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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와 돌멩이 Jan 07. 2022

2021년 회고


연도가 넘어갈수록 정신적 구심이 희미해지는 위기에 뭐라도 해야겠다는 심정이다. 제정신으로 삶을 살던 시기에는 굳이 한 해를 정리하거나 쉼표를 찍는 식의 회고가 불필요했다. 삶의 문제의식에 언제나 불이 들어와 있었고, 내가 나 자신을 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새 나는 나를 놓쳤고, 점점 희미해지는 정신에 이제는 위기감의 덩치가 커졌다. 최근 심정의 변화도 변화이거니와, 앞으로의 삶에 다시금 의욕을 기르기 위해 정신력을 고양시키자는 숙제를 부과했다. 충동에 휘둘리며 하루하루를 보내는 일이 이제는 지겹고 지친다.


 6년간 켜켜이 글을 토해냈던 블로그를 닫았다. 독자라고는 한 명뿐이었지만, 세상에 단 한 명뿐인 독자였다. 그 진심에 배신감으로 보답하듯, 한순간의 결정으로 블로그를 폐쇄했다. 약 200편의 데이터 찌꺼기들이 사라졌다. 유일한 독자에게 어떠한 심경의 변화라도 전달해야겠다는 책임감보다 더 이상 견디지 못하겠는 지난 날의 과오를 덮어버리고 싶은 게 컸다. 6년 동안 블로그에 올린 200편의 글은 나에게 어떠한 의미도 되돌려주지 않았다.


 그곳은 디지털 도피처였을까? 아니면 자아 전시실? 개인화된 인간의 전형적인 '자기 만의 방'? 뭐라든 상관없다. 나는 그곳에서 더러운 부정들을 맡기 시작했고, 어느새 나의 정신은 거기에 중독되어 있었다. 나는 내가 싫었고, 내가 쓴 글자들이 혐오스러웠다. 이는 지극히 심리의 문제인데, 아마 남들에게 공감을 받기 어려운 고독한 심리의 버전일 뿐일 게다. 이 문제는 내 삶에 있어 아주 오래된, 그래서 너무나 지긋지긋한 자기 부정성 문제다. 이를 극복한 적이 거의 없다. 중요한 건 글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 분열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그 분열의 한 축을 자기 혐오가 차지했다. 아무리 토해내도 사라지지 않았다. 안에서 무한히 샘솟는 걸 계속해서 꺼낸다고 사라질 리 만무한데 말이다. 이 사실을 모르지 않았음에도 계속 꺼냈다. 어쩌면 한 명의 독자에게 위안을 받고 싶은 마음이 커졌던 걸까? 단순한 귀결로 이어질 리 없지만, 반복되는 혐오는 어쨌든 중단되어야 했다. 그게 자기 자신을 넘어 누군가로 향하게 될 여지가 점점 늘어나면 더욱더 빨리.


 브런치에는 별다른 기대가 없다. 아무 생각 없이 시작했고, 관리자가 누구인지는 몰라도 글을 쓸 수 있게 승인했다. 처음에는 출판 기회가 있다는 부분에 혹했으나 출판할 준비가 되어 있진 않았다. 스스로조차 확고한 게 없는데 남들 보라고 글을 낸다니. 나에겐 다시 태어나는 일만큼 불가능하다. 처음 블로그를 시작했던 의도와 동일한 명분만이 남아 있다. 연습, 누군가 본다는 의식으로 글을 쓰는 연습. 아무도 읽을 수 없게 감춰두는 몰스킨 노트에서는 불가능한 연습이기도 하다.


 2021년에는 책도 많이 읽지 못했다. 


너는 너의 삶을 바꿔야 한다 - 페터 슬로터다이크

멀티미디어 (15장 컴퓨터 해방/꿈의 기계 - 테드 넬슨) - 랜덜 패커

사이보그가 되다 - 김초엽, 김원영

월드 와이드 웹 - 팀 버너스 리

제3의 신 - 최신해

백지와 기계의 시학 - 범대순

너무 놀라운 작은 뇌세포 이야기 - 도나 잭슨 나카자와

미래 가능성 - 프랑코 '비포' 베라르디

정신과 치료의 진실 - 우츠미 사토루

내 주위에는 왜 멍청이가 많을까 - 장 프랑수아 마르미옹

너는 너의 삶을 바꿔야 한다 - 레이첼 코벳

천재의 심리학 - E. 크래치머 (일부)

포스트디지털 프린트 - 알레산드로 루도비코 (1/3)

기계이거나 생명이거나 - 이찬웅

기업가적 자아 - 울리히 브뢰클링

나는 어디에 있는가? - 브뤼노 라투르

기계의 신화 1 - 루이스 멈퍼드

기계의 신화 2 - 루이스 멈퍼드

문학과 그 너머 - 김우창 전집 7

이력서들 - 알렉산더 클루게

모빌리티 - 존 어리

물결 - 앙리 미쇼


 발췌하거나 기록한 책들은 이것뿐이다. 2021년에 추가한 독서 목록은 약 70권 정도다. 시는 거의 안 읽었다. 시집으로는 약 3권. 그중 오래 전에 사두고 읽었으나 다시 보고 건져 올린 시는 앙리 미쇼의 [반격]이다. 좋은 시다.


 2021년에 나는 무슨 생각을 하며 살았고, 또 책을 읽으며 정리된 생각들은 무엇인가 자문해 보면 남는 게 없다. 그나마 페터 슬로터다이크의 [너는 너의 삶을 바꿔야 한다]를 감명 깊게 읽었고, 루이스 멈퍼드의 [기계의 신화 1, 2], 존 어리의 [모빌리티]가 2021년의 수확이다. 여기에 울리히 브뢰클링의 [기업가적 자아]. 영감과 의식 확장에 무게를 더해 준 건 이 다섯 권. 나머지 책들은 거진 킬링타임용 책이었다. 슥슥 읽기에는 재미가 있지만 읽고 나면 남는 게 없었다.


 심리적으로 남는 거라곤 무능력에 따른 의존성이다. 읽고 싶은 책을 읽지 못하는 무력감은 무척 크다. 번역 출간을 기다리는 의존성이 독창성을 가로막는 기분이 드는 건 순전히 내 심리 문제다. 일본어를 익히자는 마음을 더 이상 못 본 척하지 않기로 했다. 2022년이 끝날 때쯤은 묵혀둔 일본 정신의학 책들을 읽을 수 있는 상태가 되길 바란다.


 가장 최근에 읽은 책은 존 어리의 [모빌리티]다. 21세기 도시 시민은 반드시 읽어야 할 필독서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우리는 우리가 왜 집을 사고 차를 사고 여행을 다니고 싶어 하는지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어째서 돈을 벌고 자기 자신을 자꾸만 정체화하는지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 탑승해 더 좋은 경험과 습관, 자기 계발, 자아 보듬기를 선전하는 사람들은 소비 의식 뒤에 숨어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들이 관심을 갖는 건 사람 사이의 소비 격차를 벌려 개별의 경험을 보다 특별하게 만드는 일일 뿐, 우리가 왜 그런 경험을 요하게 되었는지의 사회적 맥락을 언급하지는 않는다. 이 맥락을 놓치고 살아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건 나에게 무척 끔찍한 의식 상태다. 위기에 민감한 정신이기 때문인데, 훗날 치러야 할 후폭풍을 감당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2021년 나에게 유의미하게 다가온 책들은 하나의 주제로 묶이기도 한다. '21세기 도시에서 산다는 건 어떤 삶인가?'. 슬로터다이크는 자기 역량에 대한 철학적 서사 의식을, 브뢰클링은 자기 계발에 대한 사회적 맥락을, 멈퍼드와 존 어리는 기계 기술적 대상들과의 정신-정서적 관계를 의식하게 돕는다. 국내에는 번역되어 있지 않지만 존 어리가 자주 언급하는 나이절 스리프트의 용어, '기술적 무의식'이 단연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는 일찍이 펠릭스 가타리의 저서 [기계적 무의식]에서 다소 모호하게 만져졌던 어휘 맥락과 결을 같이 한다. 15년부터 추적이 시작된 나의 탐구 의식에서 가장 핵심을 차지할 개념이기도 했다. 마음 편하게 해외 학자들의 개념을 인용해 밟고 나아갈 수도 있는 일이지만, 아직까지는 조심스럽다. 보다 적확한 단어를 창안하거나 기다리는 중이다.


 2022년에는 시 창작에 다시 불을 지피려 한다. 마음은 크지만, 잘 될지는 모르겠다. 분명 심리의 문제인데, 비대해진 의존성을 차근차근 줄여나가다 보면 그래도 가망이 느껴지지 않을까. 


 희망이지만 2022년에는 그만 문제의식의 방황을 멈추고 가닥을 엮어나갔으면 싶다. 시에서는 길들여진 도시 사회의 정서나 감정을 걷어내고 보다 환기적인 화자의 정신-세계관을 담아낼 수 있길 바란다. 독서에서는 기계-기술 장치들과 정신병리의 구조가 만나는 지점들을 언어화할 수 있길 바란다. 느낌표보다 물음표가 너무 많아 가능할 거 같지는 않다. 비율로 따지면 0.01 : 99.99다. 지겹고 지치지 않을 수 없는 막막함이다. 그래서 사실 자꾸 풀어지고 느슨해졌던 걸 부인할 수 없다. 6년간 수행한 블로그를 단번에 폐쇄하는 데에 이 패배감의 지분이 컸다는 건 물보듯 뻔한 일이니까. 풀어지고 느슨해졌다는 건 낙관적인 표현이다. 무력하고 좌절했다. 


 좌절할 때마다 나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왜 이렇게 살아? 근데 이 질문이 다른 삶을 모색하는 맥락의 질문이 아니라 왜 으쌰으쌰해서 구체화하지 않고 있냐는 물음이다. 책 그만 읽고 시 쓰는 거 포기하고 하루라도 빨리 사회 생활에 합류하라는 질문으로 여겨진 적이 한 번도 없다. 나는 나에게 그런 가능성을 추호도 두지 않는 모양이다. 내 삶의 진단은 항상 물음표를 어떻게 하면 느낌표로 바꿀 것인지의 종용이다. 불확실하고 불명료한 것들을 어떻게 하면 분명하고 명료한 것으로 표현할지의 중단 없는 노력이다. 사실 이만큼 지쳐 태만했으면 이제는 다시 힘을 내야 하는데, 이 메커니즘이 의심스럽다는 기만을 부린 지도 꽤 됐다. 


 2021년은 태만의 해였다. 엎어버리고 싶은 것들을 그나마 최소화 한 게 6년짜리 블로그라서 다행이다. 세상에 단 한 명뿐인 독자를 잃었지만, 내 마음에서 사라진 건 아니기에 그래도 서운하지 않길 기대한다. 200편짜리 데이터 찌꺼기에서 독이 풍겨 어쩔 수 없었으니까. 2022년에는 덜 중독적인 글과 삶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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