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밤, 빗소리가 투둑투둑 들려왔다. 암운의 분무를 땅과 바닥이라는 세상의 모든 밑면이 받아줄 때 나는 그 소리를, 왜 시적이라고 여겨왔는지 모르겠다. 시詩적인 순간이란 자기에 갇힌 소리의 공명으로 울려퍼지는 메아리 같은 것, 이 아니라고 나는 부정해왔다, 그것은 너무 비소한 자아의 고집일 뿐이라고 (사실 그런 예술작, 이라는 사람들의 물건들도 좋아하지 않았으니) 스스로도 거리감을 두려고 갖은 애를 썼으나 쨌든 당장의 문제는 먼저 나를 죄다 뒤집어 내는 일이었다. 자기 자신을 죄 뒤집어 낸다라, 아마도 이런 자의식을 가진 사람에게 '자신'이란 이물질에 다름 아닌 것이다. 어쩌다 스스로를 싫어하게 되거나, 어쩌다 스스로를 못 견디게 되었는지의 자기 선언은 곧 나와의 화해와 마찬가지이므로, 기나긴 싸움의 화해 과정이요 삶 그 자체가 되버리는 일이다.
창가에 내놓은 우수를 잠시 책상에 데려오며, 작년부터 운산하는 식물의 관심을 나는, 어느정도 알아버렸다. 식물을 관찰하는 일은, 그냥 저기 식물이 있구나, 초록을 본다, 들숨으로 들어오는 흙 내음과 풀 내음이 좋다, 는 식의 일 말고 말그대로 '식물'을 관찰하는 일은, 자기 안에 갇힌 어떤 성질을 관찰하는 일과 같다. 그게 왜인지 합리적으로 밝히자면 도무지 소용이 없어질 그런 종류의 성질.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얘기도 잘 들어보았고, 인간이 지구 생명들 중 제일 못난 놈/년들이란 얘기도 잘 들어보았기에, 환경 보호라느니 치료라느니 회복이라느니 하는 (어떤) 목적을 향한 자세들에 조금씩 이상함이 사라지는 요즘이다. 요즘 사람들이 애완을 두는 것과 마찬가지로, 식물을 곁에 두는 일에 있어서 끊임없이 제공받는 기회들은 모두 이런 것이다. 일상의 이상異常을, 스쳐지나가도 좋을 무시해도 좋을 그 이상을, 계속해서 매일매일 보는 일의 기회 말이다. 그리고 그것을 매일 보자면, 청년기라고 하는 시기, 청춘이라고 불리는 시기를 벗어난 허물 같기도 하여, 아니 허물이 실체를 보는 것 같기도 하여 참 묘한 것이다.
근래 일본 번역서들을 자주 읽어서인지, 쉼표의 빈번한 사용이라든가, 그 특유의 지나친 (타인을 향한) 조심성이라든가의 어투를 나도 모르게 흉내내고 싶은 건 참 재밌는 연습 같기도 하다. 학교를 떠나보니 알겠는 건, 우리 세대는 보육기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다는 지나치지 않을 사실이, 우리의 목덜미에 내려앉아 있다는 것이다. 돈벌이에 대한 가혹한 생태로부터 살기 좋아졌다는 국가의 신호탄을 쏘며 태어났을 또래들 중 유난히도 '자신이 하고 싶은 일'에 집착하는 또래들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 모르겠다'는 난처한 또래들이 많은 건 전혀 기이하지 않다. 왜냐하면 기성, 이라 불리는 (과거에 구애받지 않는 청년들은 그들을 꼰대라 비난할 수 있지만) 이전의 세대가 다음 세대의 의식에 심어주지 않은 무언의 생활 과정이 생략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학교에 적을 두고 공부를 하면서 느꼈던 것들은, 현실의 사례 하나로 와르르 무너질 지고하고 대단하신 이론들의 꼼짝없는 아름다움도 아니었고, 사시사철 외면의 미적 소비에 자기가 이용할 수 있는 모든 소비적 수단을 총동원해 봄날의 꽃보다 더 영속하려는 태도의 시기심도 아니었다. 전자와 후자 모두 대체로 자신의 기분을 뽐내며, 그것을 밖으로 꺼내면 마치 자기 자신이 정말 그렇게 되는 듯한 착오에 '지금 순간'을 마구마구 밀어버리는 일처럼 여겨졌으므로, 나는 어쩐지 그것에 아무렇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분명히 어딘가 고장나 있었던 것이고, 그 결함을, 그 격절을, 그 간극을 [구체적으로] 드러내고 싶었던 것이다.
보육과 교육의 참으로 아스라한 균형이란, 사실 너무나 명백하게 [국가]라는 어휘 속으로 편입될 수많은 복잡다단한 의미들의 책임이 분명한 것이거늘, 따라서... 너무나 희미하고 그래서 너무나 멀게만 느껴져 '긴장'이 사라지고마는 것이거늘, 개인이라 불리는 우리 각개에게서도 그 '긴장'이 사라지는 것만 같아 이상했던 것일까. 한때 나는 사냥 시절을 그리워하며, 인간이 야만인이라 불리는 바로 그 시기, 수렵-채집의 빈곤하고 유약한 풍요의 시기, 바로 그 시절을 (간접 경험을 하려면 얼마나 수많은 조상 X를 거듭해야 하는지도 모를 기원을) 도시 속 시민으로 그리워했으니, 이보다 비겁하고 비열한 태도는 없는 것이다. 자의식과 자기 의심이라는 의식적 방법을 익힌 요즘 또래들이 그걸 가지고 하는 일이 무엇인지 곰곰 생각해보면, 결국 표면에 뜨는 건 나의 비겁과 비열함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기혐오도 잘 해야 '자기'지 언제까지고 기만적으로 '혐오'한다면, 이미 스스로를 포기한 것이나 다름 없으니, 그런 자신을 놓을 때 의탁할 수 있는 건 역시 '기성'이자 '국가'인 것. 어쩌다 이렇게 인구가 많아졌는지를 의아해하다 보면, 어째서 역사적 시간의 수 표기를 되돌릴 때 인류의 머릿수도 줄어드는가를 알 수 있고, 그로 인해 얻어낼 명백한 사실은, 그만큼 약자들이 살 수 있도록 끊임없이 현실을 재건했다는 말과 같다. 어떤 필수적인 요소가, 그것이 생존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되는 그 요소가 결여되면 사라져야 마땅할 인구들이 당당히 제 욕망을 표출하며 살아갈 수 있는 건 배후에 생략된 생존 장치가 있다는 걸, 그걸 못 알아차려도 상관이 없을 정도로 단단하고 견고한 지탱이라는 걸,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사실은 순전히 식물이 자기 화분을 벗어나지 않는 일과, 분갈이는 인간이 식물을 빌미로 만들어낸 행위 중 하나라는 걸 통해서 언제든지 알아낼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자각을 하고 나면, 참으로 의아해지는 일 중 하나는, 어쩌다 이지경이 되도록 나는 유약한가, 를 인정하는 과정이 남게 된다. 자기 자신의 나약함을 희망과 긍정으로 포장하지 않고서 견뎌내는 일 또한, 분명 필요하고도 중요한 자생自生 중 하나인 것이다. 사실 지구에 거주하는 생명들 중 자생自生을 모르고서 사는 것은 찾고 싶어도 찾을 수 없다. 오히려 그런 발상을 한다는 존재 자체가 이미 결함 그 자체인 것이다. 결함을 모르고서 정상만을, 보다 잘 기능하는 인생만을 얘기하고 읽고 쓰는 일이 나에겐 별로 가치가 없다. 분명히 있는 걸 없다는 듯 여기는 것이 오히려 '건강'이 가진 지나친 응석인 것이다. 어젯밤 자리에 누워 사시사철 눈이 멈추지 않는 날씨를 떠올리며, 그 수많은 눈발을 받아주지 않는 땅과 바람을... 떠올렸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 하고 싶은 일이라고 응석부리지 않고, 혹은 응석을 구체적으로 잘 부리며, 할 수 있는 일에 대한 생각의 이미지인 걸 떠올림과 동시에 느껴지니, 어쩌면 시詩적인 순간이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