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속 요정 우솜돌

by 싸지타

‘숲속 요정 우솜돌’은 작년 4월 동물메디컬센터 건물 앞 작은 가로수길을 우솜돌과 함께 걸으면서 떠올렸던 제목이다. 그 당시 약간의 비가 내렸고 흙길은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우솜돌은 풀숲에 코를 들이밀고 냄새를 맡다 대학 측에서 심어 놓은 밭작물이 있는 곳으로 가려 고집을 피었기에 나와 잠시 실랑이를 벌이기도 했다. 밭 주변에는 내가 질색하는 제초제를 뿌려놓아 어쩔 수 없이 나는 우솜돌을 안아 들고 건물 입구까지 와야만 했다. 들쳐 업고 오는데도 냄새를 맡고 싶다며 내려달라 발버둥을 쳤다.


산책을 하는 개들을 관찰하다보면 각기 나름대로 여러 성향을 가지고 있다. 불도저처럼 과감하게 직진하는 스타일이 있는 반면 탐색에 집중하는 아이들도 있어 여러 아이들과 산책을 할 때에는 발걸음에 균형을 맞추려 애를 쓴다. 그 중에는 탐색과 나아감을 다른 아이들에 맞춰 스스로 조절하는 아이도 있기에 산책 스타일은 실로 다양하기만 하다. 우솜돌은 초반에 냄새 맡기에 집중하고 후반에는 걷는 스타일인데 그날만큼은 수술한 부위에 통증을 느끼는 터라 걸음이 느렸고 봄비가 내려 수분이 가득한 풀숲이 있는, 대학이라는 장소를 눈치 챘는지 나름 학습(?)에 열중하는 분위기였다.


무르익은 4월은 작은 풀꽃의 계절이다. 민들레 홀씨가 비행을 준비하고 봄까치가 지천이었다. 노란 애기똥풀과 파란 쑥이 쑥쑥 자라고 괭이밥, 고들빼기도 보인다. 꽃마리가 하늘거리는 틈새로 얼굴을 불쑥 들이밀고 온갖 냄새를 맡고 있는 아이를 보고 있자니 애석함과 동시에 본능처럼 미소가 솟구친다. 슬픔과 기쁨. 인간에게 두 개의 감정이 동시에 존재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때의 감정은 어쩌면 슬픔에 기울어진 기쁨 정도이지 않을까 싶지만. 솔직히 그 당시 나는 화사한 계절을 제대로 느낄 수 없었다. 현재 우리가 함께 있어 충분하다는 생각보다는 미래에 다가올 이별이 두렵고 아프게 느껴지기만 했다.


언젠가 집 앞 화단에 동박새가 날아온 적이 있다. 새는 그저 노닐다 가지를 흔들고 떠나버렸음에도 슬픔을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기쁨과 찬탄이 남았다. 작은 몸을 아우르는 아름다운 풀빛 색깔과 눈 주변의 동그린 테두리가 신비하게 느껴져 나는 그만 “히야!” 소리를 냈다. 이러한 마음 상태에 이를 수는 없는 것일까? 물론 아무리 마음을 닦아도 그러한 심경에 이르지 못할 것만 같다. 14년을 함께한 아이를 영원히 소유하려는 마음이나 혹은 내가 가진 무언가를 잃어버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부재의 아픔을 느낀다. 아픔이 아스라해질 때까지 여전히 시간이 걸릴 것만 같다. 우솜돌은 자신이 태어난 좁은 경계 안에서 개로써 자신을 표현하고 떠났다. 인간인 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만의 삶을 표현하기 위한 일상에서의 언어와 몸짓과 행위들. 그 언어와 몸짓과 행위 속에는 웃고 떠들고 화를 내고 공감하고 쓰고 읽고 그리고 듣는 모든 것들이 있지만 우솜돌을 잊지 않기 위해 기록하는 이 순간도 담겨 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설움의 날을 견디면 머지않아

기쁨의 날이 오리니

현재는 언제나 슬픈 것

마음은 미래에 있고

모든 것은 순간이다.

그리고 지난 것은 그리워하느니라.”


어린 시절 안방에는 푸쉬킨이 쓴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란 시를 인쇄한 액자가 벽에 걸려 있었다. 누군가가 외울 수 있는 시가 있느냐 물어본다면 당연히 이 시를 읊조릴 수밖에 없다. 부모님이 피로에 곯아 떨어져 단칸방에 형광등을 켜둔 채 가족 모두가 잠든 어느 날, 나만 꼼짝하지 않고 잠을 깬 채 그 시를 읽고 또 읽었다. 특히 ‘그리고 지난 것은 그리워하느니라’라는 구절이 마음을 아리게 만들었다. 어쩐 일인지 어른이 된다는 것은 두렵고 가슴 아픈 일처럼 느껴져 목구멍까지 텁텁했다. 한편 푸쉬킨의 시는 무서운 예언일 수도 있다. 아이들은 떠나갔고 나는 지난 시절을 그리워한다. 지금에야 토성을 대표하는 시가 푸쉬킨의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라며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것만 같은데 그 당시에는 기쁨의 날이 온다고 해도 멀리하고 싶은 시였다.

브런치에 글을 연재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던 작년 4월. 작은 나무들 사이를 걷는 우솜돌을 바라보는 내 머릿속으로 어린 시절의 시가 떠올랐다. 나를 자책하는 것을 넘어 왜 이렇게 작고 순수한 아이에게 커다란 질병과 고통을 주는지 삶에 농락당하는 기분이었다. 기쁨의 날은 고사하고 지금 이 순간의 슬픔을 견디는 것마저 힘들었다. 가로수길을 조금 더 걸어가자 이번에는 분위기가 싹 바뀌었다. 머릿속에서 전기처럼 파지직 ‘판’이 등장했다.


메이져 타로 카드의 15번 악마는 ‘판’의 변형이다. 우솜돌은 판의 다른 모습이다. 생각해보면 재미있지 않은가. 황도 12궁 중 염소자리는 염소의 신인 판의 별자리이고, 티폰의 공격 때문에 급하게 물에 뛰어든 판이 얼굴은 염소인 채 다리만 물고기로 변했다는 설정은 아무리 생각해도 웃음을 안겨준다. 그리스-로마 신화가 남성들이 자행하는 강간의 문화이고 자신의 인생은 강간을 피하기 위한 투쟁이었다는 리베카 솔닛의 말에 공감하는 터라 그리스-로마 신화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웃었다. 웃음 짓는 아이 우솜돌은 통증이 심해지면서 더 이상 웃을 수 없었지만 웃음이란 숙제를 나에게 선물하고 떠나갔다.


숲속의 판, 숲속의 정령, 숲 속의 도깨비, 숲속의 요정. 숲속 요정 우솜돌은 이렇게 만들어졌다. 그런데 어느 날 별 생각 없이 ‘숲속 요정 우솜돌’에 관한 짧은 동화를 만들기 시작했는데, 이야기를 전개하면서 점점 엉뚱한 상황으로 빠져드는 등장인물들을 보며 이걸 어떻게 그럴 듯 넘어갈 수 있나 골몰하는 내 모습을 발견하자 계속 웃음이 나왔다. 의식이 현실을 창조한다는 말은 이러한 상황을 일컫는데 ‘우솜돌’이란 이름이 주는 마법은 여전히 진행 중인 셈이다. 또 수필로 만들 수 있는 글이 있는 반면 소설이나 동화로 완성한 작품들처럼 같은 소재라도 다르게 표현할 수 있는 장르가 있으며 용기만 있다면 무엇이든 시도해볼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우솜돌은 갓 낳은 어린 시절부터 독특한 아이였다. 어지러운 점박이 무늬에 못생겼고 성질이 괴팍했다. 시끄럽게 울며 난리를 떨다가도 즐겁게 장난을 치는 반면 우리 부부에게는 스스로를 매력적인 존재로 보이려 애썼다. 성질이 급한 편이어서 우스꽝스러운 사고도 많이 쳤고 질투와 경쟁심이 많아 누구보다 앞서가려 했다. 그러나 나와 단 둘이 산책을 할 때 우솜돌은 땅에 코를 박고 무언가에 깊이 흡수된 듯 했다. 내가 곁에 있다는 것에 안심하고 몸과 마음이 흙의 일부라도 된 것처럼 땅과 하나가 되어 탐색을 멈추지 않았다. 눈빛은 진지했고 가끔 주변을 흘끔거리다가도 이내 낙엽 덤불 사이에 코를 박고 또 나를 바라본다. 기다랗고 마른 솔잎 하나가 수염에 달라붙어 대롱거리는 것조차 모른 채 아주 고요히 자신만의 수행을 멈추지 않다 조용히 앉아 먼 곳을 응시한다. 그럴 때면 ‘늙은 그루’ 같은 느낌에 나도 그저 입을 다물고 조용해지는 것이다. 늙고 병들어 힘이 빠진 우솜돌의 침묵은 새로운 산책길을 끊임없이 탐색해왔던 우리들만의 세계를 매순간 완성한다.


개들이 코를 통해 세상을 인식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몰라 눈을 감고 바람의 냄새를 느끼려 애쓴 적이 있다. 비염이 심하지만 계절을 분명하게 인지할 수 있었다. 봄이 좀 더 일찍 찾아오는 계절에는 훈풍 속에서 동백꽃이 피는 머나먼 남쪽에서 보내오는 편지를 읽는 듯 착각이 들었다. 지금은 2월이 지나가고 있다. 바람은 서쪽에서 불어온다. 동시에 얼어 있던 강 주변의 비릿한 개펄 내음이 희미하게 퍼져온다. 강변을 걷다보면 가끔 샴푸와 세제, 락스가 섞여 물밑 어딘가에서 썩어가는 냄새가 난다. 바람은 차갑고 세차지만 땅이 녹고 있다. 마른 억새 사이로 장끼가 큰 소리로 울며 날아가고 물새 떼들이 모래톱 위에서 옹송그리며 흐르는 물결을 바라본다. 뚱뚱한 갈매기가 바람에 밀려 애드벌룬처럼 떠간다. 곧 춘분이 다가온다. 어쩌면 자연에서 풍겨오는 냄새는 시간의 다른 이름인지도 모른다. 우솜돌에게 그 시간은 자신이 지금 낯익은 산책길 위에서 할무니와 걷고 있으며 병이 들었고 머지 않아 가족을 떠나 하늘로 돌아가리라는 예감인지도 모른다.


우솜돌과 아이들은 나를 끊임없이 움직이게 했다. 내 인생을 통째로 움직였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아이들을 위해 집과 직업을 바꾸었다. 되도록 사람들의 발길이 적은 꼭대기집을 마련했다. 낮부터 일할 수 있는 단시간 일자리를 찾았다. 아이들을 위해 삶을 바꾸었다고 생각했는데 결과적으로 좋은 선택이었다. 단시간 일자리는 장시간 노동을 싫어하는 게으른 나에게 딱이었다. 은둔자로 살고 싶은 내 취향에 이 집은 안성맞춤이었다.


아침에는 산책과 밥을 준비하고 밤에는 노령견 아이들이 앓고 있는 질병에 따른 처방약을 먹이며 조용히 잠든 아이들의 숨을 확인한다. 우솜돌과 숲을 상상하며 고요한 숲과 파괴되어 가는 숲을 동시에 떠올린다. 우리집에 찾아오는 배고픈 고양이들 곁을 떠날 수 없어 눌러 살기로 작정하고 고양이 쉼터를 짓기로 계획한다. 밤은 생명의 고요한 호흡이 가장 큰 울림을 주는 시간이다. 우리가 사는 이곳은 생명의 세계다. 살아가야 한다. 방 안에서도 방 밖에서도 생명들이 호흡하고 있다. 살기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 여러 아이들과 삶을 지속시키기 위해 나는 골똘히 궁리하고 궁리한다. 더 늦은 밤에는 글을 쓴다. 우솜돌은 내게 부족하나마 지속적으로 글을 쓰게 했다. 정규 교육을 받은 적은 없으나 그리지 않던 그림을 그리게 했다. 아이들은 나를 계속해서 움직이게 한다.


나는 혹시 전생에 개가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작은 것에서 감동을 받곤 한다. 작은 것에서 기쁨을 누리는 성질이 있다. 계절의 틈과 틈 사이의 미묘한 변화를 알아채고 기꺼이 즐거워한다. 나뭇가지 사이로 얼굴을 들이민 깨알처럼 작은 진분홍 꽃봉오리, 수선화 싹에 놀라 한참을 이리저리 관찰한다. 밤에 울고 가는 기러기 울음소리가 애틋하고 나를 반기는 낯익은 노령견들, 낯익은 마당냥이들, 허피스 때문에 눈딱지에 고름이 섞인 늙은 고양이, 다리를 절뚝이는 어린 고양이 손님이 반갑다.


늘 분주했음에도 며칠 전 유난히 바쁜 날들이 이어졌다. 하루를 마감하고 비스듬히 벽에 기대 노트북을 무릎에 얹은 채 글을 쓰기 시작했다. 시간은 밤 10시 20분이 지나고 있었다. 대략 남은 두 시간 정도가 오롯이 내 시간인 것이다. 내 시간임에도 내 시간일 수 없는 시간들이 있다. 내가 아닌 누군가들을 위해 사는 해왕성의 시간들. 물론 내가 선택했고 외면하지 못하는 시간들이었다. 아침부터 노모와 관련한 몇 가지 일을 해결하고 출근했으며 허피스에 걸린 길아이를 위해 항생제를 타오고, 아랫집 서운 할매네 마당에 묶인 몽이를 산책시켰다. 노령견들은 약을 먹고 고양이들은 짚더미 위에서 잠들었다.


나는 벽시계를 바라봤고 우솜돌을 기억했고 조금씩 문장을 만들어나갔고 다시 시계를 바라봤는데 그 순간 뭐라 말할 수 없는 기쁨이 밀려들어와 걷잡을 수 없었다. 오롯이 우솜돌을 기억하는 시간이면서 동시에 나만을 위한 시간과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기쁨이 너무나 밀도 있고 촘촘한 것이어서 가슴 속에서 조금씩 환한 불티처럼 따스한 것들이 퍼져나갔고 퍼져나간 파동은 파동을 확장하며 은은한 불길로 타오르듯 기이한 설레임 속에 머무르게 했다. 마치 여름철 고향집 마당에서 보았던, 은하수가 흘러가는 모습을 본 순간의 감동처럼. 그 순간을 붙잡지 않고 그대로 흘러가게 놔두었는데도 기쁨은 사라지지 않고 결국 타닥타닥 타올랐다. 그리고 잠이 들었다. 몸이 아픈 우솜돌을 바라보며 느꼈던 지난 4월의 커다란 슬픔과 작은 기쁨이 우솜돌을 기록하는 지금 커다란 기쁨과 작은 슬픔으로 변해 있었다. 어쩌면 슬픔은 기쁨과 쌍둥이 형제인지도 모른다. '설움의 날을 견디면 머지 않아 기쁨의 날이 오리니'.


사실 우솜돌과 내가 가는 곳에 숲은 없었다. 작은 시골 학교에 서 있는 벚나무나 메타쉐콰이어, 그리고 화단이 있을 뿐이다. 부러 나즈막한 산길을 찾아 걸어볼 걸 아쉬운 마음이 든다. 물론 우솜돌은 산이 아니어도 그저 좋았을 것이다. 우리와 함께라면. 메타쉐콰이어 가지 아래로 비둘기가 내려앉으면 우솜돌은 달려갔다. 나는 새를 쫓아 숲 속으로 달려가는 우솜돌의 뒷모습을 그린다. 그 숲은 희미한 안개가 끼어 있으며 키 큰 전나무가 울창하다. 축축하게 젖은 썩은 낙엽 틈새를 지나면 초원처럼 탁 트인 언덕이 등장한다. 조금씩 아침 햇살이 안개 속을 비추면 숲은 점점 내가 만든 동화 속 숲이 되는 것이다. 그 곳에는 나와 우솜돌이 산다. 우솜돌은 냄새를 맡고 나는 앰비언트 음악을 듣고 때론 내가 냄새를 맡고 우솜돌이 음악을 듣기도 한다. 우리는 사람이기도 하고 개이기도 하고 요정이어도 또 무엇이어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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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기 전 우솜돌은 심한 갈증을 느꼈다. 마르지 않고 심지어 물이 넘치는 숲 속 옹달샘을 그려 넣었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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