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체적이니까 아니었던 이야기
아내가 일본인인 친구A가 있다. 처음 A와 알게 된 시기에는 그냥 이런 친구가 있구나 신기했던 정도였으나, 아내의(당시는 여자친구) 상냥한 모습을 보니 나도 일본인 여자친구를 사귀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A에게 열심히 잘 보인 결과 A의 결혼식 다음날 A와 그의 아내 그리고 아내의 친구(이하 B)까지 함께 만나는 자리가 생겼다.
일본어에 능숙하지 않았던 나는 그래도 학교에서 한문을 가르치는 사람이었기에 한자를 웬만큼 알고 있었고, 틈이 나면 이면지를 주워다가 일본어 깜지를 쓰는 정도로 최소한의 공부는 하였기에, 처절하게 있는 드립, 없는 드립 다 쳐가며 B에게 나를 각인시키고자 노력하였다.
만남이 끝날 무렵 보통은 예상 가능한 라인 아이디 교환식은 없었고! 대신 나는 인형 하나를 꺼내 B에게 선물로 주었다. 왜냐면 어차피 다시 보게 될 인연이라면, 다음에 구면일 때 라인 아이디를 물어보면 되니까.
A를 통해서 B는 내가 준 인형을 굉장히 맘에 들어하였고, 나를 좋은 사람이라고 평가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몹시 뿌듯했다. 뭔가 좋은 일을 기대해도 될 줄 알았다.
몇 달까지 갈 것도 없이 다음 기회는 내가 설계하였는데, 겨울방학 때 일본에 직접 가기로 한 것이다. 사실 혼자 일본에 가본 적은 없었기에 A부부를 통해 B에게 가이드를 부탁하고자 한 것, 다행히도 B는 제안을 수락했고 그렇게 라인으로 연락할 수 있게 되었다. 보통 일본인들은 친구나 연인 사이에도 답장을 며칠마다 한 번씩 하기도 한다는데, 무려 하루에 두 번 답장이 오기도 했다! 이쯤 되면 더욱 뭔가 잘 될듯한 분위기이다.
방학이 시작되고 도쿄 모처에서 혼자 관광을 마친 나는 여행 둘째 날 B를 만나게 되었다.
상냥한 미소와 친절함... 이국의 도시 속에서 나는 낭만에 취해가고 있었다. 그녀가 대접하겠다던 식사도 내가 계산했다. 선물이 빠지면 섭섭하지, 한국에서 가져간 작은 토끼 레고도 선물했다. 이대로 오늘 하루 잘 보내면 더욱 좋은 관계로 남지 않을까!
같이 도쿄타워도 보고, 오다이바의 유니콘 건담도 보고, 긴자에서 맥주도 한잔씩 했다. 내가 전철을 타는 입구까지 같이 동행해준 그녀는 다음엔 한국에서 만나자며 나에게 핸드폰 화면을 보여주었고, 거기엔
[한국어 가르쳐 주세요]
라고 적혀있었다. 아무렴! 가르쳐주고 말고!
그렇게 숙소에 돌아온 나는 행복한 단잠에 들었고 다음날 무사히 귀국했다. 자, 이 무렵은 작년 2월의 이야기이다. 과연 현재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나는 솔로다...!
그녀와 사귀는 것까진 됐는가? 아니다.
아 뭐야 이 맥 빠지는 얘기는...
내막은 이러하다. 사실 도쿄에서 그녀를 만나고부터 계속 걸림돌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나는 일본어를 거의 모르고, 그녀도 한국어를 거의 몰랐다는 것이다.
내가 짬짬이 공부한 일본어는 현지인에게 공부 조금 하셨네요 정도를 들을 수는 있었으나, 즉각적이거나 심도 깊은 대답을 하기엔 무리였고, 같은 말을 해도 뉘앙스에 따라 묘하게 분위기가 바뀌기 마련인데 풍부한 전달력 따위는 애초에 기대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물론 번역기를 사용하면 소통은 가능하지만 그것은 정말 임시방편이었다. 번역기를 사용하는 그 시간 동안 이루어지는 침묵은 누적되면 충분히 긴 시간이었기 때문에... 이것은 막연할 때는 몰랐던 구체적인 상황에서 느낀 한계같은 것이었다.
내가 한국에 돌아오고도 그녀와 한동안 대화는 지속되긴 했다. 그러나 오래 알고 지낸 사이도 아니었던 이 두 사람을 계속 붙잡을 뭔가는 없었고, 서서히 꺼져가는 장작처럼 시간이 흐르며 또 각자의 나라에서 생업에 신경을 쓰게 되면서 그 연락은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약간의 미련이 첨가된 연락을 보내봤자 잠깐 뛴 맥박은 곧 멈추게 되었다.
A에게 말했다.
"초반에는 진짜 긍정적으로 그녀와의 관계를 생각했는데, 현지에서 직접 만나면서 뭔가 구체적인 면모가 보이니까 쉽지 않더라고, 그걸 그녀도 분명히 느꼈을 거야"
A 또한 나에게 말했다.
"시도는 좋았잖냐"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떠올랐다면 100% 틀린 말은 아닐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내 인생에서 꽤나 손꼽히는 일화가 되었고, 도전은 그 자체로도 멋지기에 흑역사로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인생에는 부딪혀 봐야 깨닫는 것들이 많고, 누군가는 부딪히고 나서 깨지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격파에 성공하고 오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 어떤 도전을 하든 막연한 상황이나 구체적인 상황이나 긍정의 힘이 발휘되길 지금의 나는 바란다. 적어도 나에게 예지력이 생기지 않는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