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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백하 Jul 24. 2024

리들리 스콧의 나폴레옹 후기 - 붕 뜬 풍자화

나폴레옹(2023)

  영화를 보기 전부터 <나폴레옹>에 쏟아진 악평을 통해 영화의 시각을 대충은 알 수 있었다. 쏟아진 악평이란 단순히 졸린다는 평부터 나폴레옹에 대한 부정적 시각, 심지어는 속된 말로 찐따처럼 묘사했다는 얘기까지.


 본작의 나폴레옹에 대한 시각은 굳이 말할 필요가 없으리라 생각한다. 혹시라도 이것이 나폴레옹의 단지 입체적 면모를 부각하기 위함이라고 한다면 아니라고 단언하고프다. 본작은 나폴레옹의 인간성을 고찰한다기보다는 어설픈 광대가 국가를 장악하고 벌이는 열등감의 연속을 비꼬고 희화화할 뿐이다.


 본작에 대한 악평이란 전쟁과 영웅을 보고픈 관객들의 기대에 영화가 부응하지 못한 탓이다. 스콧은 관객의 기대와는 정반대로 과거의 영웅에 대한 영웅주의를 배격하는 목표 의식 하에 본작을 만들었을 테다.


 영화를 순서대로 따라가보면 두 가지 흐름이 발견된다. 과거의 영웅 전설이 후대에 전달됨이 첫째이고 둘째는 교체되는 프랑스의 압제자들이다. 나폴레옹은 관을 열어 과거 이집트를 호령했을 미라와 본인을 동일시한다. 또한 나폴레옹은 프랑스인들에게 고대 로마의 시저로 비춰진다. 그런 나폴레옹은 끝내 전 유럽을 호령한 영웅이 됐고 英 해군 생도들은 그런 그를 흠모하고 있다. 그러한 생도들의 모습을 경계하는 웰링턴의 모습은 리들리 스콧이 직접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순간이라 봐도 무방하다.


 독재자로 전락한 로베스피에르의 모습과 나폴레옹의 쿠데타를 비롯하여 끝내 독재정으로 전락하고 마는 프랑스 혁명을 보여준다. 나폴레옹은 혁명 이후 일어난 일련의 압제자들과 다를 바가 없는 존재라고.


 하지만 이 모든 흐름은 전혀 연결되지 않는다. 영화 내내 선보여지는 장면은 나폴레옹과 그의 아내 조세핀이 벌이는 우스꽝스러운 ‘사랑과 전쟁’의 묘사일 뿐이다. 신중한 영국군과는 달리 어떠한 종교적 광신에 매몰돼 “황제 폐하 만세”를 외치며 뛰어나가는 프랑스군을 보여주는 워털루 전투의 장면처럼 모든 프랑스 대중을 쇼비니스트마냥 묘사하였음에도 스콧은 이에 대해 어떠한 대답을 내놓기를 거부한다. 결국 남은 것은 정신 나간 프랑스 광신도들과 그를 이끄는 추레한 독재자의 치정극뿐인데, 이것이 프랑스 혁명의 실패와 반혁명의 연속을 제대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는가? <나폴레옹>이 보여준 18세기 말-19세기 초의 프랑스란 영웅주의의 함정에 빠진 모습이라기보다는 미개한 국민성만이 존재하는 공간이다. 워털루 전투에서의 세련되고 침착한 영국의 모습과 대비되어 더더욱.


 오늘날 프랑스의 정치를 생각해보자. (그가 극우로 지칭되는 것은 서구 언론 특유의 호들갑이라고 생각하지만) 극우 정치인이라는 딱지가 붙은 프랑스 야당 국민연합의 당수 마 르펜은 선거 캠페인에서 리들리 스콧이 경계한 영웅주의를 요긴하게 사용한다. 예를 들어 프랑스를 영국으로부터 구한 잔 다르크과 자신을 동일시하려는 모습이 그러하다. 이루고픈 목표는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나폴레옹 전설을 비롯한 영웅주의 해체이나, 나폴레옹 시대의 프랑스인들을 죄다 미개인으로 만들고는 영국 뽕이나 빨고 있는 영화에서 어떤 정치적 영향력을 기대해야 할까?


 프랑스 대혁명을 소재로 한 정치 풍자 영화의 미덕을 보고싶다면 차라리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파블로 라라인의 신작 <공작>을 추천한다. 혁명 이후의 혁명과 반혁명의 대결과 결부 지어 칠레를 장악했던 피노체트 일가를 조롱하는 작품이다. 프랑스 혁명 얘기야 쥐꼬리만큼 나오지만, 본작보다는 훨씬 유효한 이야기를 담았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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