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장: 꽃의 도시와 지옥의 장부

초록색 탁자의 마법 / 지옥을 피하는 기술, ‘환어음’ / 복식부기

by 이재인


초록색 탁자의 마법



재인아.

성전 기사단이 프랑스 왕의 화형대에서 재가 되어 사라진 후, 유럽의 돈은 알프스산맥을 넘어 이탈리아로 흘러들었단다. 갈 곳 잃은 돈은 물과 같아서, 가장 흐르기 좋은 곳을 찾아 모이게 마련이지. 그곳이 바로 피렌체, 베네치아, 제노바 같은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이었어.


이번 생의 나는 피렌체의 아르노 강 위, 그 유명한 베키오 다리(Ponte Vecchio) 위에서 장부를 정리하던 '비앙카'였단다. 내 주인은 훗날 피렌체의 주인이 될 메디치(Medici) 가문의 초석, 조반니 디 비치(Giovanni di Bicci de' Medici)였지.


자, 오늘 이야기는 아주 사소한 가구 하나에서 시작해야겠다. 네가 매일같이 드나드는 '은행(Bank)'이라는 단어가 가진 진짜 출생의 비밀에 대해서 말이야.


재인아, 지금 당장 눈을 감고 14세기의 베키오 다리를 상상해 보렴.

우아한 관광지가 아니야. 그곳은 피렌체의 '내장'과도 같은 곳이었어. 좁은 다리 위에는 푸줏간, 가죽 무두질 공방, 그리고 환전상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지. 강물 위로는 썩은 고기 냄새와 가죽 약품 냄새, 그리고 돈 냄새가 뒤섞여 올라왔단다.

그 혼란스러운 다리 한복판에, 환전상들은 긴 나무 의자를 하나씩 놓고 앉아 있었어. 이탈리아어로 이 긴 의자나 탁자를 '반코(Banco)'라고 불렀지.

상인들은 이 반코 위에 반드시 '초록색 천(Tavola Verde)'을 깔아두었어. 왜 하필 초록색이었을까? 멋을 부린 게 아니야. 금화나 은화, 구리 동전이 굴러다닐 때 눈에 가장 잘 띄는 색이 초록색이었기 때문이지. 또한 장시간 돈을 세야 하는 환전상의 눈이 피로하지 않게 하려는 목적도 있었단다. 오늘날 카지노의 도박 테이블이나 당구대가 초록색인 이유도 바로 여기서 유래한 거야.

사람들은 그 초록색 탁자 뒤에 앉은 사람들을 '반키에리(Banchieri, 반코 벤치에 앉은 사람)'라고 불렀어. 이게 바로 오늘날 너희가 부르는 '뱅커(Banker)', 즉 은행가의 시초란다.


그렇다면 이 반키에리들은 대체 무슨 일을 했을까? 단순히 돈을 바꿔주는 일? 아니, 그보다 훨씬 복잡하고 머리 아픈 일이었어.

당시 유럽은 그야말로 '화폐의 춘추전국시대'였단다. 피렌체에는 피오리노(Fiorino) 금화가 있었고, 베네치아에는 두카트(Ducat)가, 프랑스에는 에퀴(Écu)가, 영국에는 파운드(Pound)가 있었지. 심지어 작은 영주들도 제멋대로 불순물이 섞인 은화를 찍어냈어. 시장에 온 양털 상인은 주머니에서 수십 종류의 동전을 꺼내 놓았지. "이 밀라노 은화 50개와 프랑스 에퀴 3개로 피렌체 금화 2개를 주시오."

일반인은 도저히 계산할 수 없는 난제야. 이 동전의 순도가 얼마인지, 무게가 줄어들지는 않았는지, 지금 환율은 얼마인지를 순식간에 판단해야 했으니까. 반키에리들은 저울과 시금석(금의 순도를 확인하는 돌), 그리고 머릿속의 환율표를 이용해 이 복잡한 돈들을 정리해주는 '해결사'였던 셈이지.


하지만 재인아, 이 시스템에는 아주 잔인한 규칙이 하나 있었단다. 반키에리가 된다는 건, 자신의 목숨과 전 재산을 거는 도박이었어.


어느 날이었지. 내 옆자리에서 장사하던 '루이지'라는 환전상이 있었어. 그는 욕심이 많아서 고객이 맡긴 돈을 가지고 무리하게 선박 무역에 투자했단다. 그런데 그 배가 폭풍우를 만나 침몰해버린 거야. 다음 날 아침, 소문을 들은 예금주들이 떼로 몰려왔어.

"내 돈 내놔! 내 금화 돌려달란 말이야!" 루이지는 사색이 되어 벌벌 떨었지. 돈은 이미 바닷속으로 사라졌는데 무슨 수로 갚겠니.

그러자 피렌체의 상인 조합(길드) 집행관이 커다란 도끼를 들고 나타났어. 사람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집행관은 루이지가 앉아 있던 그 '반코(나무 벤치)'를 도끼로 내리찍었단다.

콰직! 나무 벤치가 두 동강이 나고, 그 위에 깔려 있던 초록색 천은 찢겨 나갔어. 동전들이 바닥으로 굴러떨어졌지. 이것은 단순한 기물 파손이 아니었어. 사회적 사형 선고였지. "너는 이제 신용을 잃었다. 다시는 이 도시에서 돈을 만질 수 없다."

이탈리아어로 '부러진'을 '로타(Rotta)'라고 해. 즉, '반코 로타(Banco Rotta)'. 부러진 벤치. 이 말이 알프스를 넘어 영국으로 건너가서 '뱅크럽시(Bankruptcy)', 바로 '파산'이라는 단어가 된 거야.

나는 찢겨 나간 루이지의 벤치를 보며 등골이 서늘해지는 걸 느꼈어. 자본주의라는 시스템은 실패자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아. 벤치를 부수고, 이름을 지우고, 영원히 추방해버리지.


그날 밤, 나는 주인 조반니 디 비치에게 물었어. "나리, 우리 벤치도 언젠가 저렇게 부러질까요?"

조반니는 낡은 가죽 장부를 쓰다듬으며 조용히 말했단다. "비앙카, 벤치가 부러지지 않게 하려면, 벤치 위에 돈을 올려두면 안 된다. 돈은 이 장부 속에 있어야 해."

그는 알고 있었어. 눈에 보이는 금화는 위험하다는 걸. 도둑맞을 수도 있고, 루이지처럼 무모하게 쓸 수도 있으니까. 메디치 가문은 그때부터 '눈에 보이는 돈'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돈'을 다루기 시작했어.

사람들이 무거운 금화 자루를 가져오면, 조반니는 그것을 금고 깊숙이 넣고는, 장부에 깃펜으로 숫자를 적었단다. 그리고 고객에게는 종이 한 장을 써주었지. "이 종이를 가져오면 언제든 금화를 내어주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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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케터 출신 비즈니스 시스템 설계자, 비즈니스 개발 및 기획 컨설턴트. 제3차 세계대전이 터져도 알라딘 앱을 켤 독서광. 13년 이상 일하며 배우고 느낀 바를 글로 남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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