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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lice Apr 14. 2020

마흔에 그림을 시작했습니다

천재가 아닌 나에게 보내는 응원

80일간의 윈난 일주 이후, 여행지 풍경을 직접 그려보고픈 마음에 펜드로잉 연습을 시작했다. 보기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선 하나도 막상 그려보니 쉽지가 않다. 잠시 배경음악에 취해 집중력이 흐트러지면 순서마저 틀리기 일쑤다. 실력은 어설프기 그지 없지만 스스로에게 주는 만족감이 크다. 재미가 있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멋진 풍경 드로잉 한 편을 온전히 완성하게 될 날을 기대하게 된다.


그림은 나의 오랜 열망이었다.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 받은 상은 온통 미술상이었다. 그러나 미술을 정식으로 공부하지는 못했다. 언니는 예고 진학을 하겠다고 엄마와 전쟁같이 싸웠고, 인문계 고등학교 진학 후에도 예대 진학을 위해 미술학원에 다녔다. 당시엔 예술 하는 사람이 둘이면 집안 기둥뿌리가 뽑힌다는 말이 있었다. 부모님께 차마 그런 부담을 드릴 수 없어서, 한 번도 그림을 배우고 싶다는 말을 입 밖으로 내지 못했다.

 '저 정도면 OO가 안 되고는 살 수가 없겠구나' 싶은 사람들이 있다. 무엇을 하는 사람이 될까, 이 것을 할까 말까 같은 고민 따위는 필요 없어 보이는 '천재적' 재능을 가진 사람들 말이다.

중학교 3학년 우리반 반장이자 전교회장이던 재휘는 전교 1등을 도맡아서 천재라 불리는 녀석이었다. 게다가 음악은 물론 그림 실력도 기가 막혔다. 그해 봄 전교 합창대회에서 우리 반 지휘를 맡아 멋드러지게 경연을 마친 후, 얼마되지 않아 서울로 전학을 가버렸다. 예고에 진학하기 위해 간다고 했다. 우리 모두는 재휘가 당연히 과기고에 갈 것이라 생각했는데, 갑작스럽고도 의외의 선택이었다. 나중에 들은 소문에 의하면, 화가인 어머니가 과기고 진학을 반대하셨단다. 여자가 그런 쪽으로 가면 안 된다고. 전학 가기 직전 재휘는 내게 "너도 예고 준비 안해?"라고 물었다. 내게는 무한한 영광이었다. '천재가 나에게 이런 질문을 해주다니!'.

회화 천재 재휘가 있었다면, 조소 천재 전진도 있었다. 덩치가 크고 피부가 검은 보이시한 녀석이었는데, 공부보다는 노는 데 재능이 있는 학생이었다. 하지만 전진에게도 자신조차 몰랐던 한 칼이 있었다. 조소 실력이다. 당시 우리 미술 교사는 부산에서 유명한 조각가였다. 선생님은 ‘얼굴'을 주제로 부조 작품을 완성해 미술대회에 출품하는 과제를 내주셨다. 내심 자신이 있었는데, 막상 완성작을 보니 전진과 나의 실력차가 확연했다. 과감하게 입체적으로 얼굴을 표현한 전진의 작품, 그 옆에 놓인 내 작품은 밋밋해서 한눈에 봐도 소심하고 평범해 보였다. 출품작은 당연히 전진의 것이 되었다.

천재를 질투한 2인자의 파멸을 다룬 영화를 수없이 보았다. 그럴 때면 그 때 그 천재들 덕분에 내가 헛꿈을 꾸지 않을 수 있었던 게 다행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나의 열망은 20년이 지나 다시 그림으로 돌아왔다. 어느 방향으로 돌려놓아도 태양을 바라보는 해바라기처럼. 어쩌면 좀 더 좋아해도 괜찮았을 것들을 너무 일찍 포기하며 살았던 것은 아닐까. 누구와 경쟁해 비교우위를 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원하는 것을 표현할 수 있는 도구가 언제나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TV 경연 프로그램에서 감정 이입을 하는 대상은 1등이 아니다. 경쟁을 지켜보는 것은 괴롭지만, 재주 있는 아티스트들의 변신과 성장을 지켜보는 것이 즐겁다. 그 중에도 유난히 뛰어난 천재들이 있는데, 그들과 겨루면서 좌절하고 의기소침해지는 참가자들을 보면 마음이 쓰인다. 각자 나름의 대체불가능한 개성과 매력을 가졌다고, 지금 부족한 부분 때문에 고통 받고 포기하지는 말라고 응원하며 매회 지켜본다. 그것은 천재가 아닌 나에게 보내는 응원이기도 하다.


펜드로잉은 아무래도 가능성이 안 보인다. 이 나이쯤 되면 빨리 포기할 수 있는 결단력쯤은 있어야 한다. 최근 아이폰 스케치앱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근본 없는 손가락 놀림이지만 1일 1그림을 실천하니 조금씩 결과물이 나아지는 것 같다. SNS에 올린 그림을 보고 출판사 사장님이 뜬금 없이 카톡을 보내왔다. 여행기에 내 이야기가 부족하다며 지난 주에 냉정한 조언을 해준 선배다.

"진지하게 하는 말인데, 그림을 배워봐.ㅎㅎㅎ"

"ㅋㅋㅋㅋ"

"일러스트 해도 되겠음"

"'마흔살에 그림을 시작했습니다'가 되는 건가요? ㅋ"

"나중에 책 삽화나 표지를 그려도 될 듯. 꼭 해보셔."

80일간 쓴 글보다 일주일 그린 그림으로 칭찬을 받았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데, 칭찬이 나를 그림의 길로 인도할 줄이야.


그래, 시작하기 늦은 나이는 없지. 내 나이가 어때서. 그림하기 딱 좋은 나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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