 그의 번역 시집 『아침저녁으로 읽기 위하여』는 투옥되기 전의 시점인 1979년 3월 20일로 기재된 「서문을 대신하여」를 머릿글로 삼아서 검열을 피하고 1988년 8월 출간된다.

그 서문에서 시인은 수배 생활 중에 도움을 주었던 사람들을 기억해낸다. 그는 ‘감시와 처벌’의 위험 속에서도 수배자에게 숙소와 지폐를 내어주었던 사람들의 “헌신적인 배려와 인간적인 애정”을 떠올리며 “반딧불과 등불들은 내가 허방을 딛을까 염려하며 길 안내를 해주었”다고 밝힌다. “남모르게 빛의 일을 하고 있는 부엉이와 개똥벌레와 등불과 별들의 도움을 받아가면서 나도 어둠을 조금이라도 물리치는데 도움이 되는 빛의 일을 해야겠다고 어느 날 생각하게 되었는데 나에게 있어서 그것은 마땅한 일로 시를 쓰는 일, 시를 번역하는 일”이었다고 출간 배경을 전한다. 김남주의 서문에서 암시되고 있는 ‘반딧불과 등불과 별’은 모두 남모르게 빛의 일을 하는 사람들의 이미지이다. 그들은 현실의 변혁 운동에 직접 참여하거나 선두에서 싸우지 않지만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보다 먼저 행동에 나선 수배자, 시인에게 연민과 애정의 손길을 내민 사람들(people)이다. 그들은 치열한 삶의 현장과 여전한 현실의 어둠 속에서도 지난한 삶을 지속시키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이름은 역사의 기록에 등재되어 있지 않지만 시인의 서문과 현실의 어둠 속에서 빛의 이미지로 남아있다.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의 소설 『폭력적인 삶』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1950년대 로마 변두리의 빈민촌 피에트랄라타의 가난과 기아와 폭력과 질병에 물든 삶을 사실적으로 형상화한다. 주인공 소년 톰마소 푸칠리(Tommaso Puzzili)는 친구들과 함께 절도, 폭력, 동성애, 성매매를 일삼는다. 톰마소는 파시즘에 대한 일시적인 동조와 감옥 생활, 결혼과 신분상승의 꿈과 실패, 폐결핵과 병원 생활, 간호사들의 파업과 환자들의 봉기를 경험하면서 자신이 속한 사람들의 계급에 대해 자각하는데, 그는 예전에 살던 피콜라상하이 빈민촌이 대홍수로 잠기자 한 창녀를 구하고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한다. 앞서 인용한 글은 톰마소가 어둠과 홍수에 침수된 거리를 가로질러 가는 장면이다. 자진해서 나선 길에서 그는 “침수된 집들 창문에서 희미한 양초 불빛”를 본다. 그가 어둠과 홍수 속에서 목도한 ‘양초 불빛’은 톰마소 자신이 속한 계급, 즉 가난하고 무지하며 폭력적인 사람들의 ‘생명의 빛’ 이미지이다. 오직 자신의 생존과 쾌락만을 위해 살아왔던 그가 홍수로 인해 죽어가는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나아가는 장면은 매우 인상적이다. 그는 지식인의 혁명적 의식과 조직된 프롤레타리아계급 의식에서 발원한 실천이 아니라 무의식적이고 자발적인 연대의 행동을 실천했다는 점에서 스스로 현실의 어둠을 밝히는 사람들, 그 빛의 이미지를 구현한다. 

조르주 디디-위베르만은 『반딧불의 잔존』에서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가 “파시즘이 승승장구하는 밤”, “서치라이트의 ‘사나운’ 빛” 때문에 정치 논고 「이탈리아 내 권력의 공백」(1972년 2월 1일)을 통해 선언한 반딧불이(lucciole)의 소멸을 부정한다. 1940년대의 파솔리니는 단테의 『신곡』을 거듭 읽으며 「지옥편」 제26곡에 등장하는 반딧불이의 작고 많은 빛들을 발견하고 “톰마소”와 같은 인간형을 구현한 바 있는데, 뭇솔리니의 파시즘 문화가 민중(people)의 가치와 영혼과 언어와 몸짓―반딧불이의 빛을 완전히 소멸시켰다고 선언한다. 그러나 조르주 디디-위베르만은 반딧불이의 “은근하고 일시적이고 단속적인 작은 빛”의 이미지를 재해석하면서 잔존하는 반딧불이의 재출현과 “잔존의 정치성”, 민중의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빛을 되살려내고 그들의 저항성과 공동체를 포기하지 않는다. 

김남주와 파솔리니와 디디-위베르만의 글에서 공통적으로 출현하는 ‘빛 이미지’는 각각 다른 파국의 역사적 맥락을 함축하면서도 결코 소멸하지 않는 민중의 저항과 연대의 공동체를 함의한다. 지시할 수 없지만 거기 있는 존재로서 잔존하는 반딧불이의 미광, 그 희미한 빛의 이미지는 혁명적 지식인과 조직된 프롤레타리아계급의 이름으로 수렴되지 않는 사람들의 섬광 같은 이미지이며 김남주와 파솔리니와 같은 지식인의 절망 속에서도 죽지 않고 잔존하면서 이름 없이 단속적으로 출현하는 존재, 그 자체로 잔존의 정치성과 민중의 역사성을 담지한다. 그리하여 잔존하는 반딧불이의 ‘빛 이미지’는 디디-위베르만의 전언대로 지옥 같은 현실 너머의 종교적 구원의 빛을 함의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민중 이미지가 순간의 도약을 통해 예기치 않은 ‘현재’의 민중 이미지로 순식간에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섬광의 알레고리적 이미지이다. 그 빛은 다른 삶과 다른 세계의 가능성이 ‘지금-여기’에 도래하여 목도되는 시적 순간의 현현과 크게 다르지 않다.     



2. 빛이 파괴된 세계     


송승언의 첫 시집 『철과 오크』(문학과지성사, 2015)는 빛의 알레고리적 이미지로 가득하다. 송승언의 시에 두드러지는 빛의 이미지는 멜랑콜리적 세계관 속에서 대상을 재현하지 않고 대상을 암시하는 감각의 잔상을 신체에 각인시킨다.      


드디어 꿈이 사라지려는 순간, 너는 창밖에서 잠든 나를 보고 있지

암초 위에서 심해를 굽어살피는 너의 낯빛에 놀라자 꿈은 다시 선명해진다     

들로 강으로 흩어지던 내가 되살아나고 있었다     

내가 이곳을 설계했다 믿었는데 아니었던 거지

블라인드 틈으로 드는 빛이 어둠을 망친다 생각했는데 눈은 여전히 감겨 있고, 몸은 벽 너머에서 들려오는 너의 노래에 묶여 있었다

입안에 고인 물이 다른 물질이 되려는 순간     

눈 속으로 하해와 같은 빛이 밀려들었다

―「녹음된 천사」 전문     


첫 시 「녹음된 천사」는 언어의 순차성에 바탕을 둔 주제를 전달하기보다는 대립되는 이미지의 배치를 통해 시의 행간을 채우면서 동시에 균열을 일으키는 형식을 구현하는데, 그것은 감각에 지각되는 송승언의 고유한 언어 형식이다. 알레고리적 이미지는 ‘너/나’, ‘원본/복제(녹음)’, ‘실재/꿈(가상)’, ‘창밖/실내’, ‘수면/심해’, ‘흩어짐/되살아남’, ‘빛/어둠’, ‘눈 밖/눈 속’, ‘벽 너머/벽 안’, ‘다른 물질/입안에 고인 물’이라는 대립된 이미지로 나타난다. 전자의 항목들이 ‘너’의 이미지라면 후자의 항목들은 ‘나’의 이미지이다. 그 알레고리적 이미지들은 빛과 어둠을 교차하면서 “이곳”으로 지칭되는 현실의 사태를 지각시키고 송승언의 시적 사유를 전개한다는 점에서 그의 ‘이미지-사유(Bild-Gedanken)’의 출현 지점이다. 

시에 나타난 이항 대립의 알레고리적 이미지들을 계열화하여 재배치하면 시적 주체로 설정된 ‘나’, ‘녹음된 천사’ 이미지와 ‘너’의 이미지의 밑그림을 상상할 수 있다. 시적 주체인 나는 ‘녹음된 천사-음악’이자 복제된 가상의 천사이다. 나는 잠을 자고 있는 실내와 심해에서, “눈 속”과 “벽 안”의 “어둠” 속에서 현실의 “이곳을 설계했다 믿었는데” 아니었음을 자각하고 깨어나려 한다. 그런데 “눈은 여전히 감고 있고, 몸은 벽 너머에서 들려오는 너의 노래에 묶여 있”다. 즉 나는 가상의 세계, 복제된 세계의 어둠 속에서 모조 천사로 살고 있다는 자각을 하고 잠에서 깨어나 “입안에 고인 물”에서 “다른 물질”로 되는 꿈을 꾼다. 항상 “되살아나”는 ‘녹음된 음악’이 “들로 강으로 흩어지”는 순간의 노래가 되고자 한다. 그러나 그것은 실패가 예견된 꿈이다. 기록되어 저장된 소리는 한 번 불러서 흩어진 노래가 될 수 없고 복제된 세계는 원본의 세계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나와 달리 ‘너’는 “창밖”과 “벽 너머”에서 “노래”를 부르면서 단 한 번 현현하는 주체로서의 천사이다. “블라인드 틈으로 드는 빛”이다. 그리하여 「녹음된 천사」에서 빛의 이미지는 원본의 실재 세계와 복제된 가상 세계에 대한 알레고리적 이미지를 함의한다. 「녹음된 천사」에 깃든 송승언의 이미지 사유는 실재 세계의 원본(Original) 없는 가상 세계의 복본(Duplicate)으로 가득한 완전한 어둠 속에 살고 있다는 세계 인식을 드러낸다. “관제탑에서 내려다보았다.//빛이 파괴되었다.”는 「시인의 말」은 그의 세계 인식을 명확히 보여준다. 

송승언의 시에서 현실은 관제탑의 감시와 통제와 명령을 받는 세계이며 그 세계의 실재하는 빛은 파괴되었다. 어둠으로 휩싸인 현실 세계가 설령 빛으로 가득하다고 하더라도 그 빛은 실재하는 근원의 빛이 아니라 복제된 허상의 빛이다. 발터 벤야민의 용어로 표현하자면 아우라가 파괴된 세계의 빛이다. 그런 이유로 시집 『철과 오크』에서 “이곳에는 빛이 가득하다 몸을 잃을 만큼”(「지엽적인 삶」) “내 방은 빛에 갇혀 깜깜”(「담장을 넘지 못하고」)하고 “촛불이 방을 어둠으로 채”(「축성된 삶의 또 다른 형태」)울 정도로 ‘빛’은, 빛의 근원적 이미지를 전복한다. 그 빛은 반딧불이의 ‘약한 빛(lucciole)’이 아니라 ‘강한 빛(lucc)’이며 관제탑의 서치라이트에 가깝다. 이제 “입안에 고인 물이 다른 물질이 되려는 순간//눈 속으로 하해와 같은 빛이 밀려들었다”의 ‘빛’은, 빛의 근원적 이미지가 아니라 복제된 허상의 빛 이미지로 전복됨으로써 ‘나’와 다른 ‘너’, 실재라고 믿었던 천사조차 ‘녹음된 천사’였다는 시적 인식을 가능하게 한다. 그 빛의 이미지는, ‘너’와 ‘나’의 이항 대립의 이미지를 가로지르면서 “벌어진 살점 속으로/빛이 섞여 들”(「법 앞에서」)어 아픔의 “흔적”을 남긴다. 현실은 “모든 것이 흐린 공원이었는데 모든 것이 너무나 뚜렷이 잘 보”(「모든 것을 볼 수 있었다」)이는 세계이며 “바깥을 상상할 수 없”(「셰이프시프터‘)게 한다. 시집의 마지막 시편 「유형지에서」까지 현실은 ‘유형지’로서 “모든 게 흰빛으로 망각되는 해변”(「유형지에서」)이다. 그런 점에서 「녹음된 천사」의 빛 이미지는 구체적 대상을 직접 지시하고 상징적 의미에 도달하는 재현 이미지가 아니라 추상적 관념을 매개하는 언어 형식이며 그 시적 의미를 개념화하지 않는 이미지 사유로서 송승언의 시가 구축한 언어의 특이성이 발현된 감각이다. 그리하여 「녹음된 천사」는 기술복제시대가 몰고 온 삶의 파국이 현실의 모든 영역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알레고리적 이미지로 읽힌다. 

발터 벤야민의 ‘역사의 천사’와 대비되는 ‘녹음된 천사’가 살아가는 빛의 세계에서 시인은  그 세계의 바깥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비극적 세계 인식을 드러낸다. 그러나 그에게 실재하는 삶과 실재하는 세계로부터 기원하는 ‘참된’ 빛에 대한 꿈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잔존하는 반딧불이의 미광처럼 실재하는 삶과 세계로부터 기원하는 빛의 이미지는 ‘숲’과 ‘불’의 이미지와 결합하여 순간 출현한다.     


빛은 영원하다는 듯이 장작을 태울 수 있고

장작은 열 개비가 적당하고 그 불이면 영원도 밝힐 수 있고     

아이들은 영원을 지나가고 있고 별들이 치찰음을 내고 있고

밤과 낮은 서로에게 이기지도 지지도 못하고 있고     

불 앞에서 나무꾼들은 수십 개의 그림자를 벗으며 농담을 하고 있고

인간의 맛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불그림자가 불의 주변을 배회하며 불그림자를 만들고 있고

새들은 여전히 침묵을 부리에 물고 있고     

나무 위에서 열쇠들이 쏟아지고 있다

나부라진 옷가지들이 발자국을 가리고 있고

나무꾼들은 횃불을 나눠 들고 더 어두운 곳으로 움직이고 있고

―「철과 오크」 부분     


「녹음된 천사」와 달리 「철과 오크」의 세계는 평화롭고 따뜻하다. 「녹음된 천사」의 세계가 인공의 빛 속에 있다면 「철과 오크」의 세계는 자연의 빛, 숲속의 불빛에 있다. 「철과 오크」는 숲속에서 “열 개비” 장작이면 “영원도 밝힐 수 있”는 “불”로 세계를 밝힌다. 새들과 나무꾼과 아이들을 살리는 생명의 나무, 오크(Oak)로부터 타오르는 ‘불’은 ‘영원’을 밝히고 아이들이 영원도 지나갈 수 있게 한다. 영원은 자연의 숲이며 실재하는 빛의 기원을 암시하는 것과 다르지 않은 알레고리적 이미지이다. 

그 영원—나무로부터 발원한 장작불은 인공의 복제된 빛과 달리 직접 경험(Erfahrung)할 수 있고 그 실재의 빛을 직접 응시할 수 있다. 그 불은 그림자를 만들며 인공의 복제된 빛을 차단한다. 그 불은 나무꾼들의 “수십 개의 그림자를 벗”길 만큼 인공의 복제된 빛을 씻어내는 정화의 불이며 스스로를 태우면서 아이들과 함께 숲으로 돌아가는 나무의 영원에 이르는 길이기도 하다. 「철과 오크」는 그 불빛을 감싸고 있는 숲의 밤하늘에 떠오른 별들의 “치찰음”을 들을 수 있을 만큼 고요하고 영원한 어둠의 세계를 그린다. “나무 위에서 열쇠들이 쏟아지”는 이미지는 ‘별’의 이미지와 결합하면서 ‘철’의 소리를 내고 영원한 어둠의 세계, 그 문이 열리는 순간에 대한 알레고리적 이미지이다. 영원한 어둠의 세계와 합일하는 그 순간은, 시집 『철과 오크』를 가로지르는 한 번의 섬광처럼 다른 삶과 다른 세계가 ‘지금-여기’에 도래하여 개시되는 시적 순간이다. 소멸되었다고 선언한 어둠 속에서 잔존하던 반딧불이의 불빛들이 일제히 출현하는 순간이다. 그 시공간에는 보들레르의 시 「상응(Correspondances)」처럼 만물이 조응하고 우주와의 일체감을 경험하면서 숲속의 밤 풍경을 바라보는 시적 주체의 교감 흔적이 배어 있다. 물론 그 별이 빛나는 밤하늘과의 상응은 금세 깨지고 반딧불이의 미광은 곧 사라진다. “아침에는 숲이 벌목되”(「기원」)었고 현실에서 “나는 오래 살고 오래 착취”(「나타샤」)당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빛이 파괴된 세계에서 시인은 “밤과 낮은 서로에게 이기지도 지지도 못하고 있”는 현실을 직시한다. 영원에 대한 낙관도 포기도 하지 않는다. 「철과 오크」에서 목도한 다른 삶과 다른 세계의 가능성과 그 시적 순간의 현현을 망각하지 않으면서 소멸하지 않고 끝까지 잔존하는 주체의 삶을 견지한다. 그것은 숲속의 “더 어두운 곳”으로 들어가서 빛이 발하기를 준비하는 반딧불이의 이미지이다. 어둠 속에서 사람들은 소멸하지 않고 잔존하고 있다. 



월간 『현대시』 2016년 9월호



*참고문헌

하이네•브레히트•네루다, 『아침저녁으로 읽기 위하여』, 김남주 옮김, 남풍, 1988.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 『폭력적인 삶Una vita violenta(1959)』, 박명욱•오명숙 옮김, 세계사, 1995.

조르주 디디-위베르만, 『반딧불의 잔존-이미지의 정치학Survivance des lucioes(2009)』, 김홍기 옮김, 길,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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