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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침반 May 28. 2021

공감의 한계

2021.03.20

파리 오페라 하우스, 샤갈의 천장화 (2004년 여름)


2015년 11월 13일 밤, 파리 교외의 스타드 드 프랑스 경기장에서 열린 프랑스와 독일의 축구 친선전 도중에 갑자기 굉음이 들려왔다. 시내의 바타클랑 극장에서는 공연 도중에 무장 괴한이 급습하며 인질극이 벌어졌고, 파리의 길거리와 식당가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총격 사건과 폭탄 테러가 발생했다. 이 연쇄 테러 사건으로 최소 120명이 목숨을 잃었고, 프랑스는 충격에 휩싸였다.


불과 하루 전, 시아파 주민이 많이 거주하는 베이루트 교외의 한 지역에서 자살폭탄 테러가 발생했다. 총 43명이 사망한 이 사건은 장장 16년 동안 끊이지 않았던 레바논 내전이 종결된 이후에 발생한 최악의 테러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파리에서 발생한 테러 사건과 마찬가지로 IS는 이 사건이 자신들의 소행이라고 주장했다. 이 두 사건이 모두 시리아 내전의 여파로 인해 일어났다는 점 또한 동일하다.


하지만 두 사건에 대한 국제여론의 반응은 확연히 달랐다. 베이루트에서 테러 사건이 있었다는 사실을 파리에 대한 기사의 한 부분을 읽다가 처음 접한 사람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에 주변에서도 적지 않은 친구들이 프랑스와 연대를 표하기 위해 페이스북과 트위터 계정 사진에 프랑스 국기 색깔의 필터를 입혔던 기억이 난다.


예전에 가족과 함께 파리를 구경했던 기억이 있어서일까. 그 참혹한 현장의 사진을 보면서 남의 일로 느껴지지 않았다.




우리는 무엇에 관심을 기울이고, 어떤 일에 공감하는가.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작년 5월 조지 플로이드의 죽음에 대한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 느낀 감정의 무게와 최근 애틀란타에서 일어난 연쇄 총격 사건에 대한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느낀 감정의 무게는 동일하지 않았다.


우리는 어떤 이유에서든 "남이 일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드는 일에 더욱 집중하게 된다. 청년 구직자는 노동정책에, 학부모는 교육 문제에, 은퇴를 앞둔 직장인은 국민연금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하다. 가족이 해외에 거주하고 있으면 그 나라의 상황이 신경이 쓰이고, 가까운 친구가 살고 있는 도시에 큰 사고가 발생하면 연락을 하게 된다.


아담 스미스는 <도덕 감정론>에서 이를 통렬하게 지적한다.

Let us suppose that the great empire of China, with all its myriads of inhabitants, was suddenly swallowed up by an earthquake, and let us consider how a man of humanity in Europe, who had no sort of connection with that part of the world, would be affected upon receiving intelligence of this dreadful calamity.

He would, I imagine, first of all, express very strongly his sorrow for the misfortune of that unhappy people, he would make many melancholy reflections upon the precariousness of human life, and the vanity of all the labours of man, which could thus be annihilated in a moment. He would too, perhaps, if he was a man of speculation, enter into many reasonings concerning the effects which this disaster might produce upon the commerce of Europe, and the trade and business of the world in general. And when all this fine philosophy was over...he would pursue his business or his pleasure, take his repose or his diversion, with the same ease and tranquillity, as if no such accident had happened.

The most frivolous disaster which could befall himself would occasion a more real disturbance. If he was to lose his little finger tomorrow, he would not sleep tonight; but, provided he never saw them, he will snore with the most profound security over the ruin of a hundred millions of his brethren, and the destruction of that immense multitude seems plainly an object less interesting to him, than this paltry misfortune of his own.




우리가 가진 공감의 폭은 그리 넓지 않다. 하지만 이 또한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현재 유엔 시민적·정치적권리위원회(자유권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서창록 교수가 작년에 "성북구 13번 확진자"로서 겪었던 일들을 기록한 <나는 감염되었다>를 소개하는 글의 일부다.

코로나로 인해 강제로 쉬면서 자신이 살아온 삶도 돌아봤다. 세계의 고통받는 사람들, 편들어줄 이 없는 약자를 위한 ‘대의’만을 생각하느라 나를 돌보고 가족과 시간을 보내는 일에 소홀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제야 인생의 중요한 가치를 자신에게 묻고 답을 찾았다. “내가 나를 소중히 여기며 가족과 화목하게 지내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인권 역시 나와 가족의 존엄성을 소중히 여기는 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것을.

("나는 감염되었다"...소수자가 되자 그들 삶이 보였다. <한겨레> 2021.03.12)

이 대목을 읽으며 "소중한 건 옆에 있다고 / 먼 길 떠나려는 사람에게 말했으면"이라는 조용필의 외침이 문득 떠올랐다. 모든 인간은 동일하게 존엄하다는 가치를 그 누구보다도 굳게 믿으며, 그 가치를 실천하기 위해 오랜 세월을 헌신한 인권 전문가의 고백이다. 보편적인 가치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신념조차도 인간의 근본적인 연약함을 극복하기에는 역부족이다.




학부 때 들었던 한 국제관계 수업 강의에서 교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대다수의 미국 시민은 외교 현안과 외교 정책에 큰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생업에 치여서 도저히 그럴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아마 설거지를 하면서 틀어놓는 CNN에 스쳐 지나가듯이 나오는 1분 짜리 영상, 그것이 하루를 보내면서 외교 현안에 노출되는 시간의 전부일 것이다. 굳이 멀리 볼 필요도 없다. 같은 학교에 있는 친구들 중에서 정치학 전공이 아닌 학생은 국제 현안에 대한 신문기사를 얼마나 읽을 것 같은가?"


정작 스스로는 실천을 하지 못하면서도, 모든 사람은 당연히 뉴스에 항상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교만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사실을 그 순간에 처음 깨달았던 것 같다.


자신에게 매우 중요한 문제를 타인이 전혀 알고 있지 못하고 있다고 해서 정죄를 하는 것도, 상대방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주제에 대해서 자신이 미처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다고 해서 자책을 하는 것도 적절하지 않다. 취향이 다른 것만큼이나 관심사도 다양할 수밖에 없고, 지금 처해있는 일상의 자리에 따라서 마음의 무게가 제각각 다른 방향으로 치우치기 마련이다.




과연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적절한 것일까.


아담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개인이 각자 스스로의 이익을 자유롭게 추구할 때 비로소 시장경제라는 "보이지 않는 손"을 통해서 사회적, 공적 이익이 극대화된다고 역설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각자 "남의 일이 아니다"라고 느껴지는 일들에만 관심을 기울이면 사회 전반이 더 조화로워지는 것일까.


그토록 단순한 문제는 아닐 것이다. 미국의 헌법에 대한 논쟁이 치열하게 펼쳐지던 시기에 강력한 연방 정부의 중요성을 설파한 <연방주의자 논집> 제51호에는 "인간이 천사였다면 정부는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라는 유명한 문구가 등장한다. 한 사회의 구성원 사이에 존재하는 다양한 관심사와 신념을 완벽하게 조율하는 제도는 존재하지 않는다.


정치는 한 마디로 "우리가 어떻게 함께 더불어 살아갈 것인가"의 문제라는 표현을 읽은 적이 있다. 비단 유엔 안보리 회의실이나 국회의사당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개개인의 입장에서 무엇이 최선인지에 대한 단순명료한 해답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이 무엇인지는 비교적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오로지 자신에게만 집중하려는 본성을 잠깐이라도 거스르고 타인을 진심으로 대할 수 있으면, 마음을 잠시라도 건네줄 수 있으면 좋지 않을까.


어떤 모습으로든 그런 노력을 실천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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