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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침반 May 28. 2021

남한산성, 바이든, 그리고 조국 사태

2020.12.24

여러 말의 흐름이 매서운 눈보라처럼 휘몰아치며 시야를 가리던, 작가 김훈이 그린 1636년 12월의 남한산성이 떠오르는 요즘이다. 사회적 약자에게는 유난히 혹독한 겨울이라는 것도 400년 전 그 시기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당시의 상황이 어땠는지 자세히 알지 못하고, 쉽게 상상할 수도 없다. 하지만 전례 없는 위기와 도전 앞에서 이성보다 감정이, 합리적인 비판보다 상대방에 대한 적대감이 앞서는 점도 조금이나마 비슷하지 않을까.


여러 기사와 댓글을 살펴보면 다양한 견해를 나누기보다는 사건의 당사자들의 정치적, 경제적, 심리적 동기에 대한 추측이 난무한다. 물론 어제오늘만의 일은 아니다. 그러나 최소한의 객관성을 유지하려 노력하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면 혼란스럽다.


아무리 닻을 깊게 내려도 이처럼 거센 시류에 전혀 흔들리지 않기는 쉽지 않다. 진정으로 균형 잡힌 시각을 가지는 것은 어차피 불가능한 일이고, 절대적인 진실은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극단적인 생각마저 종종 뇌리를 스친다.


누군가가 근래 한국의 상황을 "이념적인 내전"이라고 비유한 적이 있다. 일리가 있는 표현이다.




2015년 5월 17일, 당시 부통령이었던 조 바이든이 예일대 졸업식 연설에서 소개한 일화가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가 30살의 청년으로서  상원의원 임기를 시작한   달쯤 되었을 , 원내대표 마이크 맨즈필드 의원님과 면담을 하기 위해 걸어가던 중이었습니다. 저와 함께 상원에 입성한 강경 보수 성향의 제시 헴스 의원이 테드 케네디와   의원을 질책하는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의원이 훗날 미국 장애 복지법의 전신이  법안을 지지했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하지만 저는 면담 일정 때문에 멈춰 서지 못하고 계속 걸었습니다.

맨스필드 의원님의 의원실에 들어섰을 , 속에서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도저히 숨길  없었나 봅니다. [...] 의원님이 저를 보며 무슨 일이 있는지 물으셨습니다.

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 헴스라는 인간은 정말 아무런 쓸모가 없습니다. 아니, 어떻게 저렇게 무관심할  있나요?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무시하고, 장애인을 홀대해도 되는 겁니까?'

이에 맨스필드 의원님은 알려주셨습니다. 그로부터 3 , 성탄절을 앞둔 12 초에 헴스 의원과 그의 아내가 [지역 신문인] 랄리 옵서버에 실린 광고를 봤다고 합니다. 광고에는 양다리에 보조장치를 착용한 14 남자아이의 사진이 있었고, '저를 입양하고 사랑해줄 분을 간절히 찾습니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습니다. 의원님은 저를 보며 말하셨습니다. ',  아이를 입양했단다.'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졌습니다. 의원님이  마디를 덧붙였습니다. '누군가의 판단에 의문을 제기하는  언제나 적절하지만, 그의 동기를 의심하는  절대로 바람직하지 않아.   사람 속은 모르는  아닌가.'

저는 다행히  교훈을 일찍이 배웠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동료들을 대할  그들의 희화된 모습만을 보지 않고  명의 사람으로서 그들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불과 2주 후인 5월 30일에 바이든의 장남이 뇌종양 투병 끝에 46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는 비보가 전해지면서 이 연설문은 많은 주목을 받았다. 그중에도 이 일화가 기억에 오래 남는다.


바이든의 정치 성향에 대한 견해와 상관없이 한 번쯤은 되새겨볼 만한 메시지다. "상대방의 판단은 언제나 비판해도 좋지만, 그의 동기는 함부로 판단하지 말라."




누군가는 예수님과 십자가를 언급하며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고, 누군가는 그 비유의 적절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광경이 하루 종일 펼쳐지고 있다. 기계적인 양비론을 내세우려는 것은 아니지만, 여기에서 굳이 어느 한 주장을 옹호하거나 비판하고 싶지는 않다.


물론 기사, 방송 매체와 SNS를 통해서 보이는 모습은 현실의 한 단면일 뿐이고, 사태를 조용히 지켜보는 많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1년이 넘도록 이어진 일련의 사건들 때문에 매우 시급하고 중요한 다른 문제들이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들려온다.


각자의 자리에서 작금의 상황에 대한 판단을 할 수 있고, 동의하지 않는 판단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치열하게 비판할 수 있다. 그리고 그래야만 한다. 토론의 궁극적인 목적은 상대방을 굴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미처 고려하지 못했던 부분들을 함께 발견하고 비추는 것이다. 표현의 자유가 보장된 열린 사회는 본래 역동적인 것이고, 때로는 지나치도록 요란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맨스필드 의원의 조언에 따르면 견해가 다른 사람의 동기에 대해서 섣불리 단정 짓는 행위는 가능한 한 지양해야 한다. 견해를 뒷받침하는 신념과 세계관은 하루아침에 형성되지 않는다. 홍세화 작가가 지적하듯 "지금 내 생각은 어떻게 내 생각이 되었나?"는 결코 단순한 질문이 아니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더욱 근본적인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의견이 전혀 다른 누군가를 마주하면 불편할 수밖에 없고, 우리의 관심은 상대방의 동기와 의도에 집중된다. 부정적인 감정은 자연스레 선입견으로 이어지고, 그 생각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더라도 합리적인 비판보다는 인격적인 비난이 먼저 떠오르기 마련이다.


본인의 생각은 언제나 합리적이며 정당하고, 타인의 생각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착각과 편견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我是他非가 올해의 사자성어로 선정되었지만 이 또한 어제오늘만의 일이 아니다.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라고 사사기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은가 (21:25).




성탄절을 앞둔 밤, 예수님을 언급하는 언쟁을 지켜보며 더욱 분명하게 느껴진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는 계명이 드러내는 것은 인간은 이 계명을 온전히 실천할 수 없는 존재라는 현실인지도 모른다.


바이든도 의견이 상반되는 동료 의원을 존중하기 위해서는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다고 언급한다. 헴스 의원의 질책을 목격한 그의 반응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자신이 볼 수 있는 것은 언제나 극히 일부라는 사실은 늘 쉽게 잊힌다.


판단이 일치하지 않는 것 또한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배치되는 의견을 가진 타인의 인격을 존중하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기에 그만큼 노력이 필요하다. 날 선 비난이 소용돌이치는 목전의 상황을 진심으로 반기는 이는 과연 얼마나 될까.


비록 저자가 역사로 읽지 말라고 당부한 소설 속의 이야기지만, 모진 겨울이 지난 후에 안동으로 떠나는 김상헌은 마포나루까지 배웅을 나온 이시백에게 마지막 한 마디를 남긴다.


"가서 최명길에게 안부 전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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