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발생한 용산 참사를 모티브로 한 영화가 있다. 소수의견이다. 용산참사. 일주일 전의 기억도 가물가물한 내게 십 년도 전에 벌어진 용산 남일당 건물의 참사는 까마득하게 잊힌 사건이 되었다. 용산 참사가 나고 희생자를 위한 미사에 한번 참석한 적이 있다. 재개발, 철거민, 용역, 그리고 망루. 사회고발성 영화를 추적 60분이 아닌 대형 스크린으로 보는 건 드문 경험이다. 나의 비극이 아닌 남의 비극이기에. 어쩌다 보니 이전에 다니던 두 직장이 재개발 지역이 되었다. 지금 이십 년이 넘게 사는 동네의 골목에도 재개발이라는 그림자가 길게 드리우고 있다.
소수의견. 겉으로 드러나지 않을 뿐 소수의견(목소리)은 우리 주변 어디에나 있다. 우리가 모르던 진실을, 외면하던 사실은, 결국 때가 되면 드러난다. 그렇게 믿고 싶다. 지난 몇 년간 경험했듯이. 하지만 그런 경험은 적을수록 좋다. 생존 투쟁을 벌이는 참혹한 역할에 빙의된 듯 실감 나게 연기하는 배우에 감동하고 나면 전에 없던 삶 속에서의 실천의지가 다시 불타 오르거나 최소한 반성이라도 해야 하는 건가? 이 영화의 원작자나 감독은 그런 것을 의도했을까.
"내 아들을 죽인 건 용역이 아니라 경찰이야"
철거민 박재호(이경영 분)는 가해자이자 피해자다. 그가 법정에서 절규하듯 내뱉는 이 말은 소수의견의 무력한 자기 항변이다. 제작 의도가 분명한 이 영화는, 그런 소수의견의 목소리에 청진기를 대고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아이돌에서 완벽한 변호사로 분한 윤진원(윤계상 분), 운동권 386세대의 빛과 그늘을 상징하는 장대석(유해진 분), 아무도 관심 갖지 않은 철거민의 재판을 파헤치는 공수경 기자(김옥빈 분), 그리고 국가의 절대 권력을 대변하는 홍제덕 검사(김의성 분).
다수의 이익은 강자의 이익?
국가라는 '권력'에 의해서 소수의견은 언제나 다수의 이익을 위해서 묵살당한다. 세상은 원래 그렇게 생겨 먹은 것이라고 치부해 버리면 하루하루를 살기에도 벅찬 나는 너무 나약한가? 아니면 그렇게 생각하도록 길들여진 것일까? 그래서 한 달에 한 번씩 모이는 직장의 독서모임에서 이 영화를 보자는 제안을 받았을 때 차라리 이병헌이 액체 로봇으로 등장하는 '터미네이터 제네시스'를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아무 생각 없이 때리고 부수는 영화는 보면서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으니까.
영화는 용산으로 상징되는 참사가 벌어진 후의 과정을 법정이라는 공간에서 드라이하게 풀어낸다. 영화 속 인물들은 각자의 상황에 따라 분노하고 슬퍼하고 치를 떤다. 그렇지만 다른 법정 영화가 보여 주듯이 눈물과 신파로 흐르지 않는다. 영화는 시종일관 묵직하고 침울하다. 유해진식의 익살스러운 유머는 없다. 그는 속물이지만 이상과 현실 속에서 386 운동권의 고뇌를 상징한다.
영화 속으로 좀 더 깊이 들어가 보자.
영화의 첫 장면은 카메라를 아래에서 위로 잡아내며 철거 현장의 어수선함을 건조하게 보여준다. 초반부를 실제 참사 현장에 있는 것처럼 생생히 보여준다. 철거민, 용역, 잔뜩 겁을 먹은 표정의 전경들. 하지만 이들을 화염이 가득한 사지로 몰아넣은 자들은 얼굴을 보이지 않고 목소리만 들린다. 그 목소리의 명령에 따라 무리하게 진압을 펼치는 도중 경찰이 죽고 철거민의 아들이 죽는다.
영화는 그들이 왜 철거민이 되고 망루에 올랐는지 자세히 보여주지 않는다. 단지 이 영화는 빙의라도 된듯한 배우들을 통해 '국가란 무엇인가?'를 묻는다. 그리고 국민참여재판을 통해 관객과 사람들에게 소수의견을 위한 연대와 소통을 이야기한다. 이 지점은 [변호인]에서 밤을 새워 가며 E.H 카를 읽던 송우석 변호사의 외침을 상기시킨다.
'희생'과 '봉사'의 다른 의미
이 영화에서 '희생'과 '봉사'는 내가 알던 의미와 다르다. 송재덕 검사의 일갈처럼 '희생과 봉사'는 국가 존속을 위한 수단일 뿐이다. 따라서 소수의견은 당연히 묵살될 수 있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철거민 참사의 근본은 여기에 있다. 위 주장이 맞다면 나는 희생을 당한 것도 아니고 봉사를 한 것도 아니다. 보이지 않는 이들을 위한 대리자였을 뿐이다. 세상을 조금만 깊숙이 들여다보면 '자기를 공격하는 자들을 앞 세워서 자기를 방어하는 상황'들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세상은 늘 그래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기에. 적들을 향해 외치던 목소리는 스스로를 향한 비수가 되어 사랑하는 사람들의 팔과 머리, 가슴에 꽂힌다.
이 영화의 진정한 리얼리티는 결말에서 확인된다. 영화에서만이라도 사이다를 맛보고 싶었다. 하지만 해피엔딩이었다면 가장 리얼한 판타지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희망을 말한다면 소수의견은 자기 항변의 의지라도 있다는 점이다. 박재호의 절규처럼. 나처럼 소심한 다수는 손해를 보더라도 침묵 속에서 자기 항변을 포기한다. 철거민들은 자기 항변을 포기하지 않았기에 극한의 상황으로 내몰렸지만. 소수의 항변은 다수의 침묵보다 크다. 그 소수의견의 항변과 무력한 외침들이 우리 사회의 진보를 한 발자국씩 떼지 않았을까. 국가와 역사의 발전이라는 측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