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개는 순종, 우리 개는 잡종 - '순종'이라는 이상한 개념
<당신은 반려견과 대화하고 있나요?>라는 책의 비하인드 스토리.
나는 일러스트레이터 릴리 친(Lily Chin)에게 내 책의 일러스트를 맡기면서
일러스트 속의 반려견들을 한국의 대표적인 견종인 '진돗개, 삽살개, 누렁이, 발바리'로 표현해달라고 요청했다.
한국 견종들이 익숙하지 않았던 릴리는 각 견종들의 사진과 영상들을 나에게 요청했는데, 진돗개와 삽살개, 누렁이의 사진들은 쉽게 구해서 보내줄 수 있었지만, 발바리의 경우는 쉽지 않았다.
'발바리'라는 너무나 소중한 명칭을 왜 그 나이에 아직 제 손으로 옷을 챙겨 입을 줄도 모르는 이들에게 사용하는지...
나는 릴리에게 나의 어릴 적 반려견의 사진들을 보내주고, 발바리의 특성과 발바리라는 개의 아름다움을 열의를 다해서 설명했다. 그리하여 내 책 속에서 발바리들이 뛰어놀 수 있게 되었다.
내 기억 속의 발바리들이 그림으로 다시 태어났을 때 그 기쁨이란...
80년대 올림픽을 기점으로 '순종'이라는 레이블을 붙여 해외의 견종들을 대량 들여오면서, 우리 땅에서 우리 고유의 견종들을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그보다 대체 어떤 개념에서 '순종'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일까?
해외 어느 나라의 발바리는 '순종'이고 우리 고유의 발바리는 '잡종'인가?
개는 인간과 수천 년을 함께 한 동물이다. 태초부터 '종(breeds)'을 구분하여 살아온 동물이 아니다.
'순종'이라는 개념은 사람이 만든 개념이고, 그 역사 또한 매우 짧다.
단순히 집을 지키는 동물 정도로 개를 대하던 아시아 대부분의 나라와 달리, 유럽 등지에서 개는 사람과 매우 밀접하게 생활하던 동물이었다. 개는 다방면에서 사람을 도왔다. 함께 사냥을 나갔고, 함께 농장을 지켰으며, 해로운 동물이나 낯선 침입을 막아주는 것도 개였고, 운반을 돕는 것도 가축들을 몰거나 지키는 것도 개의 역할이었다.
개의 퍼포먼스가 곧 사람의 이익과 직결되기도 했으므로, 그들은 각 목적에 맞게 개를 '디자인'하는데 많은 공을 들였다.
쥐를 잡는데 유리한 턱, 치아, 얼굴형을 얻기 위해 여러 견종 간의 조합으로 새로운 견종을 만들어내고, 양을 모는데 최적화된 신체 구조와 영민함을 얻기 위해 그에 맞는 아이들만 선별하여 대를 이어가는 식으로, 사람이 의도를 갖고 여러 방법으로 개입하여 정형화에 성공한 것, 그것이 견종(Dog breeds)이다.
물론 바센지(Basenji)처럼 그 역사가 오랜 견종들도 있으나, 오늘날 대부분은 인위적 개입으로 정착시킨 견종들이다.
그리고 어떤 이유에서든 그 견종을 지켜나가고 싶은 사람들이 모여서 자연히 견종별 클럽들이 형성되었다.
각 클럽에 모인 사람들이 머리를 맞대고 유지 보존하고자 하는 견종에 대한 세부적인 내용을 정리하여 나름의 표준을 정하는데, 그 표준을 해당 국가의 반려견협회에서 채택하면 그것이 그 국가에서의 공인된 견종 표준(breed standards)이 된다.
그 표준에 부합하는 개를 일컬어 순종(purebred dog)이라고 부른다.
즉, 순종 또는 흔히 족보라고 부르는 혈통서(pedigree)는 '이 개는 우리가 표준화한 그 견종에 해당한다'는 의미이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견종 표준을 만드는 사람들은 자신의 견종을 사랑하고 보존 가치가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이다.
그러다 보니 표현의 차이는 있으나 견종을 막론하고 공통적으로 견종 표준에 등장하는 문구가 있다.
"이 견종은 사랑스럽고, 다정하고, 영리하고, 용감하며..."
당연한 이야기지만, 어느 견종 표준에도 "이 견종은 대책 없고, 성격 고약하고..."라는 표현은 절대 등장하지 않는다.
유전적 성향에서 오는 유사함, 공통점은 있을 수 있으나, '견종'으로 개의 성격을 가늠하고 논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한날한시에 태어난 강아지들이라도 성격은 모두 제각각이다.
견종 표준에 들어가는 내용 중에는 '표준에 부합하지 않는 모색' 이 언급되는 경우가 있다.
이 모색에 해당되는 개가 도그쇼 등에 출전하면 탈락 또는 감점을 받게 된다.
견종 표준에 부합하지 않는 모색을 갖고 있는 것이 그 개가 '순종'이 아니라는 의미는 아니다.
당연히 개의 견생에 결함 사유도 아니다.
예를 들어, 어느 견종의 표준에 '노란 얼룩이 섞인 모색은 제외한다'라고 기재되어있다면:
1. 해당 견종 중에 그런 얼룩을 가진 아이들이 존재한다
2. 우리는 그 모색을 지양하고자 한다
라는 의미다.
노란 얼룩이 있는 아이도 그 견종이 맞고 아무 문제도 없다.
단지 해당 견종 클럽에서 앞으로 이 견종을 브리딩할 때 ' 얼룩이 섞인 모색을 가진 아이들은 배제하고 은색 털을 가진 아이들을 중심으로 발전시켜가자'라고 합의했다는 의미일 뿐이다.
어느 견종 표준에도 '초록색, 무지개색 모색은 제외'라는 류의 내용은 적혀있지 않다. 왜? 그런 모색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견종 표준은 '앞으로 이런 모습을 지향하자.'라는 지향점을 글로 옮긴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나의 반려견이 견종 표준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정체성을 의심할 필요 없다.
한국인 표준보다 팔이 길다고 한국인이 외계인이 되는 건 아니지.
(다음에 기회가 되면 이 이야기는 더 자세히 나누기로)
아무튼, 그렇게 모인 사람들이 품평회를 갖고 '이 개가 우리 표준에 가장 부합하는 아이다. 이를 지표 삼아 견종을 유지 보존하자.'라고 취지를 공유하던 장이 말하자면 도그쇼의 첫 시작으로, 도그쇼의 역사라고 해봐야 대략 150여 년 남짓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하니 견종의 유지 보존을 논하는 자리도 아닌 일반 가정에서 개의 '순종' 여부를 논하고 따지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발바리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 남의 개는 순종, 우리 개는 잡종
그렇지만 어째서 해외에서 수입된 개들과 달리, 우리 고유의 개들은 대우를 받지 못하는 걸까?
그들은 곁에 있는 발바리의 소중함을 알았고, 우리는 그렇지 못했다.
우리와 그들의 차이라면, 그들은 자국의 견들을 견종별로 보존하는 노력을 기울였고,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뿐이다.
해외의 견종들이 순종이라고 불릴만한 혈통을 타고나서 견종으로 표준화된 것이 아니고, 마찬가지로 한국의 발바리는 단순한 점박이 작은 개라서 관심 밖으로 사라진 것이 아니다.
발바리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고유의 특질을 가진 아름다운 견종이었다. 또한, 너무나 한국적이고 한국에 맞는 견종이었다. 그러나 해외에서 많은 개들이 유입되면서 옆집 바둑이, 얼룩이, 길멍이 정도의 취급을 받으며 하나둘 줄어들기 시작했고, 지금은 찾아보기도 어려운 국보급의 견종이 되어버렸다.
발바리는 우리가 그 고유의 특성을 표준화시키고 보존했더라면 세계에서 부러워했을 아름다운 견종이다.
견종을 보존하고 등록하는 것이 이야기의 핵심이 아니다.
그보다 각 환경에 맞는 동물과 식물들이 그 모습을 잃지 않고 오래도록 우리와 함께 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어디를 가든 누구를 만나든 무엇을 먹든, 고유의 것 이상 아름답고 완벽한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한국인은 캐나다의 숲과 자연을 접하면 그 광대한 아름다움에 압도되겠지만, 반대로 캐나다인은 한국에 오면 한국 고유의 아담하고 상냥한 자연에 넋을 놓게 되는 법.
그것이 누구에게나 가장 큰 경쟁력 아닐까?
노르웨이 숲을 옮겨놓는 것도 좋지만 한국 고유의 정원과 숲이 늘어났으면 좋겠고, 파피용(Papillon)도 좋지만 발바리들이 더 사랑받았으면 좋겠다.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그 아름다움, 온전함이 간직되었으면 하고, 그 소중함이 많은 사람들에게 가 닿았으면 한다.
무엇보다 너무나 그리운 발바리들이 모여서 마음껏 뛰노는 모습을 다시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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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물행동심리연구소 폴랑폴랑
국내 최초/국내 유일의 국제 인증 반려동물 행동심리 전문가
저서 <당신은 반려견과 대화하고 있나요?>
반려동물의 감정(Feeling)과 니즈(Needs)에 공감하는 교육을 알리며
반려동물 교육 문화의 패러다임을 바꾸고 있는
동물행동심리연구소 폴랑폴랑의 대표로
동물과 사람이 서로가 서로를 치유하는 세상을 만들고자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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