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른쪽 문이 열리고 2분 후엔 왼쪽 문이 열린다.
내가 움직일 시간이다.
주섬주섬 일어나 사람들 사이를 빠져나간다.
지하철은 시간을 낭비해야 하는 괴로운 공간이다.
지하에서는 날씨의 변화나 길거리 사람들을 관찰할 수도 없다.
이 공간은 서울에서도 밀도가 가장 높겠지만,
어깨를 붙인 서너 명이 무얼 하든 스마트폰으로 자신만의 공간을 지켜낸다.
책을 가지고 다닌다.
집 여기저기에 쌓인, 펼쳐 보이지 못한 책들을 더 이상 무시할 수 없어서.
아니, 지하철에서의 시간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서.
아니다. 스마트폰만 들여다보는 사람들에게 책 읽는 모습을 과시하기 위해서.
네댓 개의 문단을 넘어갈 때마다 불안한 마음으로 고개를 든다.
때때로 타이밍을 놓쳐 어느 역인지 한동안 알 수 없을 때도 있다.
전광판이 제 역할을 하는 건지 의문이다.
나는 나의 역할을 잘하고 있는 걸까.
전광판은 집중력을 잃게 하지만 덕분에 졸음을 이겨내 다시 책에 집중하게 만든다.
전광판은 제 역할을 다하고 있다.
오늘도, 지금은 자정이 지났기에 실제로는 어제이지만, 얇은 책을 한 권 샀다.
지금 이 글을 써서 곧 업로드를 하는 것도 그 책과 지하철에서의 시간 덕분이다.
사실 잠을 기준으로 어제와 오늘을 나누는 게 나에겐 더 합리적인 일이다.
내가 시간을 다루는 것이 중요하다.
지하철에서 읽을 책은 얇은 게 중요하다.
가방의 무게를 줄이려, 제한시간 안에 읽어야 한다는 부담감을 줄이려.
두꺼운 책의 앞부분만을 간신히 읽어내는 사람으로 보이지 않으려.
웃기게도 지하철에 사람이 너무 없으면 책을 잘 읽지 않는다.
무릎에 책을 펴놓고 스마트폰을 들여다보아도 비웃을 사람이 없기 때문일까,
내가 그들보다 잘 낫다는 허영을 채울 수 없기 때문일까.
집에서는 읽지 않는 책을 꾸역꾸역 가방에 집어넣는 이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