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심 없이 과거를 바라보기

무라카미 하루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by 독당근


"그렇지만 참 이상해." 에리가 말했다.


"뭐가?"


"그렇게 멋진 시대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게. 온갖 아름다운 가능성이 시간의 흐름 속에 잠겨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


쓰쿠루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 무라카미 하루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





쓰쿠루는 대학교 2학년 여름방학, 고교시절부터 아주 가까웠던 친구들에게 더 이상 만날 수 없다는 통보를 받는다. 그는 제대로 된 설명을 듣지 못한 채 이를 받아들여야 했고, 그로 인해 죽음의 문 턱까지 가는 어두운 시기를 보내게 된다. 다행히도 무사히 그 시기를 지나간 쓰쿠루는 36살의 직장인이 되었다. 어느 날 우연히 여자 친구에게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자신과 친구들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그녀는 그의 마음속에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는 것 같다고 말한다. 그 역시 이를 인정하고 어째서 그런 식으로 단호하게 버림받을 수밖에 없었는지 이유를 알기 위해 친구들을 한 명씩 찾아간다.

이 소설은 동 저자 무라카미 하루키의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를 읽다가 알게 되었다. 하루키가 소설을 쓰는 것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이 소설을 짧게 언급하였지만 아주 강렬하게 다가왔다. 당장 읽어보고 싶다는 마음에 곧장 도서관에 가서 빌려보았다.

그 강렬한 느낌은 쓰쿠루의 욕망과 나의 욕망이 일치하면서 만들어진 것임을 책을 모두 읽고 덮은 뒤 알게 되었다. 과거에 나를 둘러싼 사건에 대해서, 설명할 길 없는 나의 마음에 대해서 알고 싶은 것이다. 탐정소설과 같이 미스터리를 속속들이 낱낱이 파헤치고 싶다는 마음은 없지만(그렇게 대단한 과거를 가진 사람은 아니다) 그래도 가끔 잠이 오지 않는 새벽엔 납득하기 힘든 나의 말과 행동 그리고 누군가의 얼굴이 떠오르곤 한다. 그럴 때면 나는 혹은 그 사람은 왜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는가를 생각한다. 거기엔 '인간이 가진 한계'라는 답 밖엔 할 수 없다.

누구나 아름다운 순간을 마음속에 품고 있다. 그것이 십 대 시절의 것이라면 더없이 찬란하고 순수하게 느껴진다. 영원했으면 하는 그런 순간들을 떠올리면 마치 내가 백발의 노인이 된 기분에 울적해진다. 하지만 우리는 시간의 흐름을 거슬러 갈 수 없다. 그 기나긴 물줄기에 떠밀려 가는 사람과 순순히 내맡기는 사람만 있을 뿐 가만히 버틴다고 흘러가지 않는 건 아니다.

지금의 내가 성숙해졌다고 그때의 나를 더 잘 이해한다고 할 수 있을까. 오히려 어린 나를 떠올리면 더욱 어려운 사람처럼 느껴진다. 더 이상 나라고 부르기도 낯선 수수께끼 같은 존재이다. 오히려 나를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옛 친구들이 그때의 나를 더 잘 알지 않을까?

쓰쿠루를 만난 옛 친구들은 그가 기억하는 자신과 전혀 다른 자신에 대해서 알려준다. 아마 나의 옛 친구들 역시 그때의 내가 어땠는지 또 나를 어떻게 느꼈는지 물어본다면 친절하게 알려줄 것이다. 하지만 선뜻 물어보기가 두렵다. 그때의 나를 썩 좋아하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그런 궁금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깊이 삼켜내곤 한다.


나는 늘 모든 걸 지워버리고 새롭게 시작하고 싶어 한다. 불가능하다는 걸 잘 알면서도 말이다. 그건 쓰쿠루만큼 용기가 없어서 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언젠간 내 안에서 그러한 의지가 나타날 날이 반드시 올 것이라 생각된다. 그렇게 된다면 쓰쿠루와 같이 무모한 여정을 떠날 수 있게 될 것이다. 머나먼 핀란드라 할지라도.

이 소설은 어른이 되는, 삶에서의 어떤 단계를 지나가는 과정을 섬세하고도 잔인하게 보여준다(잔인하다는 건 순전히 내 생각이다). 나 역시 거쳤던 그 변화는 얼마나 큰 고통이 따랐었는지 다시 상기시켜준다. 어느 하나 쉽게 얻어진 게 없구나 싶다.


이 책에서 계속 언급되는 리스트의 <순례의 해>를 들으며 다쓰루와 그 친구들의 얼굴을 하나씩 떠올려본다. 가슴 한구석이 먹먹해진다.

그리고 에리가 한 말은 떠올려본다.
'온갖 아름다운 가능성이 시간의 흐름 속에 사라져 버린다는 것'


이러한 말에 저항심이 들지 않는 게 어른이 되었다는 증거이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