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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승환 Mar 11. 2024

얼굴 없는 목소리

― 살아남은 자, 백은선의 시쓰기




얼마나 뜨거운지 말할 수 있는 자는

그다지 뜨겁지 않은 불 속에 있는 것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

Francesco Petrarca, 『칸초니에레Canzoniere』 137. 
미셸 드 몽테뉴, 『에세1』, 심민화․최권행 옮김, 민음사, 2022, p.49 재인용.



송승환


1. 나와 마주하는 시간


퍼스널 브랜딩 글쓰기(Personal branding writing). 이것이 2020년대 한국에서 첨예한 글쓰기의 목표이다. 퍼스널 브랜딩은 기업의 이윤과 이미지 제고를 위한 브랜딩처럼 개인의 수익과 이미지 제고를 위한 ‘나’의 브랜드를 만드는 것이다. 퍼스널 브랜딩은 ‘나’, 자신의 직업과 경력, 특별한 기술과 경험, 차별화된 정체성과 비전을 명확히 제시하고 ‘나’만의 상품 가치 창출을 목표로 삼는다. 특정 분야에서 ‘나’ 스스로를 고유 상품 브랜드로 만들어서 소비자가 가장 먼저 떠올릴 수 있도록 만드는 ‘표상’ 작업이다. 퍼스널 브랜딩 글쓰기는 ‘나’의 경험 속에서 축적한 직업 기술과 능력, 성공 사례와 세계관, 실패담의 서사를 친근하게 정기적으로 서술함으로써 소비자들로부터 폭 넓은 선호도와 높은 인지도 확보를 목표로 삼는 글쓰기이다. 그것을 바탕으로 ‘나’, 1인 비즈니스 수익 모델을 구축한다. 무엇보다 퍼스널 브랜딩 글쓰기는 미디어의 발달, 그 중에서도 블로그,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유튜브, 틱톡 등의 손쉬운 SNS 채널 개설을 통해 누구나 무료로 수행할 수 있는 인터넷 온라인을 바탕으로 확산되고 있다. 이는 평생직장과 정년제의 소멸, 노동 수입만으로 영위할 수 없는 경제적 어려움, 연봉 향상을 위한 이직에서 ‘나’의 정체성과 장점을 강조할 수 있는 ‘나’의 브랜드 필요성 등의 노동 환경 변화에서 요청된 것이다. TV와 SNS에서 쌓은 높은 인지도를 바탕으로 온라인 클래스를 개설해서 고수익을 얻고 있는 어느 소설가의 경우처럼 개인의 글쓰기가 미디어의 급격한 변화 속에서 개인의 브랜드 구축과 경제적 수입을 마련해주는 유용한 기술이 된 것이다. 미디어의 독점 체제에서 미디어 민주주의로 이행되면서 글쓰기의 민주주의와 1인 비즈니스 수익 모델의 가능성이 열린 것이다. 이것은 디지털 미디어 사회가 전개한 개인의 글쓰기와 미디어 민주주의의 효능이다.

퍼스널 브랜딩 글쓰기는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나’의 상품 가치와 광고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수많은 개인들과 자본 사이에서 무한 경쟁을 해야 한다. ‘나’의 노출 빈도와 조회수를 높이기 위한 자극적인 제목, 시각 이미지와 음악, 전문성과 분위기 연출 노동을 끊임없이 요구한다. 그것은 익명의 대중들 속에서 특별한 것으로 여겨지는 상품 브랜드로서 ‘나’의 ‘드러냄’을 만들어내는 소외 과정이다. 그 과정에서 ‘나’의 있음 자체, 실재의 ‘나’는 사라지고 브랜드가 된 ‘나’의 이미지, 상품의 물신성이 만들어낸 환상의 ‘나’가 나타난다. 소비자와 구독자가 매혹되는 것은, 상품 물신성의 신비에 휩싸인 ‘나’이다. 상품 물신성의 신비와 환상 속에서 실재의 ‘나’는 부재하다. 지속적인 유용성과 상품 가치를 창출하려는 퍼스널 브랜딩 글쓰기 속에서 실재의 ‘나’와 상품가치의 ‘나’ 사이의 간극은 심화된다. 그 간극의 심화를 불러일으키는 무한 경쟁에서 퍼스널 브랜딩에 성공하는 ‘나’의 유용한 글쓰기는 당연하게도 소수이다. “부자나 유명인사와 같이 ‘이미지가 있는’ 사람들이 이미지를 소유하고, 상징 시장과 명성의 목적에 가장 잘 부합하게 이미지를 관리”(조르주 디디-위베르만, 『민중들의 이미지』, 이나라 옮김, 현실문화연구, 2023, p.26.)하는 소수이다. 소수의 성공담은 화려하게 드러나고 다수의 실패담은 조용히 사라진다. 화려한 성공담의 ‘나’는, 상품 물신성의 환상 연출 노동으로 더욱 치닫는다. 실패담의 ‘나’는, 성공한 소수와 자신을 끝없이 비교하면서 우울과 자괴감에 빠진다. 퍼스널 브랜딩 글쓰기의 문화 산업 구조 속에서 수많은 나‘들’의 드러남과 사라짐은 무한 반복된다.

2020년대 한국시에서 나타나는 시적 주체, ‘나’의 표상들은 저 퍼스널 브랜딩 글쓰기의 생산 구조와 일정한 상동성을 지닌다. 2020년대 한국시에서 ‘나’는, 퍼스널 브랜딩 글쓰기의 ‘나’처럼 1인칭의 ‘나’를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일상의 삶에서 길어 올린 소소한 경험과 상처의 풍경을 나열하고 재현한다. 1인칭의 시적 주체, ‘나’는, 유튜브와 인스타그램의 사진과 동영상에 노출된 일상의 ‘나’와 크게 다르지 않는다. 일상적인 나의 경험과 기술적 능력은 화려한 이미지와 감성적인 음악으로 편집된 글과 영상으로 편집되어 소비자와 구독자가 즉각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을 정도의 매혹과 난이도의 글쓰기로 노출되듯이 1인칭의 시적 주체인 ‘나’가 진술하는 시적 정서와 시적 언어의 양상도 유사하게 노출된다. 그것은 유용한 재현의 시쓰기이다. 그러나 백은선의 시는 일관되게 ‘나’의 고통을 드러내면서도 ‘재현’의 시쓰기를 넘어서서 ‘암시’의 시쓰기를 실천한다. 백은선의 암시의 시쓰기는 퍼스널 브랜딩 글쓰기 시대에 유용성의 글쓰기와 거리를 두면서 어떻게 ‘나와 마주하는 시간’(라이너 쿤체, 『나와 마주하는 시간』, 전영애․박세인 옮김, 봄날의책, 2019, p.55.)을 발명하는지를 제시한다.


 2. 이피게네이아의 얼굴


아이스퀼로스의 비극 「아가멤논」은 근친 살해와 복수의 폭력으로 치닫는 『오레스테이아Oresteia』 3부작(아가멤논의 아들, 오레스테스(Oresteia)의 이야기를 뜻하는 『오레스테이아Oresteia』 3부작은 『아가멤논Agamemnon』, 『제주를 바치는 여인들Choephoroi』, 『자비로운 여신들Eumenides』이다. 아버지의 딸 살해, 딸을 위한 복수로서 아내의 남편 살해, 아버지를 위한 복수로서 아들의 어머니 살해 서사로 이어지는 비극이다. 이하 서사 요약은 『아이스퀼로스 비극 전집』(천병희 옮김, 숲, 2008) 참고. 인용은 면수만 표기한다.)의 첫 작품이다. 아르고스의 왕 아가멤논은 일천 척의 그리스 함대를 이끌고 트로이아로 떠날 때 출전을 방해하는 폭풍과 직면한다. 그는 폭풍을 달래기 위해 아내 클뤼타이메스트라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 이피게네이아를 살해하고 희생 제물로 바친다. 마침내 트로이아 전쟁에서 승리한 그리스군 총사령관 아가멤논은 10년 만에 귀향하고 욕실로 향한다. 지난 10년 동안 클뤼타이메스트라는 딸의 죽음에 대한 비통함과 복수의 칼날을 품고 있었다. 클뤼타이메스트라는 그녀의 정부(情夫) 아이기스토스와 함께 남편 아가멤논을 욕조에서 무참히 살해한다. 아가멤논이 첩으로 삼고 데려온 전쟁 포로 캇산드라도 함께 살해한다. 클뤼타이메스트라는 딸 이피게네이아를 제물로 바친 것을 용서할 수 없었다고 주장한다. 그녀의 정부 아이기스토스는 아가멤논의 아버지 아트레우스가 자기 아버지를 추방하고 형들을 살해한 것에 대한 정당한 복수라고 주장한다.

「아가멤논」 비극적 서사의 기원에는 무엇보다 이피게네이아의 죽음이 있다. 아가멤논은 국가의 수반이자 『오레스테이아』 3부작을 지배하고 있는 가부장제와 남성중심주의의 체현자이다. 그는 국가의 이익을 위해 죽어야 할 이유가 전혀 없는 자신의 딸을 희생 제물로 삼아 살해한다. 그는 전쟁의 승리자로서의 명예를 향유하면서 적군의 딸 캇산드라를 첩으로 삼고 귀환한다. 동시에 그는 귀환한 국가의 권력자이자 클뤼타이메스트라의 남편으로서의 지위를 모두 향유하고자 한다. 그것은 모두 여성의 입장에서 매우 폭력적이다. 아가멤논은 국가의 이익을 위해 딸 이피게네이아를 죽일 만큼 국가주의자이다. 그는 전승자의 지위를 통해 적국의 딸을 첩으로 삼고 성적 자율권을 침해한 성폭력 가해자이다. 그는 아내를 존중하면서도 다른 여성을 첩으로 삼는 가부장제의 남성중심주의자이다. 이것은 아이스퀼로스가 『오레스테이아』 3부작을 쓴 2,500여 년 전, 그리스의 지배적 이념이다. 『자비로운 여신들Eumenides』에서 정의의 여신 아테나는, “모든 면에서 진심으로 남자 편이며, 전적으로 아버지 편이니라. 그래서 나는 여인의 죽음을 더 중요시하지 않는 것이니, 그녀가 가장인 남편을 죽였기 때문”(181)에 그것은 옳지 않은 일이라며 아버지 아가멤논을 위해 어머니 클뤼타이메스트라를 살해하고 복수한 아들 오레스테스를 처벌하지 않는 판결을 내린다. 그런 점에서 『오레스테이아』 3부작은 그리스의 가부장제와 남성중심주의의 폭력을 정의로 판결하고 폭력의 성(gender) 정체성은 남성이라고 선언한 작품이다. 그 판결에 이르기까지 「아가멤논」의 여성들은 희생 제물(이피게네이아), 부정(不貞)을 저지른 암살자(클뤼타이메스트라), 성적 노예(캇산드라)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그 중에서 비극의 기원, 이피게네이아는 비극의 무대에조차 등장하지 않는다. 이미 국가주의와 아버지의 폭력에 의해 희생된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오로지 어머니 클뤼타이메스트라의 진술에 의해서만 기억된다. 국가의 위기를 극복하고 전쟁의 승리를 위해 희생된 그녀의 얼굴은 무대 위에 없다. 가부장제와 남성중심주의의 폭력이 자행되는 세계의 무대 위에 이피게네이아의 얼굴은 없다. 어머니 클뤼타이메스트라가 그 얼굴을 기억하고 억울한 희생을 진술하는 동안만큼만 상상 속에서 나타나는 한 사람의 얼굴이다. 클뤼타이메스트라의 죽음과 아테나의 판결 이후에는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한 사람의 얼굴이다. 가부장제와 남성중심주의의 폭력 속에서 한 사람의 얼굴이 망각된다.

지금 한국 현실에서도 매일 희생되고 망각되는 여성들, 이피게네이아들은 많다. 그리스의 가부장제와 남성중심주의는 여전히 한국에서 지배적이며 그 폭력은 지속적이다. 다름 아닌 백은선의 시적 주체는 그 폭력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이피게네이아의 부서진 얼굴로 재현 (불)가능한 폭력의 진실을 암시한다.



3. 얼굴의 파토스


백은선의 시집(1987년생 백은선은 4권의 시집을 출간하였다. 1.『가능세계』(문학과지성사, 2016), 2.『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장면들로 만들어진 필름』(현대문학, 2019), 3.『도움받는 기분』(문학과지성사, 2021), 4.『상자를 열지 않는 사람』(문학동네, 2023). 이하 1.『가능세계』(문학과지성사, 2016)의 141면은 (1:141)로 인용 표기하기로 한다.)에서 시적 주체의 실존과 가족 관계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시적 주체 ‘나’의 아버지는 폭력적이다. “입을 틀어막는 아버지 허리띠를 풀어 쥐는 아버지 벽에 밀어붙이고 목을 조르는 아버지 포르노를 보는 아버지”(1:141)이다. 아버지에게는 새엄마가 있다. 나는 “새엄마가 즐겨 입던 어두운 초록 재킷을 훔”(1:63)친 적 있다. 나에게는 언니가 있다. 그 언니는 죽었다. 나는 “죽은 언니를 생각할 때의 죄책감과 은밀한 기쁨”(3:50)을 동시에 느낀다. “왜 내가 아니었을까,”(3:50)라는 살아남은 자의 자책감과 안도감이다. 쉬운 영어만 할 줄 아는 엄마는, “화장대와 침대가 있는 작은 방”(1:180)에서 “검은 남자가 오면 손짓으로 나를” 부르고 “나의 등을 슬며시 떠밀”(1:180)었다. “여고생 때 일기장을 펼치면, 선생님 널 죽여버릴 거야, 라고”(1:176) 쓸 만큼 나는, 선생님에게 살의를 느낀 적 있다. 학교에서 따돌림을 받던 나는, “매일 혼자 벤치에 앉아”(3:30) 있었다. 나는 동급생들에게 “사물함 뒤에서 머리카락이 몽땅 잘리고” “#죽어. 죽어. 죽어.#” “발신자 없는 문자를 받을 때마다 미칠 것처럼 무서웠”(3:30)던 청소년 시절을 보냈다. 나는 남자를 만나 사랑하고 결혼한다. 임신하고 출산을 앞두고 있는데, 남자, “너는 내가 진통할 때 전화를 했다. 나는 죽을 것 같아 전화 같은 건 안중에도 없었다. 너는 내기에서 이겼다고 그럴 줄 알았다고 좋아했다. 도무지 어떤 일도 끼어들 수 없는 비좁은 벽 사이에서. 혼자 주먹으로 벽을 내리치며 울”(1:100)었다. “아이가 닫힌 문을 두들고 있었”기에 “세 번 목을 매고 세 번 실패”(3:167)하였다. 그리하여 “나는 아이의 엄마, 너는 아이의 아빠”(2:80)가 되었는데, 남편이 된 남자, “네가 뺨을 때리던 날”, 나는 “그것을 지옥이라고 생각”(4:36)하였다. 끝내 나는 “협의이혼”(3:154)한다. 이제 나는 한 아이의 엄마. “아이가 새근거리며 몰아쉬는 숨소리만”(3:54) 가득한 방 안에 있다. 나는 “모로 누워 핸드폰 사진을 하나하나 넘겨보”고 “팔 년을 돌아보며 내 몸은 가만히 있는데 이토록 많은 시공간 속에 살아 있었다는 게 앞으로도 계속된다는 게 끔찍해서 눈물이 날 거”(4:52) 같다. “맨발로 찾아간 날에는 꼭/양말을 신겨주던”(4:128) 할머니의 기일에 “누구나 태어날 때 한 권의 책을 갖고 태어”난다는 말, “넌 커서 선생님이 되어야”(4:128) 한다는 할머니의 말이 떠오른다. 이것이 아버지와 남편의 폭력 속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자, 백은선의 시적 주체, 이피게네이아의 후예, 한 여성의 실존적 초상이다. 죽은 언니의 얼굴과 돌아가신 할머니의 얼굴은 없다. 내 기억의 상상 속에서만 있다. 엄마의 얼굴과 새엄마의 얼굴은 아버지의 폭력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는다.

첫 시집 『가능세계』(2016)에서 네 번째 시집 『상자를 열지 않는 사람』(2023)까지 8년 동안 집중 출간된 4권의 백은선 시집은 할머니의 말씀처럼 한 권의 책, 하나의 얼굴로 읽힌다. 나의 얼굴은 아버지와 남편의 폭력(오스트리아 유대인으로서 강제수용소에 수감되어 구타와 고문을 받았던 장 아메리는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고문에 시달렸던 사람은 이 세상을 더 이상 고향처럼 느낄 수 없다. 절멸의 수치심은 사라지지 않는다. 부분적으로는 첫 번째 구타에서, 그러나 전체 범위에서는 결국 고문 속에서 무너진 세계에 대한 신뢰는 다시 얻어지지 않는다. 이웃을 적대자로 경험했다는 것은 고문당한 사람 속에 경악으로 굳어진 채 남아 있다. 그 누구도 그것을 넘어 희망의 원칙이 지배하는 세계를 바라볼 수 없다. 고문당한 사람은 속수무책의 공포에 내맡겨진다.” 장 아메리, 「고문」, 『죄와 속죄의 저편: 정복당한 사람의 속죄를 위한 시도』(1966), 안미현 옮김, 길, 2012, p.91.)이 깊이 새겨진 얼굴이다. 나의 “얼굴은 갈가리 찢겨 있어”(1:195) “구겨진 얼굴”(2:94), “비틀린 얼굴”(4:41), “허물어진 얼굴”(2:134), “물 위를 떠가는 뒤집힌 얼굴”(1:23)이다. “낯설고 차가운 얼굴”(1:189), “민둥 얼굴을 하고 표정 없이 말없이”(1:201) “텅 빈 얼굴”(3:167)이다. “미친 것 같은/얼굴”(3:16)이고 “이미 죽은 사람의 얼굴”(2:144)이어서 “문득 얼굴/나는 지워지고”(2:167) 싶다. 나의 얼굴은 아버지와 남편의 폭력에 의해 부서지고 깨어지고 파괴되어 구겨지고 허물어져 비틀린 한 사람의 얼굴이다. 남성의 폭력은 나의 얼굴에 기록되어 지속된다. 현재 나의 얼굴은 폭력이 자행된 과거의 현존이며 지울 수 없는 미래의 현전이다. 얼굴에 새겨진 흔적은 잔존하는 폭력의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나는 나쁜 기억력을 소망”(1:17)하면서 내가 나의 얼굴을 바라볼 때마다 그 폭력이 잔존하는 얼굴의 파토스(pathos)(노인 요양병원 의사이자 사진가 필리프 바쟁(Philippe Bazin, 1954- )은 “가로세로 27cm의 정사각형 표면 위에서, 예측할 수는 없지만 아마도 죽음의 문턱에 있는 노인의 얼굴이 우리 앞에 갑작스레 나타”나는 순간들을 작업한다. 1985년에서 1986년 사이에 어떤 예술적 의도도 없이 작업한 40여명의 노인들의 얼굴들은 곧 사라지고 말 사람들의 표정과 몸짓, 피부와 주름살이 새겨진 시간이 기록되어 있다. 노인들의 얼굴들은 고유한 존엄과 정체성이 붕괴되어가는 현재의 시간이며 장차 우리에게 도래할 미래의 얼굴들이다. 노인들의 얼굴들은 바쟁의 몽타주 사진들에 의해 기억되며 그 얼굴들의 파토스가 발생시키는 인간의 정체성과 존엄에 대한 근본 물음을 제기한다. 조르주 디디-위베르만, 앞의 책, pp.48-60 참고.)는 고통스러운 순간의 기억을 재생시킨다. 나는 나의 얼굴과 전면적으로 마주설 수 없다. 나의 얼굴을 마주본다는 것은 폭력으로 일그러져 부서진 얼굴의 파토스를, 고통의 총체적 기억과 파괴된 실존의 성채를 한꺼번에 출현시키고 ‘나’를 고통의 심연으로 침몰시키는 일이다. 그런 이유로 나는 얼굴을 텅 비우고 거의 죽은 사람의 얼굴 없는 존재가 되고자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부서지고 구겨지고 비워지는 얼굴의 조각들을 바라본다. 살아남으려는 힘과 죽어버리려는 힘이 단속적으로 교차하는 얼굴의 조각들에서 잔존하는 폭력의 이미지가 매순간 솟아오른다. 죽은 언니의 얼굴과 돌아가신 할머니의 얼굴, 엄마의 얼굴과 새엄마의 얼굴이 떠오른다. 내 얼굴의 조각들 배후에서 얼굴 없이 죽은 여성들의 울부짖음이 들린다.

백은선의 시는 얼굴의 조각들에서 섬광처럼 솟아오르는 잔존하는 폭력의 이미지를 붙잡는다. 얼굴의 조각들이 불러일으킨 얼굴의 파토스를 통해 ‘폭력의 모든 것을 말하고 싶다’는 증언 욕구와 ‘나만 살아남았다는 안도감 때문에 모두 말할 수 없다’는 부끄러움을 동시에 표출한다. 얼굴의 파토스에서 솟아오르는 폭력의 기억과 부서진 얼굴 조각들의 시. 완전한 사라짐을 거부하는 얼굴 조각들의 시. 가려지고 흐릿해진 얼굴들을 기억하고 파편적으로 재현한 조각 형상들의 시. 그녀의 시쓰기는 온전히 복원할 수 없는 얼굴 조각들의 잔존 기억을 지닌 한 사람의 살아있음, 살아있음이 저항이며 삶의 지속이며 지속된 폭력을 증언하는 몸의 발언임을 환기한다. 그녀의 시에서 얼굴 조각들은 이름도 없이 얼굴도 없이 죽은 여성들의 존재를 노출하고 보이지 않는 그녀들의 얼굴 이미지가 ‘지금-여기’의 삶에 드리워져 있음을 현시하는 심미적 정치성을 발현한다.



4. 조각 형상들의 섬광: 빛과 소리, 언어의 몽타주


첫 시집 『가능세계』는 백은선의 시세계를 관통하는 시적 입장과 언어 방법을 응축하고 있다. 얼굴은 한 사람이 살아온 시간과 마음의 근육이 새겨져서 나타나는 고유한 존엄과 정체성이다. 얼굴은 시간의 흐름과 피부의 변화가 새겨진 주름과 피부 빛깔의 형상으로서 한 사람의 인상을 드러낸다. 현재의 얼굴은 과거의 시간이 축적되어 도착한 형상의 인상(人相)이며 미래의 시간에 흔적으로 남는 형상의 인상(印象)이다. 그 얼굴이 아버지와 남편의 폭력으로 무참히 일그러지고 부서지고 비틀린 형상의 인상으로 지속되고 있을 때, 한 사람의 고유한 존엄과 정체성은 파괴되고 부정당한다. 파편적인 얼굴의 조각들에는 폭력의 흔적과 고통의 기억이 잔존한다. 폭력은 과거와 현재, 미래의 얼굴에 깊은 상흔을 남길 만큼 강력한 것인데, 폭력에 대한 그녀의 시적 입장은 아이러니하다. 소크라테스가 “나는 알지 못합니다”로 시작해서 “우리 중 어느 쪽이 더 좋은 일을 향해 가고 있는지는 신 말고는 그 누구에게도 분명치 않”다고 끝맺는 원환(圓環) 구조의 변론(플라톤, 『소크라테스의 변명』, 강철웅 옮김, 이제이북스, 2014 참고)을 통해 인간의 무지(無知)를 아이러니로 드러낸다면 백은선은 “나는 모른다네”(「어려운 일들」)로 시작해서 “우리는 그것을 안다”(「도움의 돌」)고 끝맺는 나선형적 원환 구조의 진술을 통해 남성의 폭력을 아이러니로 드러낸다. 그녀는 폭력의 진실에 대하여 낱낱이 기억하고 폭력의 상흔을 체현하고 있는 얼굴의 담지자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폭력을 기억해내는 고통의 강도가 너무나 강력하기에 자신이 겪은 폭력에 대하여 ‘나는 모른다’고 부정하는 아이러니의 입장을 취한다. 더 나아가 자신보다 더한 폭력을 감내한 엄마와 언니의 고통을 완벽하게 재현할 수 없는 증언의 불가능을 인식하고 ‘나는 모른다’, 선언한다. 자신만 살아남았다는 생존자의 안도감과 부끄러움 때문에 폭력의 모든 진실에 대하여 ‘나는 모른다’고 부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폭력에서 살아남은 자의 죄의식과 죽은 언니에 대한 기억의 윤리 속에서 폭력의 진실을 말하고 싶은 집요한 욕구에 휩싸인다. 그녀는 끝까지 ‘우리는 그것을 안다’고 말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백은선의 시쓰기는 ‘나는 모른다’는 인식 부정과 ‘우리는 그것을 안다’는 인식 긍정 사이의 무한 왕복과 충돌에서 발생하는 아이러니의 섬광, 부서진 얼굴 조각 형상들의 섬광을 포착한다.

시적 입장의 아이러니는 시의 언어에 대한 성찰을 수행한다. ‘나는 모른다’는 인식 부정은 여성에 대한 모든 폭력을 재현할 수 없고 자신의 발언이 모두 진실한 증언이 될 수 없다는 시적 인식을 표출한다. 그것은 폭력에 대하여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 고통의 기억 속에서 재현 가능한 것과 재현 불가능한 것의 경계를 구획 짓는다. 그녀의 시쓰기는 자신이 겪은 폭력의 경험에 한정된다. 폭력을 기억하는 고통스러운 순간을 파편적으로 재현하고 조각의 진실을 지닌 언어로서의 성격을 지닌다. “얼마나 뜨거운지 말할 수 있는 자는 그다지 뜨겁지 않은 불 속에 있는 것”이라는 페트라르카의 시처럼 온전히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뜨겁고 재현 불가능한 폭력의 진실과 고통의 상흔은 시인이 비워둔 언어의 공백 속에 잔존하고 있는데, 우리는 상상력을 통해 ‘폭력의 사태, 그 현장으로’ 진입하여 조각들의 진실을 유추하고 언어의 공백을 채워가는 시쓰기의 공동체에 참여하게 된다. 거기서 ‘우리는 그것을 안다’고 말하는 인식의 긍정, 목격자의 장소에 서게 된다. 그런 점에서 백은선의 시적 언어는 폭력에 대한 전면적인 폭로와 고통의 사실적 증언을 목표로 삼는 르포르타주 글쓰기의 영역에서 벗어난 언어의 장소에서 발원한다. 그 언어는 폭력의 실재를 재현하는 언어가 아니라 암시하는 언어이다. 재현할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것을 행간의 침묵과 언어의 공백으로 암시하는 언어이다. 암시 언어는 피학적 타자가 된 여성들의 몸을 폭력의 포르노그래피로 전시하거나 재현하지 않는다. 폭력에 노출된 여성의 몸을 사물처럼 전시하거나 끔찍함의 충격을 전파하려는 재현 언어의 유용성을 폐기한다. 재현 언어가 폭력의 진실을 파편적으로 품은 조각 형상들의 ‘가능 세계’를 전시한다면 암시 언어는 ‘가능 세계’의 공백과 배면에서 잔존하고 있는 총체적 폭력의 재현 ‘불가능 세계’를 상상력으로 현시한다.

백은선의 시에서 폭력은 ‘빛’의 이미지로 암시된다. “임계점을 넘어선 빛들이 차례로 얼굴을 부”(1:67)수고 “등 뒤에서 칼날처럼 꽂히는 빛들”(3:100), “빛들은 찢어발긴 얼굴”(1:200) 같다. “빛이 머리를 관통할 때의 저린 통증을 생각”(4:47)한다. “빛 속에서/관절이 모두 녹아내리는 기분”(1:18)이다. “유리를 관통해 들어오는 빛이/심장을 찌”(4:150)르고 “빛의 칼로 귀를 자”(4:145)른다. “가장 아픈 건 빛”(2:31)이다. 네 권의 시집에서 시적 주체가 ‘비혼 여성―아들의 엄마―이혼 여성―육아 여성’으로 변모하는 동안 지속되는 폭력의 상흔은 일관된 빛의 이미지로 암시된다. 폭력은 빛의 이미지로 암시되기에 폭력의 총체적 진실은 언어의 공백 속에 잔존하면서 유예되며 유예되는 만큼 그 폭력의 강도는 강력한 것으로서 시적 주체의 외상과 증상의 근본 원인으로 작동한다.

빛과 함께 시적 주체에게 폭력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촉발하는 것은 ‘소리’이다. “만 명의 울음소리를 겹치고 웃음소리를 겹쳐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짖음을 얻게”(1:150)되는데, 그것은 울부짖음,(이집트에서 추방된 유대계 시인 에드몽 자베스는 『질문의 책』에서 다음과 같이 ‘울부짖음’을 진술한다. “울부짖음의 인내에는 한계가 없다. 그것은 희생된 자보다 오래 살아남는다./울부짖음의 인내에는 공(功)이 없다./어떠한 기관도, 어떠한 정부도 울부짖음을 독점할 수는 없다.” 에드몽 자베스, 『질문의 책』, 이주환 옮김, 한길사, 2022, p.109. 『질문의 책』, 아우슈비츠의 생존자 “사라(Sarah)는 울부짖고 유켈(Yukel)은 침묵한다. 인간의 언어로 말할 수 없다. 사태의 진리에 대하여 완벽하게 말할 수 없다. 진리를 말할 수 있는 자는 죽었고 생존자는 기억할 때마다 고통스럽다. 사라는 울부짖다가 미친다. 유켈은 고통 속에서 침묵한다.” 송승환, 「그 이름에 대하여」, 『포지션』, 포지션, 2023.6., p.244 참고.)“의도하지 않은 언어와 같은 형태”(1:150)이다. 신체 폭력이 유발하는 타격 소리와 인간의 존엄을 훼손하는 언어폭력, 그것을 체험하거나 목도한 자의 울부짖음, 그 “모든 소리가 귓가를 스칠 때 가장 아픈 형식으로 소리는 있”(2:100)다. 소리는 “귀가 쫑긋한 나를 키워준 공포”(1:148)이기에 “나의 청각에 대해, 나는 내가 생각할 수 있는 만큼만 생각”(1:138)해야 할 만큼 폭력적이다. 소리는 보이지 않지만 청각에 잔존하면서 보이지 않는 폭력의 순간을 연상시키고 재생하며 현재로 현전한다. 소리가 재생하는 폭력의 기억은 생각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울부짖음, 언어 이전의 폭력 사태 자체를 ‘지금-여기’에서, 다시 체험하도록 한다.

폭력의 빛과 소리 이미지로 구축한 백은선의 시는 고발하고 폭로하는 산문 언어 안에서 저항하는 방법으로서 단어의 재배치와 언어의 몽타주를 적극 실천한다. “디귿의 마음”(1:10)처럼 ‘ㄷ’의 문자(文字) 형상을 통해 시적 주체의 어떤 재귀적 마음을 암시하거나 “짖는다. 쏟아지는 비, 구겨진 얼굴, 입속의 말”(2:94)처럼 서로 다른 문맥의 언어들을 재배치하고 몽타주함으로써 맥락 없는 조각 언어들 사이에 시적 긴장의 섬광과 새로운 의미를 발명하고 시적 주체의 심리적 상태를 암시한다. “이중나선//파란 깃털//모자를 쓴 구름//불면의 밤//쓸수록 멀어지는 것”(3:129) 역시 연관 없이 멀리 있는 언어들의 병치와 몽타주를 통해 백은선의 고유한 언어 방법을 창안하고 시적 주체의 심리적 상태를 암시한다. “초록은 누가 잊은 기억”(4:79)처럼 ‘초록’에 새로운 이름과 새로운 색채 상징을 부여한다. 언어의 몽타주는 백은선의 시를 르포르타주 글쓰기의 영역에서 벗어난 시의 행위와 장소에 정초한다.

시적 인식의 아이러니, 부서진 얼굴 조각 형상들의 섬광, 빛과 소리의 암시, 언어의 몽타주. 이것은 상상할 수 없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 “무서운 것은 무서운 것을 무섭다고 하지 못하는 것”(1:85), 돌이킬 수 없는 사건으로서의 폭력을 산문의 재현 언어가 아니라 시의 암시(백은선의 시가 ‘암시’를 적극적으로 시의 행위와 장소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에서 스테판 말라르메의 암시에 관한 시적 사유는 여전히 중요하다. “하나의 대상을 명명하는 것, 그것은 시를 즐기는 기쁨의 사분의 삼을 제거하는 일입니다. 시를 즐기는 기쁨은 그것을 조금씩 알아가면서 추측하는 행복에 있습니다. 대상을 암시하는 것, 거기에 꿈이 있습니다. 암시는 상징을 구성하는 그 신비를 완벽하게 구사하는 것입니다.” Stéphane Mallarmé, l'enquête Sur L'évolution littéraire 1891, Igitur, Divagations, Un coup de dés(préface de Bertrand Marchal), Gallimard, Poésie, 2003, p.405. 번역은 필자.) 언어로 저항한 백은선 시의 언어 방법으로서 시의 심미적 정치성을 고도의 언어로 실천한 것이다.



5. 조각 형상들의 섬광: 상자의 어둠과 나무의 뿌리, 성냥의 불꽃


백은선의 시적 주체에게 빛의 세계는 세계의 어둠이다. 세계는 폭력의 빛이 점령한 어둠의 삶을 강제한다. 폭력의 빛은 다른 삶의 가능성을 인식할 수 없는 세계의 어둠 속에 ‘나’를 존재하도록 한다. 폭력의 빛이 중단되지 않는 한 살아있는 그녀의 거처는 어디서든 세계의 어둠 속이다. “이 밤은 너무 길다 아니 너무 멀”(1:171)다. 폭력의 빛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숨어든 ‘상자들’ 내부 또한 어둡다. 그 상자들은 작은 방과 여성의 몸, 관(棺)을 암시한다. “화장대와 침대가 있는 작은 방/심해처럼 어두운 파란 빛이 사방을 흐”(1:180)르는 작은 방은, 열쇠 구멍이 있는 상자로 비유되는데, 상자의 의지와 무관하게 밀고 들어온 열쇠에 의해 상자는 강제로 열린다. 그것은 동의 없이 여성의 몸 속으로 밀고 들어오는 남성의 폭력을 암시한다. “눈물에 눈물을 더하고/절벽에 절벽을 더해/상자는 가득 차”(2:15)오른다. 빛의 폭력을 피해 숨어든 상자 속조차 눈물과 상처로 인해 어둡다. 폭력의 흔적과 눈물의 기억은 작은 방, 강제로 열린 상자의 어둠처럼 여성의 몸, 어둠 속에 남아있다. “나는 눈을 뜨는 순간 빛의 세계에서 탈락”(4:70)한 존재로서 “나는 단지 상자들로 이루어진 부패 덩어리”(3:31)이다. “누군가는 결코 끝까지 상자를 열지 않을 수 있다는 거 그게 나”(4:53)다. 몸의 상흔, 상자의 어둠과 마주서는 것은 폭력의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일이다. 폭력의 순간은 ‘나’에게 영원한 것으로 기억되고 몸속에서 지속된다. 여성의 몸, 상자의 어둠은 남성의 폭력적인 “열쇠들 혹은 너무 많은 열쇠들”(1:181)의 기억으로 가득하다. 상자의 어둠은, “이 도시는 너무 어두워서 너무 밝”(4:26)은 ‘지옥’이다. “존재하는 데 왜 이렇게 많은 지옥이 필요한가요”(4:65)라고 되물어야 하는 도시. 상자의 어둠 속에서도 죽지 못하고 “죽을 때까지 살아 있어/지옥의 뜻”(4:138)을 지닌 도시. “지옥에는 돈이 있다//지옥의 집값은 비싸”(4:139)다. “모든 일이 상자로부터 시작”(1:186)된 것이다. 폭력의 “빛들이 관여할 수 없는 지하 세계는 얽힌 관들, 한없이 길어지는 관들, 텅텅 울려 퍼지는 거기가 내 몸속”(1:177)이라는 현실 인식에 다다른다. 작은 방과 상자의 어둠, 여성의 몸속은, 살아있는 한 폭력의 빛으로부터 은신할 수 있는 장소의 완전한 부재를 암시한다. 세계에서 은신할 수 있는 장소의 완전한 부재는 지하 세계의 관(棺) 속에서 살아가는 삶과 다르지 않다. 『상자를 열지 않는 사람』, ‘나’는 어떤 안식도 취할 수 없는 지하 세계의 어둠 속에 살아있다. 지하 세계의 관 속에서 나는, 죽지도 못하고 가까스로 호흡하고 있다. 두려워서 “뜯지 않은 선물 상자 속에는/호흡이 있”(1:191)다.

관 속에서의 호흡. 그것이 백은선 시의 존재론이다. 관 속에서 호흡만 하고 있는 존재. ‘죽음’, ‘없음’이 아니라 ‘죽어감’, ‘있지 않음의 있음’으로 존재하는 영(零). “나는 0, 0과 0 사이에서 무한히 증식하는 0”(3:194)이다. “나는 0입니다 나는 이 연극의 주인공입니다 나는 존재합니다 다만 무대 안에서 있을 수 없”(3:196)는 존재. 오직 세계의 무대 바깥, 지하 세계의 ‘목관’ 속에서 호흡만 하고 있는 나, 0이다. 거기에서 나는, 세계의 빛이 아니라 지하의 어둠 속으로 뻗어있는 나무의 뿌리를 발견한다. 나무의 뿌리는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대지의 숨결을 호흡하면서 뻗어가고 이어져 있다.


광장에 있는 나무는 우리 엄마, 우리 할머니, 우리 할머니의 할머니, 할머니의 할머니의 할머니……아주 오래전부터 있었어.
우기 때 죽은 사람들은 거기에 묻혔어. 그 사람들의 이름을 이어 나무를 불렀어. 이름이 점점 길어졌어. 이제 정확한 이름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지.
 
물속에 잠긴 커다란 나무.
거짓과 거짓, 진실과 진실을 이어 붙인 커다란 목관.
뿌리가 움켜쥐고 있는 것.
―「여름시」(1:127) 부분


나무의 뿌리는, ‘나’부터 이피게네이아의 후예, “우리 엄마, 우리 할머니, 우리 할머니의 할머니, 할머니의 할머니의 할머니……”까지 이어져 있다. 나무의 뿌리는, 죽은 사람들이 묻힌 무덤 속 목관, 그 사람들의 이름을 이어붙인 나무들의 뿌리이다.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긴 이름, 얼굴 없는 목소리의 숨결이 나의 호흡까지 이어져 있다. “여자아이는 모두의 어머니”(1:132)라는 시적 인식의 발견. 그것은 여자아이, 나의 고통은 나만의 고통이 아니라 앞서 죽은 모든 어머니들 몸속, 고통의 뿌리까지 이어져 있다는 시적 인식으로의 전회이다. 나무의 뿌리는 죽은 어머니들의 목관을 움켜쥐고 있다. 뿌리가 움켜쥔 목관에서 어머니들의 울부짖음이 호흡하고 있다. 뿌리의 호흡에서 기원한 나무들은 세계의 숲, 광장의 숲을 이루지만 숲은 폭력의 빛 속에서 잘 자라나지 못한다. 굴광성을 지닌 나무들의 숲조차 폭력의 빛 속에서 온전하지 못하다. 숲은 찬란한 생명의 초록빛이 아니라 지하 세계 목관의 검은빛이다. “이 숲은 휘청이고 자꾸만 실족”(2:10)한다. “이 숲은 끝났어 나무들을 봐 저 흩어진 각도와 호흡에 대해 생각”(1:136)한다. “나는 나무에 올라가는 법을 잊”(3:80)는다. 나는 뿌리의 목관 속에 갇혀 호흡한다.


우리가 목도한 것은 세계의 모든 문이 동시에 열리는 순간
열리는 동시에 가장 굳게 닫혀 있는
 

 
그리고 영원이지
―「1g의 영혼」(3:88) 부분


뿌리의 목관에서 호흡으로 존재하는 나. ‘1g의 영혼’, 나와 우리 엄마, 엄마의 할머니, 할머니의 할머니, 이피게네이아의 후예, 우리는 지하의 목관에서 벗어나기 위해 뿌리에서 지상의 나무로 자라나지만 폭력의 빛으로부터 은신할 수 없다. 지하의 뿌리에서 벗어난 지상의 나무가 직면하는 것은 폭력의 빛으로 휩싸인 숲이다. 지하의 목관을 움켜쥔 뿌리에게 지상의 초록빛 숲, 다른 세계는 절대적으로 부재하다. 그것은 다다를 수 없는 ‘영원(永遠)’이다. “열리는 동시에 가장 굳게 닫혀 있는//숲”이다. 이피게네이아의 후예, 우리는, 나는 ‘1g의 영혼’으로, 뿌리의 목관에서 숲으로, 숲에서 뿌리의 목관으로 이동할 뿐이다. 우리에게 다른 세계의 가능성과 다른 삶의 장소는 있지 않다. “길 끝을 돌면 다른 세계가 시작될 거라고 믿으면서 오래오래 걸었어. 물론 아무것도 없었”(1:199)다는 「비신비」 연작처럼 폭력의 빛이 세계의 숲에 내리꽂히고 있는 한, “나의 노래는 0과 숲으로 가득해서/시작도 끝도 없이 반복”(4:111)된다. “닫힌 유리병 속 순환하는 생태계”(4:167)에서 벗어날 수 없는 나는, 1g의 영혼은 상자의 어둠, 뿌리와 숲, 폐쇄된 세계에서 ‘침묵’으로 살아있다.

침묵은 남성 폭력의 빛이 강제한 것이다. 폭력의 빛은 폭력의 진실에 대하여 말하기를 금지하고 나는 폭력의 총체적 진실에 대하여 적확하게 말할 수 없어서 침묵에 잠긴다. 폭력의 빛이 쏟아지는 “침묵의 밖에서는 침묵을 읽을 수 없고/침묵의 안에서는 눈이 먼”(3:171)다. 침묵은 “검은 것을 깊이를 알 수 없는 구멍을 허방뿐인 영원을”(3:202) 가르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성의 폭력으로 죽은 어머니들의 진실을 말해야 한다. 죽은 어머니들에 대한 거짓과 진실을 이어붙인 목관에서 호흡하는 침묵의 영원을 깨뜨려야 한다. 나는 정확한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어머니들의 죽음에 대하여, 얼굴 없는 목소리에 대하여, 한 치의 거짓도 없이 말할 수 없지만, 그 울부짖음을 하나의 단어로 재현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모든 것을 무릅쓰고 어떤 하나의 단어로 재현하기를 멈추지 않아야 한다. 침묵과 싸우면서 언어의 한계 속에서 거듭 말해야 한다. 그 지점에서 “나는 남아서 이야기를 지어내는 사람”(3:112)이 된다. “나한테 시를 쓰라고”(3:42) 한 언니는 죽었지만, 살아남은 자, “나는 죽지 않고 살아서”(3:32) 시를 쓴다. 나는 언니의 죽음과 어머니들의 목관에 대하여 “더듬거리며 고백할 수 있을 뿐”(1:117)이지만 “나는 최소한의 언어로 모든 것을 누설하고 최대한의 언어로 무의미에 도달”(3:54)하고자 한다. 거짓에 대한 두려움과 “가장 큰 중력이 만드는 침묵”(4:61) 앞에서 “그런데도 할 말이 있”(4:156)는 시인이 되고자 한다. 거짓 속에 진실을 담은 “소설을 마저 쓰”(4:147)고자 한다. “세계가 하나의 작은 성냥갑이라는 걸 긋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딱딱한 어둠에 불과하다는 걸”(3:124) 인식하고 성냥 긋기를 멈추지 않는 것. 곧 꺼지고 말 불꽃의 섬광이라 하더라도 상자의 어둠을 사르고 목관의 뿌리에 불 밝히는 일. 호흡이 살아있음을 말하는 일. 살아있음을 저항이라 말하고 얼굴 없는 목소리를 기억하는 일. 아가멤논, 남성 폭력의 지속을 암시하는 백은선의 시쓰기이다.


우리는 혼종에 대한 혼종, 일종의 갈망에 대해 말하려고 하는 것 같다.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겠지만 이것은 사라진 마을에 대한 복기이고, 그 마을의 나무 아래 있던 돌에 대한 나의 생각이다. 이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돌은 어디에나 있고 우리는 그것을 안다.

― 「도움의 돌」 부분(1:209)



0. 사라진 마을의 나무 아래 돌이 있다








계간 『문학들』 2024년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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