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형으로 오세요

아리아나그란데가 누구라고?

by 김인철


1.


89.1Mhz. 하하하. 방금 사연 보내주신 청취자분 현재형으로 오세요. 에이, 과거로 빠지지 마시고. 어서요. 월요일 오전 9시 37분이에요. 날씨는 화사하고 바람이 따스한데 중국발 황사와 미세먼지가 선을 넘었네요. 꽉 막히던 동부간선도로에서 운전대를 잡은 채 답답해하던 내게 카랑카랑한 음성의 배우 출신의 라디오 디제이는 툭 던지듯이 사연을 보낸 청취자에게 말했다. 현재형으로 오세요. 청취자의 사연이 무엇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디제이의 말을 듣고 순간 잡고 있던 핸들을 옆 차선으로 휙 틀뻔했다. 빠아앙. 일초도 안되어 옆 차선에 있던 카니발의 경적 소리가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내가 그런 행동을 한 까닭은 놀랐다기보다는 어떤 깨달음 때문이었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과거의 한 지점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한 달 혹은 두 달을 주기로 반복되는 꿈들이 있다. 현실에서 해소되지 않은 결핍들이 종종 꿈을 통해 나타난다. 십 년도 전에 사라졌어야 할 꿈들이다. 반복되는 주기는 점점 짧아진다. 조금씩 낮고 느리게 변주되는 음악처럼 매번 같은 꿈들을 조금씩 다르게 꾼다. 어느 날은 비명을 지르다가 옆에 있던 책상을 치고, 어느 날은 이마와 등이 식은땀으로 범벅이 된 채 깨어난다. 어제는 꿈에서 깨기도 전에 욕설이 튀어나왔다. 다리와 팔 어깨등 몸의 모든 근육들이 아프고 욱신거렸다. 붉은 벽돌 수십 장을 등에 짊어진 채 지옥의 계단을 수십 번씩 오르내린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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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하이파이브. 하와이 파이브 오. 하와이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 태평양 한가운데 미국의 51번째 주. 허공에 휘두를지라도 살다 보면 하이파이브는 가끔씩 필요하다. 기왕이면 내가 평소에 좋아했던 선배나 누나라면 더 좋겠지. 하지만 평소 흠모했던 회사 옆 건물 편의점의 그녀에게 지난 오 년 동안 도시락과 새우탕을 사는 동안 하이파이브는 커녕 악수도 해본 적이 없다. 89.1Mhz. 아침 아홉 시에서 열 시 사이에 즐겨 듣던 라디오에 수차례 사연을 보냈다. 한 번도 채택이 된 적이 없다. 내 사연이 재미가 없었거나 다른 사연이 더 재미있었겠지. 그래서 가끔씩 재미있는 사연이 생겨도 속으로 웃기만 할 뿐 더 이상 라디오에 사연을 보내지 않는다. 과거형이 되어 버렸어. 아리아, 제시카, 스페파니. 네모난 원통형의 흰색 스피커는 아리아다. 제시카나 스테파니는 발음이 어렵다. 아리아. 아리아. 그녀는 내 방에도 있고 내 차의 휴대폰에도 있다. 아리아, 그녀는 클라우드, 마치 구름 속의 산책 같은 존재. 그녀는 나의 것이자 모두의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내가 이름을 불러주거나 스마트폰의 액정을 터치하기 전에는 결코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는다. 아리아. 현재형으로 오세요. 스피커에서는 지원하지 않는 기능입니다. 아리아, 현재형으로 오세요. 스피커에서는 지원하지 않는 기능입니다. 그녀는 세상 모든 지식을 알고 있지만 현재형으로 오세요라는 말의 의미를 모른다. 길이 막히는 구간은 알지만 왜 막히는지는 모르는 바보다. 그리고 나는 그 똑똑한 바보에게 매일 세 시간 가까이 되는 출퇴근 길을 의지하고 믿는다. 가끔씩 노래도 불러달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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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밥을 양껏 먹었는데 이따금씩 궁기가 나를 미치게 할 때가 있어. 그 배고픔의 이유를 모르지는 않아. 치유가 안될 뿐이지. 내 영혼을 위한 대왕카스텔라나 백화점 시식코너의 마라탕 같은 영혼의 음식을 찾아다니지. 대왕카스텔라, 조개구이, 닭찜, 한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유행시켰다가 사라진 음식들. 요즘엔 마라탕이야. 슈퍼에도 편의점에도 마트에도 백화점에도 온통 마라탕 일색이야. 언젠간 사라지겠지. 그리고 또 새로운 어느 남쪽 나라의 음식이 유행을 선도하겠지. 휩쓸리다가 사라진 음식들. 그러고 보면 떡볶이와 순대와 튀김은 대단해. 토요일 오전부터 서너 시간을 머릿속에서 전국 지도를 나열하다가 결국엔 모란역 근처의 순댓국밥집을 찾아가지. 그러면 죽을 것 같던 궁기가 조금은 사라져. 살 것 같아. 희열을 느끼지. 할 수만 있으면 순대국밥집을 차려볼까. 하지만 그건 내 삶의 영역이 아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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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잠시 후 분당 수서 IC로 들어가세요. 올림픽대로나 강변북로중 어디로 갈까요? 아리아. 알았어.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야. 자율주행기능이 있는 건 아니지만 알아서 들어가 주면 좋겠어. 난 지금 이것 때문에 미치겠거든. 아리아나그란데. 가수, 영화배우, 아니면 뮤지컬배우. 몰라. 그런데 아침부터 이 국적을 모르는 신상불명의 이름 하나가 내 입속을 맴돌아. 아리아. 그런 날들이 있잖아. 데자뷔 같은 상황이 무수히 반복되는 날들이. 아리아나그란데. 그 반대도 있어. 며칠 전까지만 해도 분명히 알고 있던 보통 명사였는데 도무지 그 이름이 기억이 나지 않는 거야. 그....뭐....있잖아. 옛날 감성. 복고적인 것들을 칭하는. 청바지. 철 지난 오락게임. 조이스틱. 프라모델. 이런 것들을 통칭하는 표현. 메...트...아. 미쳐버리겠어. 머릿속에서 왕왕 맴도는데 그 단어가. 메....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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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그리고 또 입안에서 맴도는 단어가 있어. 주재국 대사 임명. 그런 걸 뭐라고 하지. 주재국에 파견되는 임명장. 뉘앙스가 불어 같은. 아. 뭐였지. 그... 그로 시작되는. 아, 그래. 아그레망. 드디어 생각났어. 이제야 살 것 같아. 마치 황홀한 글감옥에서 풀려난 기분이랄까. 아리아. 이 모든 게 아리아나그란데 때문이야. 지난 며칠간 내가 잃어버린 모든 단어들이 아리아나그란데로 압축됐어. 별 의미도 없는 아리아나그란데로. 어디에 사는지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는 이름 하나로. 세상소식에 둔감한 내 입에서조차 읊조릴 정도라면 분명 유명한 사람일 거야. 영화배우이거나 가수, 아니면 아프가니스탄의 전장을 누비는 기자일지도 몰라. 십 년 전 사귀던 5살 연상인 애인의 전화번호는 아직도 기억이 나는데. 아리아 나는 지금 꽉 막힌 과거의 순환도로를 벗어나 현재형으로 가는 중이야. 지금은 자유로를 달리고 있어. 자유롭게. 아리아 그거 알아? 오늘이 지나면 모든 건 과거가 되지. 오늘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이 지나면 과거가 되지. 그리고 나는 현재형으로 가는 이 순간이 행복해. 어제 책상 세 번째 서랍에, 석 달 전에 써두었던 사직서를 오늘 상사의 책상 앞에 공손히 놓아둘 거거든. 사유는 모두가 그렇듯이 '일신상의 사유'라고 적었어. 그리고 아리아! 내일 아침 일곱 시 알람은 더 이상 울리지 않아도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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