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현의 현실
22.09.21 일기
아무런 작업도 하지 못했다. 논문 하나 읽고 계속 고민한 게 전부, 내면을 받아적다 기만이 풍겨와서 중단. 패닉이다. 여태 쌓아온 삶이 의심스러워지자 도무지 어찌할 줄 모르겠다. 한창 대가리 발기되어 있던 어린 시절, 죽은 사람들의 아집을 읽으며 낄낄거렸던 적이 있다. 그 아집이란 평생에 걸쳐 믿음을 쌓아올린 사람들의 확고한 주장과 의견에의 태도였다. 그 입장에 반하는, 깨나 치명적인 주장이 나타났을 때 그들의 반응이 참으로 어리석게만 보였다. 받아들이지 못할 망정 도리어 자신의 입장에 반한다는 이유만으로 상대편을 괴롭히다 못해 인신공격을 하는 꼴이 참 우스웠다. 유명한 사례로는 갈릴레이, 뉴턴, 칸토어 등이 겪었을 부당한 태도가 그랬다. 현실과 환상이 결합된 자기 도취의 경험이다. 나 말이다.
나는 이 자기 도취의 구조를 떼어내려고 애쓰고 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니 서툴다 못해 엉망진창인 느낌이다. 포기할 마음은 없다. 여기에서마저 도피를 해 버리면, 나는 살 자격이 없다. 극단적이지만 그만한 각오로 임하지 않으면 결코 성사될 수 없다는 걸 안다. 기시다 슈는 현실 자아가 포기되는 건 자살 밖에 없다고 단언한다. 오늘 난데없이 생각나 다시 들춰본 16년의 독서 기록은, 나에게 여유가 없음을 보여줄 뿐이었다. 느긋하게, '방해받지 않는' 공간에서 다시 한 번 그의 책을 찬찬히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들었을 뿐이었다.
그는 본인의 노력으로 성인이 되는 데 일부 성공한 사람이다. 그의 에세이들을 모두 신용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본인 스스로의 내밀한 분석이라든지 일개군상의 욕망 이면에 대한 분석은 나름 단초를 제공해주기는 한다. 그가 자신의 어머니에 대한 경험 속에서 분석해 내 읽은 증오와 원망, 표면상으로는 끔찍이도 사랑하는 모습의 어머니가 사실은 뇌에 마이크로칩을 심은 듯한 증오와 원망을 꽁꽁 감춰뒀다는 진실을 알아차리고는 본인의 강박 사고가 단번에 사라졌다고 말했다. 모름지기 진실이란 이런 것이다. 진실이 표명되는 순간, 연루된 문제들이 말끔히 사라지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된다고.
나에게는 자기 도취적 환상들이 있다. 이 환상들은 나로 하여금 원인을 파악할 수 없는 여러 정신적 동요와 공모 중인 듯하다. 인간이라면 으레 가질 '사적 환상'은 평생에 걸쳐 포기될 수 없는, 돌려 말하면 결코 포기되어서는 안 되는 역동적 징표라고 받아들이는 게 보다 현실적이기는 하다. 만약 그러지 않다고 거부하고 부정하려고 한다면 막대한 대가를 치른다는 걸, 과거 인류는 끊임없이 알려주고 싶었나 보다. 특히 오늘날에는 정신분석이니 심리학이니 하는 접근법이 민주화되어 개인의 정신 자체가 점차 자기지시적으로 식민화되고 있기는 하다. 본인 스스로를 들여다본다는 성찰과 반성이 미덕이 아니었다면, 적어도 이쪽 방면에 있어서의 문제들은 그렇게 심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보다 더 심한 문제 때문에 지향된 거라고 보는 게 정신 건강에 어울리기는 하지만.
허허벌판에 떨어져 지도도 못 그리고 표지판도 발견할 수 없는 황망함에 다름 아니다. 그간 쌓은 노력이라는 이름, 책임이라는 이름, 믿음이라는 이름 모든 게 사막이 되었다, 이렇게 단번에 변할 수 있는 허황이라고?... 지금 나의 문제를 다루는 게 오직 스스로여야 한다는 사실이 의심을 좌절로 만든다. 그래, 이 문제가 겉으로 드러나는 증상인가? 아니다, 누군가의 삶을 망가뜨릴 정도로 주체할 수 없는 상황을 야기했나? 아니다, 부풀려진 망상이 아니라는 증거로 현실 속에서 인정받은 적이 있는가? Yes. 이게 문제다, 시발. 과도한 성찰성의 과민 반응이면 차라리 나을 텐데. 정말 이 문제가 안 뻗친 곳이 없다.
사람에게 있어서 추구되어야 할 사적 환상이 끝내 포기될 수 없는 것이라면, 어떤 방식으로든 실현을 해야 마땅하다. 환상이 현실이 되는 것, 그것이 실현이다. 실현의 현실. 하지만 그건 불가능에 가깝다. 그래서 많은 이가 꿈도 꾸지 말라고 한다. 꿈에 부채질 하는 사람도 있고, 단념하라는 사람도 있다. 어릴 때부터 늘 있었다.
자기 도취는 환상에 기생한다. 환상이 자기 도취에 기생한다고 말하는 게 더 적절하다. 만약 이것이 실현되어야 하는 것이라면, 움직여야 한다. 하지만 나의 문제는 자기 도취의 현실성에 있다. 이 조바심을 굳이 파헤치면, 직면해야 했던 문제들을 외면하고 회피했던 무기력의 고착화로 인한 조바심이다. 그런데 이 조바심이 극복되어야 했을 순간마다 혼자만의 힘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실현은 혼자만의 노력과 변화로는 벅찬 일이다.
이 글을 읽는 분들에게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일 수도 있으나, 가족 구성원 중에 누군가가 심적으로 괴로워한 나머지 정신적 이상 증세를 보이다 결국 돌이킬 수 없는 증상이 발발했다면 그건 당사자의 노력과 변화로는 역부족이다. 그가 바뀌려면 주변 사람들도 바뀌어야 한다. 사람은 결코 혼자가 아니며, 아무리 혼자라는 이미지에 매달린다 하더라도 주변 환경과의 관계 안에서다. 누군가를 위해 자신이 변한다는 마음은 오늘날 기적이 된 거 같다. 변화라는 상에 도달하기 이전에 고통에 갇혀 있는 인상이다. 개인이라는 이름으로 갇혀 있는 사람 세상이, 일견 적절한 도시의 설명인 거 같다.
관계에서의 노력과 변화도 나에겐 늘 불가능에 가까웠다. 중요한 점은, 이 불가능을 마주하는 나의 태도에 있다. 자기 도취적 언어에의 사랑은 나로 하여금 떼어낼 수 없는, 이미 한 몸이 된 언어관을 갖게 했다. 루만의 설명을 빌리자면, 이것은 필패다. 체험도 이를 보증한다. 나는 이상하게도, 17세기에 태동된 사랑법, 18세기에 태동된 사랑법으로 사랑을 배우다 루만이 얘기하는 '사랑의 문제화' 단계에 너무 일찍 도착하고 말았다. 너무 혼자 달려나갔다. 주변 아무도 그런 고민 따위 하지 않는데, 무엇보다 상대방은 관심도 없는데 말이다. 도대체 이 성급함은 어디서 나타난 걸까.
낭만적 사랑, 열정으로서의 사랑, 사랑의 문제화는 각기 다른 내러티브를 지니지만 순서대로 야기된 소급 결과다. 문제는 이 단계들이 중첩될 수 있다는 것이고, 무엇보다 뒤섞일 수 있다는 것이다. 과도한 성찰성이, 이 뒤섞임을 인위적으로 만든다. 이번 명절 때 누나랑 수다 떨다가 이런 얘기를 들었다. 팔자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예전에 누나 고민 상담을 하다 내가 이런 얘기를 했다고 한다. '누나는 친구 복이 없나 보다, 팔자라고 생각해. 나는 관계 복이 없어. 나도 팔자인가 봐'. 누나는 매형과 10년 차 커플인데, 거진 8년을 연애하고 결혼했다. 너무 부러웠다, 저렇게 오래 가져갈 수 있는 관계라니. 반면에 누나는 친구가 없다. 누나 친구들이 누나에게 온갖 신경증과 히스테리, 감정 전이를 존나 해대서 누나가 너무 고통스러웠기 때문이다. 얘기를 들어 보니 왜 만나는 사람마다 누나에게 의존하다 못해 온갖 불안정한 감정을 덧씌우지 못해 안달일까 하는 여자들 뿐이었다. 가만 들어 보면 팔할이 그쪽 엄마와의 관계 문제고, 누나의 안정적인 심리에 투사한 언행들이 반복되는 게 보였다. 누나는 그래서 나중에 애를 낳아도 애엄마들이랑 알고 지내는 게 두렵다고 말한다.
좌절과 의심은 자칫 성급함으로 번져 신중하게 솎아내야 할 걸 그냥 리셋해 버리자는 마음으로 나아가기 쉽다. 나는 지금 그걸 경계하고 있다. 분명 현실적인 노력들이 있고, 성과들이 있고, 실현된 것들도 있음을 무용하게 만들지 말자고. 소금과 설탕이 한 통에 들어 있는 느낌이다. 이걸 어떻게 분리해? 감각에, 감정에 맡겨서는 도무지 해낼 수가 없어 보일 뿐이다.
멜라토닌 때문에 잠이 쏟아진다. 오늘은 이만 자야겠다.
그래도 나아진 점 중 하나는, 잠을 지키자는 마음이 자리잡았다는 것. 20대에는 하등하게 취급하다 30대 되서야 된통 혼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