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주 전에 줄기 하나가 결국 썩고 말았다. 처음 집에 오면서 자꾸 흔들리던 녀석, 나의 휘청거림에 자꾸 뽑히던 녀석이었다. 뿌리부터 썩기 시작했고, 조언에 따라 밑부분을 손으로 찢었지만, 결국 황폐해졌다. 나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우수란 식물은 그걸 지켜보는 내 심리를 무조건 반영한다고. 지금도, 쓸 수 있는 상태를 간신히 붙들고서 이렇게나마 끄적이는데, 썩어버린 줄기의 빈자리. 나는 결국 나를 지키지 못했다.
거리에는 자기를 알아봐달라는 호소들이 무성해서 고백이란, 지상 최대의 오욕이 아닐까, 그런 거리에서 난 살았다. 그걸 보면서 자랐고, 내 앞에서 아무도 고백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고 나의 고백에는 언제나 함묵, 그들은 언제나 침묵을 구사하지 못해 입을 닥치는 함묵을 할 뿐이었다, 를 동반했기 때문에 나로선 고백이 얼마나 지랄맞는 짓거린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내 임상으론, 고백을 받아줬던 이는 딱 두 사람 뿐이었다. 나머지는 미쳤거나, 도망쳤거나, 닥쳤거나, 깔봤거나, 욕하거나, 이해하는 척을 했다. 느낌이란 얼마나 주관적이고 사적인 영역에서 부는 바람인가, 감히 되뇌이지 않아도 우린 이것 없이 살 수 없다는 걸 너무나 분명히 아는 걸. 무풍지대에 사는 사람은 들어보지도 못했다. 그런데 내 안에서 웅성거리는 수많은 군중들은 나더러 '들어보지도 못한 인간'이라는 눈초리를 던진다. 나는 그저 민감한 사람이라고, 비겁한 사람이라고, 쓸데없이 생각이 많은 사람이라고, 숨거나 도망칠 뿐이다.
우수의 상태 기록은 일지와 전혀 상관이 없기도 하고, 상관이 있기도 하다. 나는 애초에 그걸 알아볼 수 있을 누군가를 위한 태도를 설정했을 뿐이다. 무인도에 떨어져도 수신자를 둘 수 밖에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계속 읽고 계속 쓰는 수밖에 달리 방도가 없기 때문에. 우울증이 도졌다. 아니, 고통은 언제나 새로운 것이라 '왔다'고 말해야 할까. 지금의 생활을 영위하는 나는 나를 지키기 위해, 기도하는 법을 배우고 기다린다. 기도하기와 기다리기, 하지만 태생부터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난 이걸 뿌리가 깊다거나 하도 오래 고여 돌이킬 수 없는 오염 상태라고, 형용하지 않는다. 이건 순전히 '기분'이거나 '느낌'일 뿐이다. 서정은 나에게 사치다. 그런데, 이런 반항은 마음대로 되질 않고... 어제 결국 견딜 수 없는 댐이 터지듯, 울고 말았는데 의식 분화가 어찌나 발달(퇴행)했는지 우는 나를 따로 지켜보는 내가 있었다. 나는 어릴 적처럼 마음 놓고 울지 못하게 된 인간이 되고 만 것이다.
어쩔 방도를 모르겠다. 쑤시듯 심정을 찢어 발기는 그 사람과, 둔감하다는 표현 하나로 '나는 정말 죽어버리고 싶다'. 고통의 불가분을 그렇게 에둘러 말해야 했을까? 내가 너무 예민한거라, 유별난거라, 보통으로 말하지 않더라도 그렇게 쉽게 잊어버릴 수 있을까. 천착의 정도를 두고 탓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게 나를 다독여도, 도무지 소용이 없어. 사람들에게 피해만 주는, 심정을 복잡하게 만들고 피곤하게 만들고 불편하게 만드는 존재, 진흙탕 위에서 난장을 부려 괜히 주변 사람들에게 흙탕물만 튀게 하는, 나라는 존재. 나는 어떻게든 가해자이고 싶지 않았을 뿐인데, 그런데도 견디고 견디며 구호를 외쳤을 뿐인데. 그건 짜증과 불만 토로에 불과했나. 인간이 이타적인 기능이 있다는 걸 나는 의심하지 않는데, 그건 정말이지 기적에 가까워 나는 또 얼마나 견뎌야.
내가 과거의 노예란 사실을 나는 알고 있었다. 지금 우수는 안중에도 없지만, 객관적 상관물이라 누가 우수를 심리가 아닌 물리로 보겠는가. 신경쓰지 않으련다. 내가 변할 수 있을까. 살아남을 수 있을까. '견뎌야 한다'는 문장과 '살아남아야 한다'는 문장을 그렇게나 반복해서 적어도, 나와는 상관이 없을 텐데. 나는 오늘도 그렇게 문장들을 반복해서 적고 말았다. 그러면 좀 낫니.
나을리가,
씨발.
여전히 내 안의 거의 모든 얼굴들은, 실제로 만나서 생긴 그 모든 얼굴들은, 나를 환자 취급한다. 도무지 나의 기분과 상태들에 사람처럼 취급하지 않는다. 이런 나를 망상증 환자라거나, 피해 의식과 자기애 장애로, 경계선적 증상으로 치부하고 나면, 적어도 그들의 불편함이 다소 해소될까? 정말 그런거라면, 그래서 그렇게 분류되고 나 또한 회복될 수 있다면 얼마나 기껍게 받아들이겠는가. 왜 나는 여지껏 살면서 이런 나를 사람으로 대해주는 사람을 만날 수 없었던 것인가. 도대체 어떤 잘못 때문에, 어떤 결함 때문에, 나는 이리도 처량할 수밖에 없는가. 아무리 처절하게 그 이유를 쫓아도 달라질 수 있는 과거란 없는데. 어쩌면 좋을까, 도대체 어떻게.
나는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 세상에 있을 수 없는 일들 중 하나인 '도움'이 나에게도 가능할까. 관심 말고 도움이. 자기 위안으로 위장한 이해 말고 공감이. 나에게 와줄 수 있을까.
기도하자. 기다리자. 살아남아야 한다. 견뎌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