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찰의 이탈
22.09.22 일기
지지부진한 작업 앞에서 어떻게든 힘을 내보고자 어거지로 스케치를 해본다.
우선, 이 작업은 서사의 재구성이다. 서사 앞에 '자아'가 붙어야 하는데, 나는 이 자아로부터 벗어나는 걸 목표로 하고 있다. 시도에 머무르고 말 수도 있다. 왜 자아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는지, 그 이유를 '자기 도취-나르시시즘'에 두고 있다.
예전에 수유너머에서 세미나를 할 때 우연히 세넷의 책을 읽은 적이 있다. 당시 읽었던 책은 [장인]이었던 거 같은데 정말이지 하나도 읽어내지 못했다. 독서에 있어서 나의 신경증 중 하나가 발동되었던 것이다. 그건 늘 사적 체험에 관련되어야 비로소 읽힌다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어떠한 언어도 읽어내지 못해 눈으로 훑는 게 고작인, 이해고 나발이고 도무지 머릿속에 자리잡지 못함에 당혹스럽고 괴로웠다.
이 신경증에 바꿔치기 한 나의 정당성은 성장과 학습의 프로그램이었다. 개인의 문제가 충분히 다뤄지고 나서야 세상에의 접근도 하나씩 열릴 거라는 일종의 단계별 프로그램으로 말이다. 책이 안 읽힐 때마다 나는 늘 '아직 준비가 안 됐구나' 하는 식이었다. 너무 당연한 정당화라 진실로 여겼고 어떠한 의심도 받아들이지 않을 만큼 견고했다. 개인적인 독서 체험으로도 계속해서 나에 대한 이해가 우선적으로 다뤄졌고, 그 이해를 중심으로 영역이 확장되어 16년도부터는 사회, 인류, 도시, 법, 제도 등등으로 '읽기'가 나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내가 이 학습 과정을, 당연히 아무것도 모를 때는 쉬운 것부터 익히고 점차 이해의 폭을 넓혀가는 게 마땅하다고 강박화되는 12년의 교육 과정을 이수한 동물임에도, 신경증이라고 부르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이 과정에 있어서 자기 도취의 구조가 결코 분리되지 않기 때문이다. 돌려 말해, 머리를 온통 헤집는 문제 의식에 사로잡혀 있으면 책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자연스럽다고, 당연한 거라고 말하기를 거부하는 게 바로 도취적 강박 사고의 발현이다.
이 강박 사고는 나를 꽤 오랫동안 괴롭힌 자아의 문제다. 표면적으로는 나에게 너무 집착하고 과도하게 몰입한 나머지 다르게 개발되어야 할 여러 영역들이 '나'로 식민화된 이미지다. 문제는 이기심과 전혀 별개의 것이라는 점이다. 이 강박 사고는 바로 성찰과 반성이다. 만약 내가 바깥 활동에 적극적일 수 있었던 행운이 없었다면, 나는 이 성찰과 반성을 더욱 고착화시켜 소위 '반사회적 인간'으로 거듭났을 것이다. 성찰이 적극 추천되는 사회 안에서 살다 보니, 나는 이 성찰 바깥을 모른 채 살고 만 것이다.
어쩌면 내가 하려는 작업은 이 성찰을 재구성하려는 걸지도 모른다. 철학적으로 할 깜냥은 없다. 정교하게 다루기엔 여유가 없다. 기든스의 논의들을 참조하고,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되었지만 거진 사장된 세넷의 [현대의 침몰], 래쉬의 [나르시시즘의 문화] 등등을 중점으로 살폈다. 이 책들은 오늘날 우리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를 과거로 돌아가 상상할 수 있게 한다.
만약 '프로그램'이라는 말을 굳이 쓴다면, 나는 21세기를 살아가는 도시 인간의 전형 중 하나일 뿐이다. 자기 안에 끊임없이 갇힐 수 있게 하는 여러 영향과 조건들이, 사람들로 하여금 '매트릭스'를 상상케 하는 조건인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어떤 세계관을 갖고 있는가, 라는 질문을 가져본 적이 있다. 너무 난처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면서 이미지로 들어오는 '글로벌 감각'과 내가 할 수 있는 일과의 괴리를 자아내는 정보의 폭탄이 너무 막대했다. 이런 역설의 경험에 무감각해지는 와중에 수반되는 각종 의존과 중독은 세넷의 말대로 자아가 비대해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왜소해지기 때문에 개성에의 몰두가 나타나는 게 아닐까.
나의 문제를 추적하면서 마주한 수많은 사람들은 크게 두 갈래였다. 하나는 집요하리만치 자기의 문제에 몰두하는 사람, 다른 하나는 아무렇지 않게 바깥의 문제에 몰두하는 사람. 전자는 쉽게 읽히고, 후자는 아예 안 읽혔다. 래쉬의 분석들을 빌리면, 나는 그저 나르시스트일 뿐인 것이다.
문제는 지금 이 모든 것이 분명하게 파악되어 솎아내지지가 않는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어휘가 부족하다'. 가령 성찰도 그렇다. 내가 떼어내려고 하는 건 유아적 성찰이지 사회적 성찰이 아니다. 그런데 성찰은 둘 다에 관여한다. 또 이상한 종교 덕목으로 '자아 성찰'을 주구장창 강조하는 사회가 대한민국이 아닌가. 나는 이게 전혀 맞지 않는 옷이라고 느끼고 있다. 문화에 대한, 사회적 조건에 대한, 생존에 대한, 이념에 대한, 종합적으로는 우리네 '일상'에 대한 마네킹 없이 아무렇게나 입히는 느낌이다. 혼자서는 쉽지가 않다.
나르시시즘의 특성들이나 자기 도취의 구조적 기능, 공의존적 중독 사고 방식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부분적으로 뒤섞여 있어서 솎아내는 게 말도 안되는 거 같다. 그렇다고 심리학이니 상담이니 치료 요법이니 따위의 접근에 마냥 동의하고 싶지도 않다. 초연해진다는 건 도덕적 감수성의 적출로 이어진다. 도대체 초연함이니 태연함이니 구시대적 덕목을 갖고와서 어떻게 하라는 걸까. 초연함을 한번쯤은 의심해야 하는 건 도덕 앞에서의 공감 불능 때문이다. 자신의 감정을 파헤치고 분리하고 '괜찮아지기 위해' 시도하는 여러 접근들 속에서 '타인의 고통'이 관계적으로 다뤄질 리 없다. 그런데 이 고통을 견딜 용량이 더욱 줄어들게 만드는 게 환경이거늘, 끊임없이 추구되는 건 임시 처방으로써의 건강하고 행복한 자아 실현이 우선시된다.
어디서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혼동스럽다. 궤도를 이탈해야 하는데 이미 가속이라 통제불능인 느낌이다. 사고가 필요하다, 우연의 충돌이 필요하다.
가속화되는 바깥 세상에 발맞춰 성찰과 반성도 가속화되고 있는 느낌이다. 인류가 언제부터 자아 실현을 했다고, 자아 발전을 했다고 도시에 사는 모두가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것처럼 권고되는 걸까. [현대의 침몰]을 곱씹어 보면 조금 암담하다, 이게 창안의 소재가 되어야 하는 문턱 앞에서 느끼는 두려움인가?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나는 자의식이라고 이 모든 걸 퉁쳐서 그만 좀 벗어내고 싶다고 투덜거린 적이 있다. 근데 그런 세상이 아니다. 자의식으로부터 구속받지 아니하던 사람들은 하나둘 떠나고 있다. 그들의 삶을 배우고 싶은데, 그걸 배울 수 있는 삶의 환경이 아닌 모양이다. 이 작업이 되는 작업인지 모르겠다.
혼자서 하는 작업 말고 다른 사람들과 부딪치며 순간을 나누는 삶을 살고 싶었다. 영화나 소설에서나 가능할 법한 그런 삶이 현실적이지 못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도리어 자아와 개성을 환상의 영역으로 세속화한다, 믿게 만든다. 왜 이렇게 어긋나고 말았는지 모르겠다. 안정적인 신뢰가 있어야 그런 삶도 가능하다고 현실적인 조건을 좇으려 해도, 그 신뢰는 자기 몰두 앞에서 무용한 것이 된다. 사람들이 계속해서 선택할 수 있게 만들고, 그래서 개인화를 더 강화시킨다. 정말 과도기라는 말 말고는 달리 떠오르지 않는다. 전쟁 휴전한 지 100년도 안 되서 이렇게 된다고? 인간이 이렇게 가속화될 수 있다는 게 어떻게 긍정될 수 있는지 모르겠다. 이탈한 모나드니 도주니 새로움이니 창조니 하는 말들도 기반 없이 가능한 게 아닌데 왜 거기에 도취될 수 있는 걸까.
이 혼란스러움이 오래가지 않았으면 싶은데 또 나쁘지는 않다. 분명 샅샅이 뒤지는 모양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