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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omme soupe Aug 24. 2021

프랑스 떡국





프롤로그


 프랑스 여행의 기록을 다시 정리해 남기기로 마음먹었다.

서랍에 꼭꼭 넣어두고 어지간한 일이 아니면 찾는 일이 없는 외장하드를 꺼내 19.6 France 라 적힌 폴더를 열었다. 폴더에 갇혀있던 공기가 훅하고 불어닥쳤을 때, 가장 익숙한 자리 내 생활의 냄새가 잔뜩 배어있는 침대 위에 앉아 나는 잠깐 가벼운 멀미를 했다. 얼마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사진 속 아이들은 무척 어리고 남편의 얼굴은 앳띄며 나는 다시는 지을 수 없을 것 같은 옛날 표정(무언지 모르게 옛날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을 짓고 있었다. 사진을 자세히 넘겨볼 생각도 못하고 멀미가 가라앉기를 기다리면서 폴더 속에 담겨있는 먼 나라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았다. 맞아 여행은 이런 기분이었지.


 여행에 던져졌을 때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가장 예민한 감각을 곤두세우게 된다고 한다. 모든 것이 낯선 시공간에서 실제로 믿을 수 있는 대상은 오직 나 하나이기 때문에 아무리 무던한 사람도 자신에게 집중하기 위해 감각을 모은다. 모르는 글자들이 적힌 지도 안에서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의 방향을 찾기 위해 팔을 내두르며 본능적으로 동서남북을 그린다. 몸에 적응되어있는 시차를 지우기 위해 평상 시라면 해가 뜨니 아침이군 해가 지니 밤이로군 무덤덤하게 지내오던 시간을 예민하게 관찰하기 시작한다. 조금 더 일찍 눈이 떠지고 조금 더 늦게 밤을 맞게 되는 것은 낯선 여행지의 이방인이라면 절로 얻게 되는 긴장감 때문이었다.


 비행기 타는 것을 무서워하는 나는 비행기를 탈 수밖에 없는 먼 거리까지 가고 싶은 마음이 별로 없다. 집이 좋고 집에 머물며 할 수 있는 일들을 좋아한다. 눈을 감고도 걸을 수 있는 동그라미 같은 마을을 산책할 수 있으면 그걸로 족하다. 어느 산책 길에 안 가본 골목을 기웃거리고 늘 먹던 소스에 레몬을 조금 더 짜넣어 본다거나 어쩌다가 모르는 장르의 음악을 한 곡쯤 듣는 정도의 아주 사소한 변화를 좋아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가닿은 가장 먼 곳의 공기가 담겨 있는 이 폴더를 열어보고 싶어 졌다는 것은 그리움이라고 밖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을 것 같다. 낯선 여행지에 던져진 이방인처럼 예민한 감각을 곤두세우고 내가 정한 동서남북을 향해 걸으며 조금 아픈 것 같기도 한 낯선 긴장감을 느껴보고 싶어졌다. 그 긴장감 안에서 앓다가 눈을 떴을 때, 가장 익숙한 내 자리 내 생활의 냄새가 잔뜩 배어있는 침대 위라는 것에 크게 안도하고 싶다. 정말로 다시 느껴보고 싶은 마음은 '다시 집에 돌아왔다.'라는 안도감. 아이러니 하게도 멀리 떠나보지 않고는 느낄 수 없는 기분이었다.
















 


인천 - 하노이 - 파리


여름에서 출발해 긴 새벽을 날아온 비행기 창에는 거짓말처럼 성에가 붙어있었다.

차가운 창에 이마를 대고 이따금씩 소금처럼 날리는 눈발을 구경했다.















charles  de  gaulle  airport



인천 - 하노이를 거쳐 프랑스 샤를 드골 공항에 도착했다.

14시간의 비행 후 두 아이는 캐릭터대로 도착의 기쁨을 표현했다. 요약하자면 비장함과 개방정.

(지금은 내 코까지 머리가 닿는 큰 아이가 이렇게 작고 마른 아이였다니. 시간이 새삼스럽다.)

















p a r i s. 15 e

 


무척 예민하고 촌스러운 나는 멀미가 대단하다.

최소한의 비위를 지키기 위해 비행 내내 쫄쫄 굶었던 터라 너무 허기가 져서 파리의 골목에 들어서자마자 1.5유로짜리 커다란 바게트를 샀다. 어떤 것을 골라야 하나 고민하는데 내 앞에 머물렀던 할아버지도 키가 큰 청년도 서슴없이 그것.이다는 느낌으로 답삭 잡는 것을 잘 봐 두었다가 나도 얼른 따라 샀다.

얼마나 맛이 좋은지 선 채로 그 큰 것을 다 먹어치웠다.













이렇게 예쁜 창이 있는 방에서 오늘을 지낸다.

우리의 첫 숙소는 파리의 낡고 작은 5층 아파트.


















이 순간이었나 보다.


공항은 너무 붐볐다. 30 - 40분이면 된다던 입국 심사 줄을 1시간 반이나 서있었다. 비행도 별 탈 없이 잘 끝낸 아이들인데 이 줄을 서있는 동안 좀 지쳐버렸다. 남편과 나는 짐을 찾고 징징거리기 시작한 아이들 손을 잡아 화장실에 들르고 차를 빌리느라 꽤 예민해졌다. 구구절절 소소각각.


여행을 앞두고 잠들기 전 밤마다 남편과 구글맵을 열어놓고 보고 또 보던 파리 비올레가의 아파트.

침대방의 반쯤 열어놓은 창으로 정말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창에 걸어 놓은 하얀 커튼이 나플 거리던 순간. 아이들을 잘 챙겨 무사히 도착해야 한다는 책임감으로 꼭꼭 싸안은 마음. 14시간의 비행 동안 나달 나달 해진 그 마음의 포장지 한 귀가 절로 열리면서 어린아이 같은 설렘이 툭하고 쏟아져내렸다.


아. 내가 파리에 왔다니!


















파리의 날씨


6월의 프랑스는 11 - 20도 사이의 어디 즈음.

한국의 가을 날씨와 비슷하니 얇은 긴팔 위주로 준비하라는 글을 많이 읽었다. 비 예보도 있었고 심지어 새벽녘 눈 예보도 있었다. 넣었던 반팔을 거의 다 빼고 입고 벗기 편한 긴팔 셔츠와 혹시 몰라 두께가 있는 맨투맨 니트를 말아 넣었다. 이른 아침 공항 밖을 나서면 아이들 옷 위에 바로 덧입혀야지 하는 마음으로 바람막이 점퍼를 챙겼는데. 참 무안하게 만든 이 날의 날씨.


아아 이 종잡을 수 없는 파리의 아름다운 날씨여.






























자기 자리를 딱 알아본 걸까.

엄마 아빠가 짐을 정리하는 동안 너무나 자연스럽게 노트와 펜을 꺼내 들고 앉아 조용히 그림 그리며 놀고 있던 태오. 여행을 준비하며 아이들에게 손바닥만 한 노트를 한 권씩 사줬는데 그림 그리는 것을 무척 좋아하는 재희보다 오히려 태오가 더 좋아하고 그림도 많이 그렸다.




















프랑스 떡국


바람 부는 창가에 누워 딱 한 시간만 자고 싶었다.

긴 비행 동안 겨우 이만 닦았다. 이곳에 도착해 따뜻한 물에 샤워를 하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으니 긴장이 풀리면서 등을 대고 좀 자고 싶다는 생각만 들었다. 그런데 재희는 자꾸 배가 고프다고 했다. 비행 내내 뭐든 잘도 먹어서 기특했는데, 뱃속에 쌓기만 했을 그 음식들이 소화가 되었을 리 없건만 이 녀석이 자꾸 배가 고프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그건 일종의 잠투정이었다. 10살은 긴 영화를 보고 실컷 게임을 하고 기내식을 먹고 또 먹었다. 그 긴긴 비행 동안 거의 잠도 자지 않았고 한껏 부풀어 있는 중이었다. 피곤하지 않은 게 아니라 너무 좋아서 피곤한 것을 잠깐 까먹고 있는 이상현상이었달까.


헤비 딱지를 붙인 30킬로짜리 캐리어를 5층까지 지고 오르느라 땀범벅이 되었던 남편의 이마에 방전 불이 깜빡거리는 것이 보였다. 거의 화내는 일이 없는 남편의 콧등에 주름이 잡혔다. 내가 녀석을 얼러 30분만 누워 쉬어보고도 배가 고프면 먹을 것을 만들어주기로 했다. 나비처럼 열어놓은 캐리어에 한국에서 가져온 인스턴트 떡국 봉지가 보였는데 녀석이 안 자고 그걸 자꾸 만지작거렸다. 너희들이야 어떨지 몰라도 엄마 아빠는 정말 한숨도 못 잤어! 하고 남편이 결국 큰소리를 냈다. 휴,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나가 보니 남편의 화가 난 등은 냄비를 꺼내 닦고 한국에서 가져온 삼다수를 부어 인스턴트 떡국을 끓이고 있었다. 재희가 앉으니 태오도 먹겠단다. 남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떡국을 반으로 나눠 담아 아이들에게 내밀었고 녀석들도 아무 말 없이 떡국을 먹었다. 떡국을 깨끗이 다 비우고는 모두 쉴 곳을 찾아 누웠고 곧 곯아떨어졌다.


재미있는 것은. 재희는 아빠가 그때 끓여준 떡국이 정말 맛이 없었단다. 모두가 괜찮은 컨디션으로 돌아오고 기분도 좋아졌을 때 녀석이 뜬금없이 그렇게 말했다. 남편이 너 엄청 맛있게 먹었잖아! 하고 놀라 물었다. 다 비운 그릇을 내가 치웠기에 나도 놀랐다. 엄청 싱겁고 떡은 너무 물러서. 그런데 맛있게 안 먹으면 진짜 혼날 것 같았어. 라며 녀석이 멋쩍게 웃었다. 그런 생각을 다하다니 아빠 표정이 심상치 않긴 했나 보다. 수프 넣고 물만 끓이면 되는 인스턴트가 맛없을 리가 없는데. 화가 난 사람의 요리는 어떻게 해도 맛이 없는 법이다. 게다가 태오는 집에서 내내 맛있게 먹던 떡국 맛이 이상해서 아아 프랑스 떡국은 맛이 이렇구나 하고 생각했단다.

















파리의 작은 5층 아파트


에펠 타워까지 산책하듯 걸어 15분 거리의 작은 아파트.

식료품 가게와 카페 꽃집들이 옹기종기 모인 예쁜 골목에 있어 여행 첫 숙소로 잡고 싶었다. 다만 파리의 여느 집이 그렇듯 엘리베이터가 없는 곳. 게다가 5층이었다. 다 좋은데 계단이 가파르고 좁아 짐 올리기가 어렵대. 후기를 읽고 고민했더니 남편은 트렁크 하나 설마 못 들고 오르랴 했다.


우리의 짐은 커다란 트렁크 하나인데 열 살 재희 무게였다. 경유를 했기에 두 번 비행기를 오르내리는 동안 우리 트렁크에는 헤비.라는 딱지가 붙었다. 아이들을 먼저 올려 보내 놓고 남편이 앞에서 들고 내가 부축하듯 아래를 잡아 한층에 한 번씩 쉬며 겨우겨우 트렁크를 옮겼다. 이건 정말 학 소리가 날정도로 힘들었다.






나사의 홈처럼 동그라미를 그리며 오르는 나무 계단은 얼마나 나이를 먹은 것인지 걸음 닿는 부분이 반돌반돌 닳아있었다. 외출을 할 때마다 태오는 이 재미난 계단을 얼른 내려가고 싶었다. 팔랑팔랑 겁도 없이 뛰어다니는 태오는 계단에서 곧잘 넘어질뻔해서 내가 항상 손을 꼭 잡는다. 그런데 요 녀석이 엄마 손 안전 브레이크를 달기도 전에 아직 준비 중인 엄마 눈치를 보며 발을 동동동 예열하고는 혼자 부릉부릉 출발을 해버렸다. 얼른 따라나섰더니 저 밑에서 엄마 때오 먼저 내려간다 하는 소리가 뒤늦게 올라왔다. 아 이 녀석의 선출 발 후통보 란.

걱정되는 마음으로 내려다보니 반질반질한 나무 손잡이를 꼭 잡고 뱅글뱅글뱅글 탓탓탓. 생각보다 찬찬히 한 계단씩 한 계단씩 잘 내려가고 있었다. 천쩌니 천쩌니 하는 태오의 혼잣말이 녀석의 찬찬한 발걸음 박자에 맞추어 들려왔다.


8자리 비밀번호 키도 아니고 카드키나 지문인식 시스템이 있는 도어록이 아니라 구멍에 열쇠를 끼워 돌려 여는 문고리라니. 소매치기와 밤 강도가 있는 허술한 치안 속에서 또각하고 빗장이 걸리며 잠기는 이 잠금쇠 하나가 이 아파트 방범의 전부. 그런데도 또각 하고 잠기는 소리를 들으면 충분한 기분이 들었다. 이 잠금쇠마저도 로맨틱하게 느껴졌다면 아무래도 반한 거지. 파리에.


불편을 감수할만한 낭만. 파리의 5층 아파트.



 






Paris France. 19. juin

파리의 5층 아파트


글과 사진pomme soupe. 김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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