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메이르의 「버지널 앞에서 선 여인」

쉼보르스카의 『읽거나 말거나』(최성은 옮김, 봄날의 책, 2018)에서

by 장은수






요하네스 페르메이르,「버지널 앞에서 선 여인」(Lady Standing at a Virginal, 1670)
내 눈에는 다양한 질료들을 비추는 햇살의 눈부신 기적만이 보일 뿐이다. 인간의 피부, 실크 가운, 의자의 쿠션, 회칠한 새하얀 벽. 페르메이르는 기적을 되풀이하고 있지만, 끊임없이 새로운 변주와 참신한 매력으로 그것을 재현한다. (중략)

그림 속 여성은 버지널 위에 자신의 양손을 올려놓고 있다. 마치 우리에게 농담을 걸거나 아니면 뭔가를 상기시키고 싶어서 한 소절의 멜로리라도 들려주려는 듯 말이다. 특별히 예쁘다고는 할 수 없는 얼굴에 웃을락 말락 사랑스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 그녀는 우리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 있다. 그 미소에는 모성의 관대함과 사색의 깊이가 서려 있다.

300여 년의 세월 동안 그녀는 평론가들을 포함한 우리 모두를 이렇게 바라보는 중이다.


노벨문학상 수상 시인 쉼보르스카의 『읽거나 말거나』(최성은 옮김, 봄날의 책, 2018)에서 읽은 구절이다.

「버지널에 앉아 있는 여인」(Lady Seated at a Virginal, 1670~1675)

쉼보르스카가 언급하는 「버지널 앞에서 선 여인」(Lady Standing at a Virginal, 1670)은 요하네스 페르메이르(1632~1675)의 말년 작품이다. 유화로 런던의 내셔널갤러리에 있다. 이 작품은 「버지널에 앉아 있는 여인」(Lady Seated at a Virginal, 1670~1675)과 연작처럼 전시되고 있으나, 동의하지 않는 비평가도 있다.


그림 중앙에는 부유하게 차려입은 여성이 서 있다. 누구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이 그림의 첫 번째 소유자였다는 부유한 은행가 디에고 두아르테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녀의 앞에는 버지널이 놓여 있다. 버지널은 17세기 네덜란드 상류 계급이 선호하던, 하프시코드 비슷한 건반악기다.


언뜻 보아도 잘 사는 네덜란드 가정집이다. 벽에는 여러 장 그림이 걸려 있고, 바닥에는 흰색과 검은색 대리석 타일이 교차되면서 깔려 있다. 굽도리 널(걸레받이)은 델프트에서 직접 생산한, 흰색 바탕에 파란색 손 그림이 들어간 도자기 타일로 이루어져 있다.


대리석 바닥 타일 위에 나타나는 놀랍게 자유롭게 움직이는 선들을 보라. 화가는 타일의 형태를 정교하게 재현하는 임무를 포기한다. 그보다는 그리는 일 자체에 몰두해서 자신의 손이 기분에 따라 제멋대로 움직이는 것을 즐거워하는 듯하다. 이 자유로운 선들은 그러한 화가의 마음을 살짝 드러낸다.


여인의 부풀어 오른 파란색 슬리브에 나타나는 생기 넘치는 붓질 역시 페르메이르의 신들린 솜씨를 잘 보여 준다. 가벼운 회색으로 바탕을 칠한 후 붓으로 점을 찍고, 살짝 두드리고, 빠르게 스친 흔적들을 솜씨 좋게 배치함으로써 화려한 명암 대비 효과를 불러일으켜 비단천의 느낌을 두드러지게 만든다. 당시로서는 아주 혁신적인 솜씨다.


「진주 귀걸이 소녀」의 화가답게 여인의 목에는 ‘부의 상징’인 진주 목걸이가 걸려 있다. 아름다움과 사랑의 여신인 아프로디테는 진주에서 태어났다. 여인은 지금 절정의 아름다움으로 빛나고 있다.


여인은 풀 먹인 것 같은 뻣뻣한 새틴 드레스에 코르셋을 받쳐 입은, 실크 정장을 걸치고 있다. 단단한 뼈로 만든 코르셋은 무척 불편하기에 공식 모임이 있을 때에만 착용했다고 한다. 그녀는 관객 앞에서 아름다움을 한껏 강조하는 중이다.


옅은 미소를 띤 여인의 표정은 강직하다. 이 확신에 찬 이 표정이 관객의 눈을 그녀한테 집중시킨다. 하지만 이 그림은 확실히 초상화는 아니다. 여인을 똑같이 재현하는 것은 화가의 목적이 아니다. 화가는 여인 자체가 아니라 여인 너머에 있는 걸 그리고 싶어 한다. 무엇일까?


이 작품에 나오는 세 그림은 누구의 것인지 확실치 않다. 왼쪽에 있는 작은 풍경화와 버지널 뚜껑을 장식하는 그림은 확실히 비슷한 느낌을 준다. 페르메이르의 동료였던 피에트르 그뢰네베겐의 작품 「여행자가 본 산악 풍경(Mountain Landscape with Traveler)」를 본떴다는 설이 있다. 이 풍경은 ‘여성을 자연의 걸작’이라는 당대의 생각과 이어져 있다.

쉼보르스카의 『읽거나 말거나』최성은 옮김(봄날의 책, 2018)

왼쪽의 창문으로는 햇살이 쏟아져 들어온다. 당시의 화풍과 달리 바깥 풍경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여인의 내면을 드러내려고 화가는 일부러 바깥에 대한 사소한 호기심을 막아 버렸다. 이러한 세심한 미장센 운영은 페르메이르의 특징이다. 왼쪽 화면에서 막힌 시선은 자연스레 오른쪽으로 이동한다. 화가가 보여 주고 싶은 것은 버지널의 열린 뚜껑에서 솟아오르고 있다. 억압된 시각은 청각으로 귀환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여인은 버지널을 연주하면서 눈은 정면으로 관객을 바라본다. 버지널에서 울려나오는 노래는 도대체 무엇일까. 여인 뒤쪽 벽에 걸린 큐피드 그림이 해석의 단초를 제공한다. 이 그림은 정확하지 않지만 세사르 판 에베르딩엔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그림에는 ‘카드를 든 큐피드’ 모티프가 담겨 있다. 당시에 출판된 오토 판 벤의 『사랑의 우의화집』에서 나온 이 모티프는 “진정한 사랑은 오직 한 사람에게 바치는 것”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그려져 있지는 않지만 큐피드가 든 카드에는 숫자 1이 적혀 있을 것이다.


여인의 치마 왼쪽에 있는 타일에는 낚시를 든 듯한 큐피드가 새겨져 있다. 이 타일은 구혼과 낚시를 비교하는 전통적 사고를 반영하면서, 사랑의 분위기를 증폭한다. 버지널 앞에 놓인 의자도 살짝 여인의 마음을 거든다. 방 안에 놓인 유일한 가구인 벨벳 의자는 지금 비어 있다. 이는 연인의 부재를 암시한다. 여인은 연인을 그리워하는 중이다.


따라서 버지널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는 사랑의 노래일 수밖에 없다. 여인은 평화로운 풍경 속에서 사랑을 연주하고 있다. 사랑이 음악과 결합해 시를 낳는 중이다. 희랍의 시인 시모니데스의 말처럼, 그림이란 말 없는 시이고, 시란 말하지 않는 그림이 아니던가. 따라서 그녀의 사랑스러운 동작과 함께 지금 그림이 태어나는 중이기도 하다. 불멸의 그림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