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인철 Aug 21. 2023

17만 원을 주고 뮤지컬 '모차르트'를 관람했다.

내돈내산 뮤지컬 모차르트 관람 후기.


폭염이 여전하다. 하지만 무섭게 맹위를 떨치던 여름의 끝자락이 보인다. 난 여름이 싫다. 지금껏 살면서 여름이 좋았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에어컨이 없던 여름을 어떻게 견뎠는지 상상이 안 간다. 하지만 내 주변엔 의외로 여름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다. 선선한 봄과 가을이 좋았지만 요즘은 그 계절들조차도 심드렁하다. 태생적으로 차가운 심장 때문일까, 겨울은 견딜만하다. 계절에 상관없이 나는 모든 것들에게 주변화 되고 헉헉거린다. 영화 '오베라는 남자'처럼 내 삶의 반경 1.5미터를 살고 있다. 


전 직장 동료들과 뮤지컬 '모차르트'를 관람했다. 광화문 옆 세종문화회관 앞에 섰다. 거대하고 단단한 콘크리트 벽이 광장에 우두커니 서있던 나를 압도한다. 내가 감당할 수 없는 공간에 있으면 경외심이 들면서 한편으로 위축이 된다. 나를 제외한 이들은 모두 이 공간을 소유하는 게 당연하듯이 그들의 말과 행동은 자연스럽다. 



뮤지컬을 보기 위해 몇 년 전 산 구두를 꺼냈다. 먼지를 털어내니 검정구두가 마치 어제 산 것처럼 새것 같다. 한 달에 한두 번 신을까 말까 한 검정 구두가 내 두 발을 압박한다. 또각 또닥. 콘크리트 바닥을 걷는 느낌이 나쁘지 않다. 동시에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 속에서. 나를 향해 와락 달려드는듯한 저 거대하고 높은 건물을 보자 감춰두었던 불안이 엄습한다. 하지만 나는 내면에서 솟는 불안한 심리를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기로 다짐한다. 구두를 신고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걸었다. 


17만 원을 주고 구매한 뮤지컬 '모차르트' 티켓


세종문화회관. 1층 공연장 입구에서 직원에게 뮤지컬 티켓을 받았다. 티켓을 건네는 직원은 자신이 하는 일에 자부심이 넘쳤다. 그럴만도 했다. 그녀가 건네는 뮤지컬 티켓값 한장이 무려 17만 원이다. 티켓을 받기 전까지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티켓에 적힌 숫자 17을, 그리고 뒤에 따라오는 숫자 0 4개를 보는 순간 나는 알 수 없는 감정에 휘말렸다.



 17만 원이면 할 수 있는 것들이 많다. 영화관에서 최신 영화를 열 편 볼 수 있고, 안방에선 넷플릭스를 15개월 이상 볼 수 있고, 2011년식 그랜저 HG로 두 달은 너끈히 기름을 넣을 수 있다. 그러니까 17만 원을 주고 뮤지컬 티켓을 구입한 행위는,  모임 중 누군가 제안하고 모두가 결정하지 않았다면. 나 스스로는 결코 하지 않았을 결단이다.


인생, 수단이 아닌 목적을 위하여.


요하네스 크리소스토무스 볼프강 고틀리프 모차르트. 18세기의 위대한 예술가는 이름조차 길고 거창하다. 그의 길고 현란한 이름에 비하면 내 이름 석자 김.인.철은 짧고 소박하다. 유한한 인간의 삶의 영역은 다양하다. 정치, 경제, 과학, 그리고 예술과 문학. 사람들은 말한다. 전자는 인간의 삶에서 수단이고 후자는 목적이 되어야 한다고. 하지만 현실은 반대인 경우가 많다. 수단에 얽매여 목적을 잃어버린 삶이 대부분이다. 인생은 수단이 아닌 목적이 되어야 한다. 오늘 하루만이라도, 아니 매일매일 그래야 한다.


출처-세종문화회관 홈페이지


공간이 주는 아우라, 그리고 여우와 신포도


뮤지컬 모차르트 관람석은 V.I.P석이다. 1층 C열이다. 몇 시간이지만 만 원짜리 17장에 나는 매우 중요한 사람이 되었다. 순간 나도 모르게 어깨가 으쓱해졌다. A석이 주는 공간의 아우라. 자리가 좋으니 배우들의 표정과 목소리가 생생히 들린다. 크리스마스 칸타타, 금강, 남한산성. 내돈내산이 아닌 뮤지컬이나 오페라 관람석은 대부분 1층이 아닌 2층 오른쪽이나 왼쪽이었다. 이솝우화에 나오는 '여우의 신포도'처럼 보고 싶지 않아서, 먹고 싶지 않아서, 가고 싶지 않아서가 아닌 태생적으로 주어진 환경 때문에 포기했던 욕망들, 그러니까 하고 싶지 않은 게 아니라 일부러 외면하던 삶이었다. 이젠 할 수 있는 것들은 하자. 남들에게는 사치와 허영으로 보일지라도.

출처-세종문화회관 홈페이지

클래식한 무대와 의상. 그리고 찢어진 청바지


뮤지컬 배우들은 모두 18세기에 맞는 고전적인 무대와 옷을 입었다. 하지만 주인공 모차르트는 공연 내내 찢어진 흰 셔츠(혹은 블라우스)와 청바지를 입었다. 그는 왜 찢어진 청바지를 입었을까? 자유. 자유. 함께 공연을 본 이들의 일관된 생각이었다. 그의 아버지에게도 대주교에게도 황제 폐하에게도 속박되고 싶지 않은 자유를 향한 갈망... 카리스마 넘치던 대주교도, 허세 가득한 황제도, 매혹적인 음성의 남작 부인도, 그의 연인 콘스첼라도 사라졌다. 하지만 자유를 갈망했던 모차르트만은 그의 음악을 통해, 시간을 초월해 여전히 사람들의 의식에서 살아있다. 


출처 -세종문화회관 홈페이지

화려한 무대와 의상, 객석까지 확장되는 화려한 조명


공연이 펼쳐지는 내내 무대는 화려했고 형형색색의 의상들은 아름다웠다. 무대를 넘어 객석까지 확장되는 LED조명은 함께 공연을 본 지인들을 황홀경에 빠트렸다. 주연부터 단역까지 뮤지컬 배우들의 높은 성량과 넘치는 카리스마, 아름다운 목소리, 자유를 부르짖던 위대한 예술가의 절망과 구원에 이르는 지난한 과정들, 내가 감당하기엔 너무나 거대한 이야기다. 


공연장을 나오며 그런 생각을 했다. 뮤지컬 모차르트는 내가 지금까지 보았던 과거의 뮤지컬과는 무엇이 달랐던 것일까? 그것은 단순히 더 풍성한 시각과 청각의 희열을 넘어서는 그 이상의 영역이었다.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잠시 후 깨달았다. 타인의 인정이나 호의가 아닌 순수한 나의 돈으로 뮤지컬 티켓을 끊었다는 사실을. 그 한계를 넘은 결심이....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가시지 않는 뮤지컬의 진한 여운을 즐기며... 살리에르가 질투한 모차르트의 음악적 재능에, 아버지의 과도한 기대에 절망하던 그와, 존재감 없던 나의 삶의 무게를 잠시 비교해 보았다. 그는 예술을 사랑하는, 혹은 그렇지 않았던 이들에게조차 위대한 존재였지만, 나의 삶에서는 미미한 존재였다. 그가 작곡한 피아노 협주곡들은 내 삶에서 단지 아름다운 풍경의 배경일 뿐이었다. 모차르트는 내 1.5미터 삶의 반경 바깥의 인물이었다. 내 평면의 삶에선 그의 복잡한 삶이나 예술을 향한 절망과 고뇌는 한 여름날 무더위의 배경에 지나지 않았다. 이 뮤지컬을 보기 전까지는... 


8월의 끝자락이다. 여름은 아직 물러나지 않았고 드넓은 바다를 자궁으로 삼은 태풍은 아직 이름만 붙지 않았을 뿐 몇 개가 더 남았다. 9월의 마지막 태풍에 붙여질 이름은...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작가의 이전글 나쁜 꿈을 꾸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