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파이프 패턴이 내뿜는 에너지
한국 기하추상의 선구자 이승조(1941-1990) 개인전. 원통(파이프) 모양의 반복적이고 기하학적 패턴을 통해 입체감과 율동감을 구현한 ’핵(Nucleus)‘ 시리즈 작품 30점을 만날 수 있다.
작가의 상징과도 같은 독특한 파이프 모양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68년. 작가가 모티브를 얻은 것은 여행에서였다고 한다. “기차여행 중이었다. 눈을 감고 잠시 여러 가지 생각에 잠겨 있었는데 얼핏 무언가 망막 속을 스쳐 가는 게 있었다. 나는 퍼뜩 눈을 떴다. 집에 돌아온 즉시 이틀 밤을 꼬박 새우며 마음에 남은 이미지를 조작한 결과 오늘의 파이프적인 그림을 완성했다.” 차가운 파이프의 모던한 기하학 패턴은 40~50년 전 작품이라 생각되지 않을 만큼 동시대적 세련미를 갖고 있다.
컴퓨터 그래픽 같이 매끈한 원통 모양은 작가 고유의 방법론으로 치밀하게 그려낸 유화다. 우선 형상의 테두리에 미리 종이테이프를 붙인다. 넓고 납작한 평붓 양 끝에 어두운 색 물감을, 가운데에는 밝은 색 물감을(혹은 그 반대로) 묻혀 직선을 긋는다. 붓질을 반복하며 경계가 흐려지도록 그러데이션을 만든 후 마스킹 테이프를 떼어내면 파이프처럼 보이는 입체적인 직선이 생긴다. 사포질을 해 화면을 더욱 매끈하게 갈아내면 유화 표면이 윤기를 내면서 금속성 파이프 같이 보이게 되는 것이라고.
이승조의 그림 속 파이프는 ‘핵’이라는 연작 이름이 연상시키듯 원통형 우라늄 원심분리기 같기도 하고, 복잡한 회로나 배관 같이 보이기도 한다. 색상과 길이의 변주에 따라 파이프는 푸른 밤 한옥 기와지붕처럼 정적인 그림이 되었다가 실린더 속을 빠르게 왕복 운동하는 피스톤처럼 동적인 그림이 되기도 한다. 차가운 질감과 엄격한 구도 속에서 응축된 에너지가 느껴진다.
전시는 이번 주 일요일까지. 7미터 대작이 주는 압도적 율동감을 직접 느껴보시길.
기간 : 2022.9.1(목) - 10.30(일)
장소 : 국제갤러리 서울 (서울 종로구 삼청로 54) 10:00-18:00
관람료 : 무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