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사랑 2

부정, 분노, 절망, 와해

by 사과와 돌멩이


22.09.20 일기



마주하기가 겁난다. 잘 안 된다. 상처가 난 줄 알고 거죽을 들췄더니 피부를 뜯는 격이다. 잘 안떨어진다. 정신 능력이 퇴화된 무기력의 느낌은 아니다. 도리어 치료를 받고 생활을 바로잡는 데 성공했더니 기적처럼 정신을 되살리는 데 성공한 요즘이다. 이 무기력은, 마치 유년 시절 정말로 힘이 없을 때 벌어지고 만 사건의 충격 앞에서 느낄 법한 무기력이다. 삶의 중심을 잡는 수행을 생활화하니 생겨난 힘은 이 무기력을 인식할 수 있게 할 뿐, 극복은 여전히 멀게만 느껴진다.


나르시시즘, 자기 도취, 사생활, 개성의 강화.

이것들을 언어와의 관계 속에서 과도하게 구축했으며, 그 속에서 안정을 느끼려고 했다. 단 한 번도 멈춰본 적 없는 푸념과 토로들의 실체가 드러나니 무방비로 쫓기는 기분이다. 엊그제인가, 언제인가 그런 꿈을 꾼 적이 있다. 도망치고 도망치는, 헐레벌떡 달아나기 바빴던 그런 꿈을.


그 어떤 것에도 책임을 전가하고 싶지 않다. 가족사든, 연애사든, 공부든, 문학이든, 세상이든. 선고를 받고 심판을 기다리는 죄수의 기분이란 이런 걸까? 그런 이미지가 떠오른다. 죄를 지은 기분이 들다가도, 끔찍하리만치 스스로를 감내해야 했던 인내심이 결국 스스로를 지킨다는 명목으로 눈을 가렸던 모양인가. 내가 신뢰했던 일본 심리학자는 이를 거짓 자기와 진짜 자기로 나눠 설명했다. 심지어 그는 스스로도 어떤 애도를 거쳤는지 토로한 적이 있다. 개념이야 어떻든, 기만의 구조가 발각되는 순간 공포심이 인다. 나는 지금 공포와 더불어 절망을, 분노를, 체념을, 종국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좌절을 느낀다.


엄두가 나지 않는다. 45만 자의 글자들이 집도를 수행하는 전문 용어들 같다. 마취 따위는 없다. 나는 스스로 집도해야만 한다. 일생을 걸었던 도박에 모든 걸 잃어야 한다. 이렇게 될 줄 몰랐다, 알았다면 도박이었을 리 없다. 이미 패는 다 오픈됐다. 내가 나를 꺼내는 순간, 나는 진다. 처참하게 진다. 이 절망의 앞에서 느끼는 두려움에 손가락이 머뭇거린다. 글자를 스크린에 아무렇게나 나타낼 수가 없다. 신중한 게 아닌 덜덜 떨고 있기에 그렇다.


한때 나는 사유가 방해받는 감각으로부터 가능하다는 시오랑 선생의 말을 즐겨 인용했었다. 니체를 읽고 데리다를 읽고 일본 사상가들을 읽으며 그것이 오늘날 '모욕감'으로도 설명될 수 있다는 걸 즐겨 말했다. 아마 15년도였을까, 배움에는 늘 모욕감이 동반되어야 가능하다고 말하기 시작한 적이. 그것은 스스로가 진정으로 믿었고, 그렇기에 그 외의 어떤 것도 인정하지 않아야 가능하다. 모욕감은 그 확신에 난 구멍이다. 그동안 내가 겪었던 온갖 감정들이 가리키는 건 애도 단계였다. 무감각과 무기력에 시달렸고, 부정과 혐오에 힘을 썼으며, 불안과 우울에 좌절했다. 정신이 회복되고 나니 이제야 이 모든 걸 받아들이기 시작하는 모양이다. 그 세월 동안 드문드문 눈치는 채고 있었고, 이때가 오기를 직감하고는 있었지만 너무 멀게만 느껴졌었다.


그간 겪은 배움과 학습의 과정이 무색하게, 모든 게 좌절스럽다. 나는 뭘 위해 그토록 생을 갖다 바쳤나. 잠을 줄이고 생체 따위 거들떠도 안보고 내달렸던 시간들이, 도대체 무얼 위한 거였나. 사서四書를 1년 6개월간 집요하게 닳도록 읽고서 세상에 나왔을 때, 철학 공부에 임하기 전 나는 다짐했던 게 있었다. 독학이라는 이름은 나에게 유일한 선택지였고, 그렇기 때문에 그만한 핸디캡을 적용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읽을 땐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읽되, 확신의 붕괴에 두려워하지 말자는 스스로의 다짐. 그 태도로 10년을 보냈다. 이 자가당착을 형언할 말이 지금 내겐 없다.


지금에 이르니 그간의 모든 게 사실로 드러나기 시작한다. 시에서의 몸부림도, 공부에서의 몸부림도, 관계에서의 몸부림도, 세상에서의 몸부림도 결국 한계였다. 시를 쓸 때마다 매번 느껴야만 했던 그 절망감이 이제야 진짜 얼굴을 보여주는 기분이다. 나를 지지하고 응원해줬던 선생님에게 그 다음을 내보일 수 없었던 정체가 이제야 수면 위로 뜬 기분이다. 내가 쓴 시와 읽은 글에 기만과 위선은 없었다. 단지 그것들을 대하는 나 자체가 그랬을 뿐이다.


나는 자기가 쓴 시를 사랑하는 시인들을 늘 부러워했다. 내가 그럴 수가 없어서, 그 일체감이 너무나 막대한 불가능이라서. 5월 초였나, 우연히 만났던 한 청년이 있었다. 나는 그를 스파이더맨이라고 부르는데, 그는 내가 살면서 만났던 사람 중에 가장 독특하고 건강한 사람에 속했다. 그는 시를 쓰는 일에 어떠한 머뭇거림도 느끼지 않는 듯했고, 또 본인이 쓴 시에 자부심이 철철 넘쳤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그의 자신감을 옆에서 느끼면서 나는 주구장창 '부럽다'를 연발했지만, 나의 진심이 전달되기에는 넘어야 할 사회적 코드의 장애들이 많았다. 같이 있던 다른 한 명은 그의 비위를 맞추려고 무진 애를 썼지만, 결코 그를 인정할 수 없어 보였다. 당연한 소리지만, 나는 그가 쓴 시를 오롯이 읽어낼 수 없었다. 나는 이 문제가 단순히 '현대 시'와 소위 그들만의 잔치라고 불리는 '지방 잡지 시'의 격차로부터 발생하는 감수성의 전위 차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문청들은 쉬이 인정받고 권위 있는 문학 잡지에 실리는 시와, 또 그런 출판사에서 출간되는 시를 인정하고 결코 거론할 수는 없어도 '시에 급이 있다'는 인식을 내재화한다. 실제로 같이 있던 다른 한 명은 스파이더맨에게 계속해서 '누구나 쓸 수 있는 시 말고'를 자신의 의견이라고 반복해서 꺼냈다. '나는 못 쓰는데'라는 말을 해도 기만으로 들릴 뿐인 것이다.


스파이더맨은 도시에서 만나기 힘든 유형의 사람이었다. 그는 정말이지 놀랍게도, 20세기 철학자와 사회학자들이 주구장창 불가능하다고 말했던 온갖 사회 조건들을 보란듯이 벗어나 있었으니 말이다. 자신이 겪은 일에 대한 서사며,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자부심이며,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대한 확신이며, 또 오롯이 본인이라는 걸 내보일 수 있는 안정감이며 정말 나무랄 데가 없었다. 하지만 도시의 문법으로 그는 결코 그렇게 비춰질 수가 없었고, 나 또한 진심으로는 그가 부러운 사람이라는 걸 느끼면서도 동시에 '유아적'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나는 그를 만나기 전부터 심상치 않다는 인상을 받았었고, 만난 직후에는 거의 확신이 되어 그가 도대체 어떤 삶을 살았는지 너무 궁금한 나머지 그의 배경을 물었다가 또 수다 폭탄을 받아야 했다. 결국 그의 끊이질 않는 이야기를 마지못해 끊어내고는 '정말 신기하다'고 말하는 게 최선이었다, 말을 덧붙였으면 그걸 빌미로 더한 수다 폭탄이 떨어질 게 겁났다.


물론 스파이더맨과 친구가 될 수는 없었다. 그 건강함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나는 원래 말이 많은 사람을 싫어한다. 끊임없이 너더분한 인간과 같이 있으면 정신이 나갈 것만 같아서 정말 온몸의 기력이 다 빨리고 만다. 그날 스파이더맨이 나에게 쏟아낸 말을 녹취했다면 족히 200쪽 분량은 나왔을 것이다. 현실 사람을 만나면 최선의 환대를 건네야 하는 나의 책임이, 그의 이야기를 끝까지 경청하게 만들었고 그래서 그가 한 말들이 여전히 기억에 남아 있다. 그가 스파이더맨인 이유는 대뜸 자신의 취미가 15개였나 하튼 존나 많은데 그중 하나로 번화가에서 스파이더맨 코스프레 하는 거라고 말하고, 실제로 모임에 나왔을 때 스파이더맨 옷을 입고 나왔기 때문이다. 나카이 히사오 선생의 관점을 빌리자면, 그는 21세기 도시에서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아니, 유니콘에 가까운 희소성을 띤 정신 건강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


난데없이 스파이더맨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당시 그에게서 나르시시즘, 자기 도취를 읽어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건 나의 맹점이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나에게 불가능한 걸 부정하기 위해 투영한 그 자체가 바로 나의 진실이었다. 나도 마찬가지로 좀 더 건강했다면, 나는 기꺼이 그와 이웃을 할 마음이 있다. 그는 도시 인간들이 내보이는 불안에의 강박도, 외로움의 몸서리도, 능력과 물질적 성취에의 열등감도, 무엇보다 이미지 중독으로부터 깨끗해 보였기 때문이다. 나만의 착각일지는 모르겠다, 나는 도시에 살면서 그런 사람은 처음으로 만났고 알 수 없는 이유로 연상되는 건 과거 조상들의 마을 공동체에서 흔하디 흔했던 건강한 사람의 표상이라는 것이다. 그런 사람이 오늘날 각종 사회 제조건으로부터 영향을 받으면서도 그 원형을 유지한다? 말도 안 된다. 내가 뒤적거린 책들에서 그 누구도 그런 가능성이나 희망을 감히 입에 올릴 수 있던 사람이 없다. 미스테리다.


스파이더맨 얘기를 하니 뭔가 신선해진 기분이다. 재밌는 사람이었다, 너무 피곤했을 뿐.


절망의 이야기가 환기되서 다행이다. 언젠가 시로 만날 수 있기를, 근데... 이름이 기억 안 난다. 스파이더맨뿐이다. 히어로인가? 이렇게 생각해 보니 내러티브는 얼추 들어맞기는 하는데... 잠이나 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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