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얼음을 깨는 맛
식당에서 밥을 다 먹을 때 즈음, 작은 찻잔에 후식이 담겨 나온다. 색깔을 보니 소화가 잘 되라고 주신 매실차 같았다. 마무리로 시원하고 달콤하게 한 모금 마실 수 있겠다 싶어 잔을 들었다. 기대와 달리 입 안에 알싸한 계피향과 달짝지근함이 확 퍼졌다. 수정과였다. 밖은 영하의 날씨였으니 수정과가 더 어울리는 조합이었다. 수정과를 한 잔 마시자, 프루스트의 마들렌처럼 그 수정과가 생각났다.
어릴 적, 겨울이 되면 늘 후식으로 제공되었던 음료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수정과와 식혜이다. 이 구역 최고 요리사였던 할머니는 겨울만 되면 수정과와 식혜를 직접 만드셨다. 당시 어린아이였던 내게도 이 집음료가 초콜릿우유만큼이나 맛있었던 이유가 있다. 먼저, 수정과에는 재미가 있었다. 할머니는 늘 수정과에 잣을 많이 올려주셨다. 이 잣이 굉장히 고소하고 맛있었는데, 맑은 적갈색 빛이 감도는 수정과 위에 동동 하얗게 떠다니는 나룻배 같은 잣들을 먼저 입으로 호로록하고 마셨다. 수정과를 조금 머금으면서 입 안으로 들어온 잣을 어금니로 살짝 씹으면 토독하고 터지면서 부드럽게 으깨져 고소한 향이 머리끝까지 전해졌다.
할머니의 요리에는 항상 풍성함이 있었는데, 그 풍성함은 어린 손주의 니즈를 충분히 채워주었다. 아이들에게 어쩌면 수정과의 계피향은 조금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러나 할머니의 수정과는 그리 강하지 않았고 무엇보다 수정과 안에 커다란 곶감이 들어가 있었다. 연시와 곶감의 중간 정도인 질감의 곶감이었다. 숟가락으로 철퍽하고 들어서 퍼내면 입안에 부드러운 곶감이 스르르 녹아내렸다. 그 달콤한 섬유질 사이사이에 슬쩍 스며들어있는 수정과의 존재감은 오뚜기 수프에 후추를 뿌린 것 마냥 아주 적절히 치고 빠지는 신스틸러가 되었다. 오히려 곶감을 더 촉촉하게 만들어주면서 단맛을 배가시켜 주는, 극에서 생각해 보자면 존재감 확실한 감초 역할의 베테랑 배우 같았다.
숟가락에 젓가락이 따라다니듯 수정과의 절친한 친구, 식혜도 우리 집 단골 겨울음료였다. 할머니가 만들어주신 식혜의 기분 좋은 달짝지근한 맛은 지금도 기억하면 그 맛이 감돈다. 할머니의 식혜는 비락식혜와는 달랐다. 먼저, 아주 달지 않으면서도 달콤한 맛이었다. 내가 딱 좋아하는 정도의 달콤함이었는데, 음료를 크게 마셨을 때 이 달콤함으로 인해 내 몸이 상하지 않으리라는 확신을 주는 단 맛이었다. 그런 단 맛의 효능이 실제 있는지 확인할 길은 없지만 할머니의 정성을 믿고 마음껏 마실 수 있었다. 좀 더 기억을 더듬어보자면, 식혜의 밥알을 빼놓을 수가 없다. 굉장히 부드러우면서도 쫀득하여, 씹는 식감이 찰졌던 식혜의 밥알들. 씹으면 질감이 단단하게 금방 굳는 공장식 음료와는 달랐고, 이 밥알들은 적절한 포만감도 주면서 내 속을 부드럽게 달래주었다.
추운 겨울이 오면 할머니는 식혜를 만들어 철제 들통에 담아 현관 앞에 내놓으셨는 데, 시간이 얼마 지나면 적절히 살얼음이 얼었다. 그 살얼음은 멋모르고 뛰어다녔던 어린아이였던 내게 찜질방 식혜에서 나오는 살얼음의 맛을 미리 경험시켜 주었다. 추운 겨울인데도 뭐가 신이 났는지 하교 후, 달리고 달려 집에 도착하면 그 식혜가 있었다. 바깥 온도는 차가웠지만 달리면서 온 까닭에 빨갛게 양볼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숨을 급하게 내쉬면서 도착한 문 앞에서 할머니가 바로 내주시는 식혜 한 사발을 마시면 양볼이 금방 식었다. 바람은 차갑고 식혜는 시원했는 데, 기분은 좋았다. 이렇게 내 유년시절을 책임졌던 우수정과 좌식혜가 있었다.
가끔 마트에 들르면 식혜를 찾을 때가 있다. 옛날이 생각나서이기도 하고 가끔 생각날 때가 있지만 무엇보다 할머니와의 추억이 생각나기 때문이다. 손주에게는 식혜를 만들어 주셨지만 본인은 비락식혜를 좋아하셨다. 식혜를 만들지 않았던 계절에도 자주 사 드셨던 것을 본 기억이 있다. 그래서 할머니께서 연로하셨을 때 비락식혜를 찾아 꼭 사다 드렸다. 할머니가 만들어주신 멋진 요리에 비해 생각해 보니 너무 작은 것을 드린 것 같다. 더 자주 더 많이 사다 드렸어야 했는데, 말이다. 큰 국자로 식혜 한 사발 크게 퍼서 그릇에 담아주시면, 양손을 받아 시원~하게 마시던, 뱃속 가득히 밀려오는 그 따뜻한 달콤함이 추울 때마다 생각난다. 내일은 식혜 판매하는 곳이라도 찾아 나서야지 싶은 겨울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