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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침반 May 28. 2021

미국의 아프간 철군 소식을 들으며

2021.04.16

학부 2학년 2학기 때 한 선배의 소개로 "NES 307: Afghanistan and the Great Powers, 1747-2001"라는 강의를 수강했다. 소규모 세미나가 아닌 학생 수십 명이 듣는 강의 중심 수업으로는 흔치 않게 매주 한 번씩 3시간 강의를 진행했다.


9/11 테러와 아프간 침공, 그리고 이라크 전쟁의 소식을 들으면서 어렴풋이 세상이 돌아가는 것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지기 시작해서였을까. 유라시아 한복판에 있는 생소한 나라에 대한 수업이었지만, 그 나라의 역사에 대한 막연한 호기심도 있었고 정말 둘도 없는 "레전드" 수업이라는 소문을 듣고 학기 첫째 주에 강의실에 들어섰다.


그 첫 강의의 기억은 지금도 뇌리에 깊게 박혀있다.


마이클 배리 교수님은 강의를 시작하면서 조명을 낮추고 오버헤드에 유라시아의 지도를 띄우셨다. "첫 시간인 오늘은 18세기부터 21세기까지 이르는 아프가니스탄의 현대 역사를 간략히 요약할 것이다"는 한 마디로 시작한 강의는 이내 역사, 지정학, 문학, 고고학을 자유로이 넘나들며 마치 한 편의 대하드라마처럼 눈 앞에 생생하게 펼쳐졌다.


3시간이 정말 짧은 시간이라는 것을 그때 처음 느꼈던 것 같다.




젊은 시절에 고고학자로서 유적지를 답사하기 위해 아프가니스탄을 방문하셨던 배리 교수님은 1970년대 말, 소련의 침공으로 전쟁이 발발한 후에는 국제 인도적 지원 단체의 일원으로 직접 차량을 운전하며 구호물자를 운반하셨다고 한다. 다리어(페르시아어)를 원어민 수준으로 구사하실 수 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매번 목숨을 걸고 민간인들을 돕기 위해서 구호물자를 나르던 그 사명감의 깊이를 감히 상상할 수 없다. 아프간 내전 도중에 발생한 각종 인권 침해를 조사하고 고발하는 과정에도 직접 참여하셨다고 한다. 90년대 초, 소련이 철수한 이후에 사실상 무정부 상태인 카불에 도착해서 겪으셨던 경험도 나눠주셨다.


12주 동안 강의를 들으며 외부 세계에는 그저 "제국의 공동묘지"라는 한 마디로 압축되는 그 땅, 그리고 그 땅 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과 그들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깊은 사랑이 느껴졌다.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외부 세계의 무지와 무시가 어떤 비극을 불러왔는지 누구보다도 잘 알기에 그토록 열정적으로 강의를 하셨던 것이 아닐까.


영국의 어떤 기록 보관소의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던 진귀한 역사적 사료를 손수 찾아오셔서 학생들에게 소개하고, 40여 년 전에 직접 답사하셨던 유적지의 사진을 보여주시며 소개해주시던 그 모습은 영원히 잊히지 않을 것 같다. (감사하게도 누군가가 예전의 강의 영상을 유튜브에 공유했다.)


너무나도 인상 깊게 들었던 수업이었기에 졸업 후에도 종종 교수님의 소식을 찾아보곤 했었다. 2016년 무렵에는 학과와의 마찰로 인해 재학생과 졸업생의 반대 서한에도 불구하고 학교를 떠나시게 되었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몇 년 뒤, 카불에 위치한 American University of Afghanistan (AUAF)의 교수로 부임하셨다는 사실을 접하게 되었다. 2006년에 세워진 대학으로, 탈레반 집권 시절에 학교를 다니지 못했던 여학생들에게 세계적인 수준의 교육을 제공하는 것이 주된 창립 목적 중에 하나인 교육기관으로 알고 있다. 교수님의 강의를 돌이켜보면 전혀 놀랍지 않은 선택이다.




이번 수요일, 바이든 미 대통령이 올해 9월 11일, 9/11 테러 사건의 20주년까지 아프가니스탄으로부터 미군을 완전히 철수할 계획이라고 발표했다. 결코 쉬운 결정은 아니었을 것이다.


코로나 19를 비롯해서 수많은 국내 현안이 산적해 있는 상황을 감안하면 납득이 되는 결정이다. 아프간 전쟁은 이미 미국 역사상 가장 긴 전쟁이 되었다. 정치적, 사회적 파란을 불러왔던 베트남 전쟁보다도 오래 지속되었다.


AUAF의 페이스북 페이지를 찾아보니 지난 3월 26일에 배리 교수님이 주 아프간 프랑스 대사로부터 프랑스의 가장 영예로운 훈장인 "레지옹 도뇌르 (Legion d'Honneur) 훈장"을 수여받으셨다는 소식이 사진과 함께 올라와 있다.


배리 교수님은 철군 발표 소식을 들으면서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 그리고 어떤 심정으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계실까. 이제는 그 시작점이 못 박힌, 그 땅에 다시 한번 몰아닥칠 역사의 소용돌이를 걱정하고 계시지는 않을는지.


부디 교수님도, 교수님의 수업을 듣고 있는 아프간의 젊은 학생들도 무사하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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