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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와 돌멩이 Aug 05. 2023

아니마의 선물

재건 9


23.08.05



융 읽기가 1달 됐다. 이전에는 환상이나 꿈의 무의식적 존재, 여러 상징들, 특히 원시나 신화적 상징들에 대해서는 도무지 알아보지 못했다. 특히 '환상'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바가 없었고, 조현병의 망상 장애 기술들을 볼 때는 언어의 상징적 의미, 은유로 접근했을 뿐 체험적 기반이 꽤나 부실했다고 할 수 있다. 쉽게 말해 '당사자성'이 빈약했다는 말인데, 이제는 이 기반이 좀 더 확장됐다. 오늘부터의 어떤 확신이지만, 이제 환상과 망상, 상상-공상을 구분할 수 있겠다는 감각이 생겼다.


 요근래 나는 잠을 깊게 자지 못한다. 무의식을 들여다보기로 마음 먹고 난 뒤, 이 친구들이 아주 활성화됐달까. 생활 패턴, 수면 규칙을 온전히 가져가지 못한 게 내 삶의 큰 숙제였고 이를 조율하기 위해 여러 시도를, 실패를 겪어 온 터. 솔직히 존나 빡쳐갖고 그냥 될대로 돼란 식으로 걍 신경쓰지 않기로 했었다. 그래서 다시 해가 뜨면 잠에 들고, 오후에 깨는 패턴으로 지내고 있었는데 시 쓸 때는 아무래도 좀 무리를 하게 되다 보니 너무 틀어지고 말았었다. 그러다 보니 다시금 아침에 일어나고 싶다는 욕망이 꿈틀거렸다. 참 알 수 없다 내 정신이란 녀석을. 아침에 일어나 활동을 시작할 때의 '개운함'을 내 정신이 원하고 있지만, 나는 이를 위한 수면을 제공해줄 수 없었다. 웃긴 건 정신이 잠을 원하지 않는다는 거였다.


 그래서 그래, 아침에 한 번 일어나 보자. 했더니 정신이 놀랍게도 새벽에 잠을 잘 수 있게 해줬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새벽 4~5시에 깨고, 아침 운동을 갔다 왔다. 밤에 자려고 하니 피곤해도 잠이 안왔다. 이전에도 그랬는데, 아침에 일어나는 일정으로 밤에 잠들면 절대 깊게 자지 못하고 선잠에 괴로워하다가 반드시 새벽 1~2시에 깬다. 이 시간대에 의식이 엄청난 생명력으로 강해진다. 그렇게 패턴은 망가진다. 아침에 활동하길 원하면서, 밤과 새벽 사이에도 활동하고 싶어 한다. 


 지금은 그런 패턴이다. 그런데, 뭔가 좀 다르다. 어제도 9시경에 잘 누워서 엄청 잘 잘 거 같은 낌새로 잠을 청했지만, 격투기 영상을 봐서 그런지 자꾸 다음 상대방 차례가 오지 않고 뭔가 무한 되풀이에 끼인 것처럼 괴로워 하며 잠에 들지 못했다. 마치 무의식이 가로막는 것 같았다. 잠에 들지 말고, 날 보라고. 그다음부터 꿈과 환상이 이어지기 시작했다. 융을 읽기 시작한 이후로 처음 '아니마'를 인식한 뒤 아니마는 꾸준히 나와 조우해주고 있다. 오늘 꿈과 환상에서 아니마가 처음으로 나에게 상징 하나를 보여줬다. 나에게 있어 그 상징은 '푸른 나비'다. 


 몇 가지 환상이 인식되기 시작한 건 며칠 전부터다. 딱히 '처음'이라고 말할 기준은 없지만, '아 이게 환상이구나' 하는 식의 의식이 동반된 건 분명하다. 그 첫 번째 환상은 오른쪽 위 구석에서 갑자기 환한 빛이 번쩍하고 점멸한 뒤, 중앙으로부터 약간 남서쪽?에 위치한 좌표에서 꽤 기이한 얼굴 하나가 순간적으로 딱 나타났다 사라졌다. 코가 무척 두껍고 길었으며, 점토 형상이었던 거 같다. 분명 원시적인 어떤 형상일 텐데, 딱히 연상되는 건 없다. 어쨌든, 무의식을 만났다는 사실이 기뻤다.


 이후 몇 가지 순간적인 환상들이 있었고, 이후 꿈에서 처음으로 아니마와 동행하여 어딘가로 향했다. 그리고 어제 선잠에서 꾼 꿈에서 아니마가 다시 나왔다. 꿈 속에서 여자친구인 사람과 어딘가로 가기로 했다. 난 차로 가고 싶다고 했다. 3시간 30분 걸리는 거리다. 근데 알 수 없는 이유로 버스를 타게 됐다. 돈을 지불했다. 도착하고 나서, 나는 몹시 불만이었다. 왜 차로 오지 못했는지 알 수 없었으나, 나는 반드시 차를 끌고 와야 편하다는 걸 고집하고 있었다. 뭔가 놓친 기분이었다. 그리고 다시 돌아가는 게 번거로워서 '차를 끌고 왔으면' 하는 마음이 더 커질 뿐이었다. 여자친구인 사람은 자기 나름대로 뭔가 불만이었다. 말은 없었다. 분명한 건 아니마는 아니었다. 아니마는 이후에 나왔는데, 우리는 서로 토라져 각자 길을 갔다. 여기가 어딘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니까 목적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런데 산길이다. 신사 같다.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걷다 보니 뭔가 아름다운 풍경의 신전 같은 곳이 길 옆에 나 있다. 나는 담장에 난 사각형 구멍을 통해 이 풍경을 본다. 길은 왠지 축축하다. 발이 잠길 듯 물이 충분했다. 나는 신발이 더러워질 거 같아 물이 덜한 곳으로 이동 경로를 옮긴다. 그렇게 걷다가 여자친구를 두고 온 사실이 떠오른다. 버스에 나의 짐도 두고 왔다. 뭔가, 되돌아가야만 할 거 같다. 잃어버릴 수 없다. 그렇게 나는 서둘러 다시 온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때, 아니마가 맞은 편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그는 몇 가지 '연'을 갖고 있었는데, 꿈에서 분명 인식했으나 지금은 까먹고 기억에 남는 건 '푸른 나비' 형상의 연이었다. 아니마는 그걸 내 앞에서 꺼내보였고, 나를 쳐다보며 아무 말 없이 시선을 던졌다. 나는 아니마를 지나치고 서둘러 길을 올랐다. 오르막이었다. 둥근 곡선의 경사였는데, 앞으로 힘있게 나아가려고 해도 자꾸 나아가지 않았다. 옆에서 지나가는 남자 두 명이 나를 보며 '쟤 뭐하나'하는 식의 구경을 했다. 나는 힘을 빼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걸음을 옮기기 위해 딛고 있는 뒷발에 힘이 너무 들어가 자꾸 뒤로 밀리고 있었던 것이다. 힘을 빼야돼, 힘을 빼야돼 하지만 바로 되진 않고 조금의 실패 후 비로소 그 언덕을 넘을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돌아가는 길에서 꿈에서 깼다.


 이후 나는 이어서 환상을 만나려고 자세를 잡았고, 몇 가지 환상이 나타났다. 그중 하나는 어떤 부패한 시신의 여성이었다. 난 단 번에 그 시신이 부풀어서 곧 터질 거라는 걸 알아봤다. 순간적으로 피하려고 했지만, 나의 의식은 끝까지 마주하자는 마음으로 피하지 않았다. 이 결심은 하나도 어렵지 않았다. 그러자 점점 부풀던 시신이 배부터 터졌는데, 그 배에서 푸른 나비들이 포르르 날아올랐다. 그렇구나. 시작됐구나. 싶었다.


 융이 나에게 알려준 상징의 의미들이 나의 맥락에 맞춰 나타나기 시작한 순간이다. 연금술 작업에 있어 '부패'는 작업 시작 단계라고 한다. 푸른 나비는 '청색', 그리고 '물', 사각형을 통해 본 신전. 문제는 내가 여전히 도망치고 제대로 이 과정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이 여정을 떠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자꾸 되돌아가려고 하고, '의식'에 매달리려고 한다. 물에 발이 더러워질까 피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난 그 생명력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아니마는 보여줬다. 아마 내가 앞으로 마주할 단계들은, 꽤 견디기 힘든 긴장들일 거 같다.


 나의 무의식은 나에게 아주 오랫동안 '방황'의 꿈을 보여줬었다. 나는 그 느낌을 정말 반복적으로 느꼈다. 어딘가로도 가지 못하는, 어딘가로 닿아야 하는데 닿지 못하는, 뭔가에 쫓기지만 뭔가 쫓는지는 나타나지 않는. 융 읽기 몇 달 전 꿈 하나가 떠오른다. 어제도 분명 오래된 꿈 하나가 다시 상기했는데, 뭐였더라... 이건 다시 까먹었다. 몇 달 전 나는 시골? 같은 곳에서 외할아버지를 만나는 꿈을 꿨다. 많이 까먹었는데, 내가 어딘가로 가야하는데 외할아버지가 자꾸 가지 못하게 막았다. 그래서 외할아버지한테 뭔가 알고 있는 많은 걸 알려줘야만 했다. 그 대상들은 중국 고전 같았다. 사서삼경 따위의 것들? 그러다가 막 가려고 했는데 자꾸 뭔가가 가로막고, 결국 못 가서 절절매다가 꿈에서 깼더랬다.


 어제 꾼 꿈도 마찬가지다. 내가 지금 방황에 종지부를 찍으려면, 나는 결단을 해야만 한다. 이제는 견뎌낼 각오를 다져야 한다. 의식을 내려놓고, 몸을 활짝 열어젖혀야 한다. 솔직히 어떻게 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다. 그런데, 대충 직감은 든다. 욕심인지, 직관인지 모르겠지만. '가을'이 오고 있다. 연금술 작업은 가을에 절정에 다다른다고 한다. 조금 설레기도 한다. 내가 그동안 수행한 '의식'이 지금 이 순간을 위해 준비되어 있다는 자신감이 있다. 무의식이 보여주는 모양으로는 무척이나 나약하지만, 그래도 난 널 알아볼 수 있어 친구. 


 의식적 차원에서 또 다른 숙제는 '투사'다. 역시 어렵다. 도대체 인간은 왜 자기 감정을 은폐시키고 투사를 하면서 사람 기분을 좆같이 만들까? 최근만 해도 벌써 2명이다. 난 거의 확신한다. 그들이 아무리 은폐해도 내 눈을 속일 순 없다. 좆같은 투사... 정말 쉽지 않다. 욕부터 나온다. 시발 진짜 왜 저래? 하는. 하지만 투사하는 당사자들은 바로 이 기만을 완성시키기 위해 절대, '모른(척 한)다'. 나만 손해다. 내가 이 구도에 얼마나 오래 괴로워했는지, 이제는 좀 종지부를 찍고 싶다. 


 내게 도착해, 나의 분노를 유발하는 남들의 투사는 대체로 내가 제공하지 않은 언어-비언어를 갖고서 마치 내가 한 것처럼 '전제'한 뒤 그 다음 말로 구속을 거는 것이다. 어제는 병원 접수처 여자였는데... 존나 기분 나빠서 그냥 나와버렸다. 그들은 본인의 '뭔가'를 남에게 함부로 투사한다. 그래놓고 상대방이 그렇게 말했다는 식으로 비꼬는 말을 툭 던진다. 이거에 반응하면, 나는 정말로 그렇게 말했다는 걸 인정하는 꼴이 된다. 그렇다고 아니라고 말하기엔 이미 본인이 멋대로 '고정'시킨다. 이중 구속 화법이다. 더블바인드. 아이들의 정서를 파괴시키는 히스테리 화법. 한 인간이 이런 투사를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전이되는 사람들에게 구사하는 건 그 사람만의 맥락 속에서 타당한 이유가 있다. 하지만 아무 연관없이 그런 걸 맞아야 하는 순간에는 일단 기분이 좆같다. 이들의 히스테리는 무차별 공격을 가하기 위해 희생양을 기다리는 포식자 자세를 취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걸 감당하는 사람들이 전문 교육을 받아 양생되고, 그들이 결코 저렴하지 않은 비용을 받는 건 당연한 거 같다. 오만군상의 인간들 투사와 히스테리를, 아무렇지 않게 자행하는 언어 폭력을 감당하려면 그에 상응하는 보상이 있어야지... 스쳐지나가듯 만나는 히스테리들은 최대한 말을 섞지 않음으로써 적자만 발생하는 나의 신경 비용을 그래도 지켜낼 수 있지만, 그들을 곁에서 꾸준히 봐야 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갉아먹힐까. 하지만 안다. 그걸 알아보는 사람에게나 '더 가혹하게' 느껴진다는 걸. 나의 과도함이다. 난 은폐된 무의식으로 말미암은 의식의 일방성에 엄청난 과도함을 발휘한다. 이거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 정말 쉽지 않다. 맨날 욕만 할 것인지. 이성적으로 공격한다 한들 뭐가 해결되거나 해소되는 건 없다. 이건 잘못된 접근이다. 분명하다.


 비합리적인 면모에는 그에 걸맞는 태도로 어울려야 한다. 그렇다고 히스테리 부리는 인간들의 언어 구사를 똑같이 할 자신은 없다. 나는 그게 절대 안 된다. 나도 모르게 튀어나오려 해도 내 정신은 '정직함'을 요구해 얼마 못 가 사과하고 용서를 구하고 나를 고치려 든다. 내가 스스로에게 발달시킨 정서의 책임, 감정의 책임이다. 세상에 모든 사람이 이런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걸 인정하기까지 꽤 많은 괴로움이 있었다. 자신의 정서와 감정에 책임을 질 줄 아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다. '책임을 진다'가 기본이 아니라 '책임을 질 줄 모른다'가 기본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무수한 인간들에게 과도한 요구를 멈출 수가 없다. 결국 나의 투사와 맞물린 문제다. 얼마나 발달을 못했으면, 바로 '감정적'이다. 겉으로 티를 안내고, 혹은 나아가서 꽤 성숙한 태도로 스스로를 움직여도 내면 깊숙히에서는 완전 '유아'다.


 이전에 4~50대 중년 남자들에게 이런 투사나 인신공격을 당한 적이 있었다. 그들은 기성 문인이나, 소위 전문가 딱지를 달고 있는 것과 '인격적 성숙'이 비례하지 않는다는 걸 알려준 표본들이다. 나에게 불필요한 투사, 인신공격을 가했을 때 나는 그들을 타이르고 본인들 마음이 불편하지 않게 먼저 보듬어줬다. 그게 나의 사회화고, 외향적 처신이다. 하지만 속은 뒤집어져 있다. 내가 왜 그런 말을 들어야 하지? 저 치들의 후줄근한 인격으로 내가 왜? 그들은 본인이 어떤 상처를 줬는지 제대로 인정하지 않았다. 먼저 말하지도 않는다. 한 인간은 '장난이었어'라는 식으로 얼버무리려고 했다. 문학 평론가란 인간이 사적으로 그런 인격이라니. 마찬가지로, 앎과 삶이 일치하는 건 기본이 아니다. 인간으로서의 성숙함과 합리적 발달은 별개라는 게 사람들의 기본이다. 


 나의 문제는 바로 이 '내면의 자아'가 여전히 발달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이 미성숙한 건 나와 상관없는 이야기다. 어떻게 해야 과도함이 아닌 상태로 디폴트를 조정할 수 있을까. 이성적으로 해석을 달리하며 관점을 확장하는 건 확실히, 도움이 안 된다. 정확히 말해 '이해의 영역'이 아니다. 이건, 무의식과 연루된 '체험의 영역'이다. 아마 이 부분에서 나를 발달시킬 수 있게 되면, 분명 무의식이 더 이상 방황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다음 단계를 보여줄 거란 확신이 든다. 그래서 고민 중이다. 이걸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어제 환상에서 몇 가지 시도와 노력을 하기는 했다. 일단, 피하지는 않으련다. 바깥에서 나타난 투사든, 내 안에서 나오는 투사든 모두 기회라고 생각하련다. 부딪히며 극복하는 수밖에 없다. 상상의 힘을 빌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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