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치 모임에 빠지면 섭섭할 내가 길치 인생의 대표적인 에피소드를 몇 가지 소개해보려 한다.
Episode.1 퇴장은 커튼 뒤에 숨어
학창 시절 피아노 콩쿠르 대회를 자주 나갔다. 피아노는 내 생활의 낙이었고, 웅장한 무대 위에서 나의 피아노 선율로 공연장의 공기가 채워질 때면 희열을 느꼈다. 모든 관중의 눈은 예쁘게 차려입은 나의 모습에, 그들의 귀는 흘러가는 나의 피아노 선율에 집중되었다.
짝짝짝. 내가 무대에 등장할 때면 관중들은 응원의 박수를 보내준다.
떨리는 마음을 붙잡고 경건히 인사를 한 후 피아노 의자에 앉아 실수 없이 무대를 마쳤다. 만족스러웠다.
그리고 이제 남은 것은 멋있게 인사하고 퇴장하는 일.
그런데 길치인 나는 퇴장하는 길을 모른다. 분명 무대 밖에서 스태프분이 퇴장하는 길을 알려주셨지만 무대 안에 서있는 지금, 나는 어디가 어디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내 연주 순서가 끝이 났고 다음 연주자를 위해 얼른 퇴장을 해주어야 하는데 퇴장 방법을 모르니..
당시 나의 목표는 다음 연주자를 위해 무대 위에서 내 모습을 감추는 것이었고, 내 눈에 띈 것은 바로 무대 뒤쪽에 설치되어있던 커튼이었다.
나는 멋지게 퇴장 인사를 하고는 다름 아닌 무대 커튼 뒤로 내 몸을 숨겼다. 그리고 커튼 뒤에서 꽃게처럼 옆으로 무대장을 빠져나왔다. 커튼을 펄럭 펄럭거리면서.
그래도 벨벳 소재로 된 주름 많은 커튼이었으니 그나마 움직임이 덜 돋보이지 않았을까..? 실크 소재가 아닌 게 어디야.
일반적인 피아노 무대. 나는 저 빨간 커튼 뒤로 무대 밖을 기어 나갔다.
이런 일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수 차례 같은 무대에 섰고, 피아노 선생님도 몇 번이고 퇴장하는 길을 알려주었지만 그때뿐이었다. 연주를 마치고 나는 또 커튼 뒤에 숨어 꽃게가 되어 퇴장을 했다. 아, 가끔은 다음 무대 연주자를 기다렸다가 같이 퇴장하기도 했다.(일면식도 없는 사이인 우리)
덕분에 나는 대회 때마다 피아노 연주에 대한 불안이나 걱정은 없었고 흔한 실수 한 번 하지 않았다. 그 보다 내 머릿속을 더 지배한 불안과 걱정은 제대로 퇴장하는 것이었으니.
Episode 2. 급한 일이 생겨서요..
대학생 때 다양한 활동을 해보고 싶었던 나는 서포터즈, 봉사활동 등의 대외활동의 문을 자주 두드렸다. 서류 합격 후엔 으레 면접을 보러 갔다.
그때의 나는 지도 어플도 잘 볼 줄 몰랐고, 'ㅇㅇ역 1번 출구에서 첫 번째 골목을 끼고 파란 집.' 이런 글들이 너무 싫었고 두려웠다. 헤멜 확률이 95.9999%였기 때문에.
첫 번째 골목은 어딜 말하는 건지, 골목을 끼는 건 또 뭔지.
열심히 이력서를 적고 서류통과를 했지만 면접장을 찾지 못해 면접을 못 본 활동들도 수두룩하다.
면접 시간이 다되어도 나타나지 않는 나에게 전화를 걸어주는 곳도 더러 있었다. 그때마다 나는 거짓말을 해야 했다. '길을 못 찾아서요..'라고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았고, '급한 일이 생겨서 못 갔어요. 미리 말씀 못 드려 죄송해요..'라고 변명을 했다. 한두 살 먹은 어린아이도 아닌데 길을 못 찾아서 면접을 못 본다는 게 너무 부끄러웠으니까.
정말 다행히도 취업 면접장은 잘 찾아갔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도 놓쳐서 아쉬운 활동들이 여럿 있다.
Episode 3. 운전은 잘하는데..
성인이 된 후, 나도 운전면허를 따기로 결심했다.
야심 차게 운전면허 필기시험 문제집을 샀고, 시험 하루 전날 밤 문제집을 속독했다.
점수는 93점. 아주 가볍게 합격했다.
그리고 장내기능시험. 가뿐히 통과했다. 운전은 내 체질인 것만 같았다. 선생님은 나더러 주차도 잘한다며 칭찬해주셨다.
그리고 마지막 도로주행이 남았다.
A, B, C, D 코스가 있었고 도로주행 시험 당일에 내가 가야 할 코스가 정해진다.
나는 직감했다. 여기서 떨어질 것을.
늘 지나다니던 길이었지만 거기가 거기 같고, A코스와 B코스의 다른 점도 모르겠더라.
어찌 됐든 도로주행에서 내가 당첨됐던 코스는 B코스였고 브레이크를 풀고 안정적인 출발을 했다. 그리고 얼마 가지도 않아 '실격'.
운전도 굉장히 잘했는데.
이유는 '경로를 이탈하였습니다.'
코스를 잘못 갔다. 코스를 잘못 가면 실점이 아닌 바로 '실격'이었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보조석에 탔던 감독관과 자리를 바꿔 시험장으로 돌아갔다.
나의 첫 번째 도로주행 시험은 그렇게 허무하게 끝이 났고, 포기하지 않고 두 번째 시험을 봤다.
두 번째도 떨어졌다.
이유는 '경로를 이탈하였습니다.'
또 경로 이탈.
그리고 세 번째 도로주행.
실격
마찬가지로 '경로를 이탈하였습니다.'
도로주행에서 세 번을 떨어지니 멘탈이 흔들렸다. 심지어 점수 미달도 아닌 경로 이탈로 인한 실격이었기 때문에 허무하기도 하고 돈이 아깝기도 했다.
도로주행 시험 비용도 적지 않았기 때문에 부모님께 또 부탁을 드리기엔 내 양심에도 가책을 느꼈고, 비용이 부담스러웠던 나는 그 길로 네 번째 도전은 하지 않았다.
모르지만 아마 네 번째로 도전했어도 도로 중간에 보조석 감독관과 자리를 바꿨을 것 같다.
그 후로 운전면허는 따야 한다던 부모님도 더 이상 나에게 운전에 대한 언급은 하시지 않으셨다.
그래도 한 가지 위안을 삼자면 감독관께서는 도로주행에서 세 번 떨어진 나에게 '그래도 운전은 잘해.'라고 말해주셨다는 거.
그래. 난 길을 모르지만 운전은 할 줄 아는 학생이야.
라고 마지막 위안을 삼으며 운전면허와는 정을 뗐다.
그 외에도 많다.
-수 백번 맴돌았던 우리 동네이지만 방향만 바뀌면 새로운 동네로 바뀌는 기적
-이마트에서 장을 보고 출구를 찾는데 걸리는 시간 최소 5분
-반대 방향의 버스를 타서 낯선 동네 산책하길 여러 번
-여러 번 가봤던 곳이지만 처음 오는 척해야 했던 나날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젠 지도 어플을 볼 줄 안다는 것. 이후로 카카오맵은 내 그림자와도 같은 존재가 되었다.
동서남북 방향은 잘 모르지만 내가 움직일 때마다 방향을 잡아주니 너무 고맙다.
Epilogue. 길치여서 좋은 점
1. 어떤 장소든 늘 새롭다. 지루함이 없다.
2. 내 곁에 늘 누군가 함께해준다. 걷는 길이 외롭지 않다(ㅎㅎ).
걸어 다니는 지도 내 남편
길치로서 마지막 한마디,
길을 모르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다만 알려고 노력하지 않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