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장: 안개 낀 항구의 괴물

리디아의 유령과 주식회사 / 튤립 버블 / 불멸하는 자본

by 이재인



리디아의 유령과의 재회, 주식회사의 탄생


재인아. 피렌체의 화려한 태양이 저물고, 나는 춥고 축축한 북쪽 바다로 넘어왔단다. 17세기 초, 암스테르담. 이 도시는 냄새부터가 달랐어. 썩은 청어 냄새, 젖은 밧줄 냄새, 그리고 짙은 안개 속에 섞인 향신료 냄새가 진동했지.


이번 생의 나는 항구 근처 선술집에서 장부를 정리해주던 '흐레타(Greta)'였어. 네덜란드는 참 기묘한 나라였단다. 땅은 해수면보다 낮아서 언제 물에 잠길지 모르고, 자원이라곤 진흙과 바람뿐이었지. 그런데도 이 조그만 나라가 전 세계 바다를 지배하고 있었어.

비결이 뭐냐고? 바로 '죽음을 나누는 기술' 때문이었지.

당시 동인도(인도네시아)로 배를 띄우면 후추와 육두구를 가득 싣고 돌아올 수 있었어. 수익률이 무려 300%였단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지. 배가 돌아올 확률이 반반도 안 된다는 거야. 폭풍우, 해적, 괴혈병... 배 한 척에 전 재산을 몰빵한 상인은 배가 침몰하면 그대로 알거지가 되어 암스테르 강에 투신하곤 했어.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 항구의 선주들이 모인 회의장에 낯선 남자가 나타났단다.

큰 키에 핏기 없이 창백한 피부, 그리고 무엇보다... 서늘할 정도로 투명한 호박색 눈동자. 그는 자신을 '발레리우스(Valerius)'라고 소개했어. 아주 부유한 투자자라고 했지. 하지만 재인아, 나는 그 눈을 보자마자 등골에 소름이 돋았어.

기억나니? 내가 3장에서 리디아의 동전 이야기를 했을 때, 왕에게 동전을 만들라고 속삭였던 그 사내. 5천 년을 살면서 내가 몇 번 마주쳤던 그 '숙적'. 그가 돌아온 거야. 수천 년이 지났는데 늙지도 않고, 오히려 더 젊고 세련된 모습으로.


그 남자가 네덜란드 상인들 앞에 서서 말했어. "신사 여러분, 왜 혼자서 모든 위험을 감수하십니까? 배가 가라앉으면 당신들의 인생도 가라앉지 않습니까?"

상인들이 웅성거렸어. "그럼 어쩌란 말이오? 위험이 없으면 이익도 없는 법인데."

그 남자가 얇은 입술을 비틀며 웃더구나. 그 미소는 악마처럼 매혹적이었어. "위험을 잘게 쪼개십시오. 빵을 부스러기로 만들듯이."

그가 제안한 건 혁명이었어. 아니, 악마의 계약이었지. 이전까지는 상인 몇 명이 돈을 모아 배 한 척을 샀어. 이건 '동업'이지. 하지만 그 남자의 제안은 달랐어.

"거대한 회사를 하나 만듭시다. 그리고 그 회사의 소유권을 수만 개의 종이 조각으로 나누는 겁니다. 당신은 배를 사는 게 아니라, 이 '종이 조각(Aktie, 주식)'을 사는 겁니다. 배가 침몰해도 당신은 종이 조각만큼만 돈을 잃습니다. 하지만 배가 성공하면? 종이 조각의 개수만큼 배당금을 받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류 최초의 주식회사,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VOC)의 탄생 순간이었어. 그리고 '유한책임(Limited Liability)'이라는 괴물이 태어난 날이었지.


재인아, '유한책임'이 왜 괴물이냐고? 과거에는 빚을 지면 내 목숨, 내 아내, 내 자식까지 팔아서 갚아야 했어. 책임이 '무한'했지. 하지만 주식회사는 달라. 회사가 망해서 수천 명이 죽거나 빚더미에 앉아도, 주주는 딱 자기가 투자한 돈까지만 손해를 보면 끝이야. "나는 주식만 샀을 뿐, 경영에는 책임이 없다." 이 얼마나 달콤하고 무책임한 면죄부니?


발레리우스, 아니 그 남자는 항구 구석에 앉아 사람들이 미친 듯이 주식 청약서에 서명하는 걸 지켜보고 있었어. 나는 떨리는 손으로 그에게 맥주를 가져다주었지.

"오랜만이군요." 내가 용기를 내어 말했어.

그가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어. 호박색 눈동자엔 세월의 흔적조차 없더구나. 그는 나를 알아보는 듯했어. 아니, 정확히는 내 안에 있는 '오래된 영혼'을 알아봤지.

"또 만났군, 할머니. 아니 이번엔 아가씨인가?" 그의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어.

"이번엔 무슨 짓을 꾸미는 거야? 리디아에서는 사기를 쳐서 동전을 만들더니, 이번엔 종이 쪼가리로 뭘 하려는 거지?"

그가 맥주 거품을 불며 나직이 속삭였어. "나는 인간에게 영생을 선물하려는 거야."

"영생?"

"그래. 인간은 100년도 못 살고 죽지. 그래서 부를 축적하는 데 한계가 있어. 하지만 내가 만든 이 '법인(Corporation)'은 죽지 않아. 주인이 바뀌어도, 직원이 죽어도, 회사는 영원히 살아남아 돈을 먹어치우지. 어때? 나를 닮지 않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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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케터 출신 비즈니스 시스템 설계자, 비즈니스 개발 및 기획 컨설턴트. 제3차 세계대전이 터져도 알라딘 앱을 켤 독서광. 13년 이상 일하며 배우고 느낀 바를 글로 남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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