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 작업 14
24.02.12
요즘 전반적으로 꿈을 많이 꾸지만, 아예 기억나지 않거나 거진 잊고 만다. 단편적인 것만을 간신히 기록으로 옮겼다.
꿈 #1
꿈에서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2년 2개월이 걸린다는 인상을 받았다. 게임 [젤다] 시리즈가 왠지 인상으로 남아 있다. (실제로 나는 젤다 시리즈를 하고는 싶으나 제대로 플레이를 하지 않고 묵혀두고 있다)
꿈 #2
서울 집에 거주하고 있는데, 윗집에서 자꾸 쿵쿵거리는 발 소리가 들려온다. (현실에서는 나의 윗층에 살던 사람이 이사를 가고 지금 아무도 거주하지 않고 있다. 곧 누군가 이사 오기로 예정되어 있다) 나는 이제 입주했나 생각하지만, 쿵쿵거리는 발소리가 너무 신경쓰인다. '아직 이사온 건 아닌 거 같은데'라는 생각도 했다. 그래서 입주 준비를 하나? 청소를 하나? 하는 식으로 생각을 하지만 짜증이 밀려온다. 계속 쿵쿵거린다. 나는 뭐라고 말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이내 꿈에서 깨어난다.
꿈 #3
꿈 #2 이후 바로 잠에 들어 꾼 꿈 같다. 무슨 놀이공원? 테마파크? 같은 곳에 여자친구인 사람과 다른 낯선 여자와 동행 중이다. (이 꿈을 꾼 뒤 깼다가 바로 잠들어서 전반적인 인상을 모두 잃어버렸다. 그래서 모든 인물이 다 낯설다는 느낌-처음보는 사람으로 기록했다) 그러던 중 내가 이 여자들 앞에서 융의 책에서 읽은 부분을 말하는 대목이 나온다. (아마 그 전에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한 맥락 빌드업이 있었던 거 같다) '남자는 아니마와 사이가 안 좋으면 100명의 여자와도 관계를 맺을 수 있고, 여자는 아니무스와 사이가 좋으면 오직 한 남자와 관계를 맺는다'는 말이다. 특히 나는 이 말을 할 때 은근히 나에게 유리한 쪽으로 교묘히 뉘앙스를 바꾸는 의도를 느낀다. 이 말을 하고 난 뒤 셋은 깔깔거리며 웃었다.
꿈 #4
꿈 #3 이후 곧장 꾼 꿈인데, 일어나자마자 완전히 잊었다. 어떤 들판? 허허벌판? 같은 곳이다. 23일이 걸리는 무언가를 만드는? 그런 상황이었던 거 같다. 그게 무엇이었는지 잡힐듯 말듯 너무 간지러웠는데 결국 망각으로 빠지고 말았다.
융의 [꿈 분석, 꿈 해석]을 다 읽었다. 융 읽기를 마치고 나의 작업으로 본격적으로 넘어가려 했으나, 다시 발목 잡히듯 읽지 않은 융 책을 읽기로 결심한 건 여전히 홀로 내면 작업을 체화시키지 못했다는 부채감 때문이었다. 꿈을 꿔도 도통 알아보지도 못하고, 환상 이미지도 어떻게 지속적으로 마주하는지 갈피를 잡지 못하니 느슨해졌다. 특히 당시 꿨던 반복적인 '외갓집' 장소가 결정적이었다. 꿈은 나에게 반복해서 무언가를 보여주는데, 이게 중요하다는 걸 느끼지만 그게 왜 중요한지 체감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혹시나 융이 이에 대해 어떤 의미를 알려주지는 않을까, 그런 기대심이 컸다.
[꿈 해석] 막바지에 한 남자의 꿈에서 '증조 할머니'가 나오고 이를 융이 분석하는 내용이 나왔다. 증조 할머니는 '위대한 어머니'로, 그래서 신성한 존재로 변환된다. 나의 꿈에서도 외갓집이 자주 나오고, 또 한 번은 정말 어머니들-증조 할머니와 함께 밥을 먹으며 내가 그들을 모시고 무언가를 하려는 장면이 있었다. 모두 실제로 내가 뵌 사람들은 아니었고 모두 낯설지만 꿈 속에서는 무척 친근하고 편안했다. 하지만 당시의 꿈이 보여준 결말은 나의 그림자가 나의 뒤통수-정수리에다가 침을 뱉는 걸 알아차리는 것이었다. 당시 꿈에서 그 장면을 CCTV를 통해 보게 되고, 나는 충격을 먹고 그의 유치함에 놀라지만 마음 한 켠에서는 측은함을 느꼈다.
이번에 실질적으로 꿈을 다루는 융의 책을 보면서 내가 배운 태도는, 이럴 때 나의 의식이 어떤 측면에 보다 신경을 써야하는지, 그 나침반을 읽는 것이다. 아마 꿈의 순서로 보면, 이 꿈 이후로 다시 한 번 외갓집에서 실제 엄마가 나오고 그 중년 남자가 이번엔 멋드러지게 나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꿈에서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나와 동행하지도 않았고, 나는 혼자서 무언가를 돌파했을 따름이다. 그러면 당시 내가 그 꿈을 꾸고 의식적으로나마 그런 유치함에 대해 받아들이고자 어떤 행위를 한 게 적확했음을 알아차릴 수 있다. 실제로 나는 꿈이 보여준 그 의미가 무엇을 가리키는지, 실제 현실에서의 의식화 중 어느 부분인지 연결시킬 수 있었고, 그래서 미루지 않고 즉각 행동으로 옮겨서 나의 잘못을 바로잡았었다. 다만 외갓집은 도통 무슨 의민지 헤아려지는 게 없었는데, 융의 내용을 보고나니 얼추 그려지는 게 있다. 그 장소는 내 안에 잠들어 있던 어떤 '역사적 인식'과 결부된 '신성함'의 실마리를 느낄 수 있는 곳의 상징이 아닐까 싶다.
실제로 나란 사람은 늘 노인에게서 모종의 따스함과 삶의 무게, 어떤 묵직함을 느낀다. 또래 입장에서는 왜 이렇게 빨리 정신이 늙었냐는 맥락으로 가닿는 것이고, 중년-노인 입장에서는 젊은 친구가 벌써부터 삶을 깨우치고 있구나의 맥락으로 가닿는 그런 태도다. 이런 태도들이 어떤 규율에 의한, 제도에 의한 규범의 결과였다면 나는 꿈 속에서 절대 그런 관계를 맺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건 내가 노력해서 얻은, 쉽게 말해 깨달았기 때문에 변화된 나의 모습 중 일부다. 내가 이 부분에 대해서 그다지 의식하지 않고 산다는 점도 조금 의식할 필요가 있음을 알게 됐다. 왜냐하면 나에겐 그저 숨쉬듯 너무나 당연한 것이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도 발생되지 않지만, 위에 나타나는 것처럼 꿈에서 상징으로 드러나거나, 혹은 내가 어떤 태도로 말미암아 나의 정신과 관계를 맺는지에 대해 의식화를 꾀할 때 필요한 중요한 열쇠를 의미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단점에만 눈깔이 충혈될 게 아니라 나의 장점에 대해서도 조금 올바르게 알아둘 필요가 있다.
이와 별개로 여러 꿈을 통해 자주 나타나는 상황들에는 이런 것들이 있다. 꿈에서 낯선 사람들과 혹은 친숙한 얼굴의 가면을 쓴 사람들과 깔깔거리는 웃긴 장면이 꽤 자주 나온다. 웃음으로 꿈이 끝나는 건 뭘 의미할까? 그건 잘 모르겠다. 또 꿈에서 여러 버전으로 나는 자꾸 무언가를 풀고, 해결하려고 한다. 또 아니마들과의 관계들이 무척 빈번하게 나온다. 융의 꿈 사례를 보다보면, 병적인 상황이라거나 실제 인격에 있어 무척 치명적인 걸 보여주기 위한 상징같은 걸 알 수 있는데 나의 경우에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환상 이미지나 적극적 명상이라면 나 스스로를 의심할 수도 있겠으나, 꿈으로 드러나는 것만을 보고 있기 때문에 나는 조금 믿음을 가져도 좋지 않을까 싶다. 가령 아니마와 사이가 안 좋으면 융의 말마따나 아픈 아이가 나타나거나, 애초에 등장해주지도 않는다. 나는 전반적으로 아니마와 사이가 무척 좋은 편인데, 어쨌든 나의 아니마는 나의 아니마이므로, 다른 이의 아니마와 비교할 필요까진 없다. 최근에야 별다른 특이 상황으로 출현하지 않을 뿐, 아마 과거의 꿈에서는 분명 사이가 좋지 않은 상황들이 나타났을 것이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아니마와 늘 관계를 맺고 있다. 서로 대화를 하고, 내가 무언가를 해주고, 때로는 아니마가 나를 구해주고, 조언도 하고, 심지어 뭘 하라고 요청도 한다. 꿈 속에서 내가 누군가를 잔인하게 죽이거나 폭력적으로 굴거나 하는 대상은 늘 남자였다. 최근에는 대체로 남자들과의 관계도 원만하다. 갈등이 있어도 풀면서 끝나거나, 꿈 속의 감정 상태가 결코 호전적이거나 공격적이지 않다.
그러나 아마 이런 시선들 때문에 내가 나의 무지를 못 보고 있는 게 크다. 융에게서 배울 점이 바로 이것이다. 융은 꿈을 구체적인 현실로 본다. 그래서 실제로 꿈을 분석할 때도 그런 방식으로 다룬다. 내가 한동안 이 기능을 내려놓고서 지냈던 것이, 아마 나의 빈번한 공상으로 분출되는 게 아닐까 하는 꽤나 믿음이 가는 생각이 떠오른다. 한 달 전인가, 근래에는 그게 나의 퇴행적 리비도 정체에 따른 결과라고 일단 믿었다. 그러나 그걸 깨우침으로 가져가기 위해선 보다 깊게 인식할 필요가 있었다. 단순한 인식은 상품의 이미지와 닮았다. 그것과의 관계를 통해 직접 체험하기 위해선, 어쨌든 이미지 너머의 실체에 다가가야 한다. 그것이 바로 나의 감각 기능이다. 내가 조금 오해하고 있던 '감각 기능'에 대해 융이 바로잡아줬다. 나는 감각 기능을 신체 감각에 연결되는 여러 행위로만 국한시켰는데, 그건 현실을 지각하는 태도에 방점이 찍혀야 한다. 즉, 외향적 사고 유형의 사람이 감각 기능과 궁합이 잘 맞는 것처럼, 현실을 감각적으로-사실적으로-드러나는 것으로 인식하는 태도로 풀이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융이 [꿈 분석, 해석]에서 다루는 내담자는 사고-감각 기능을 주로 쓰는 사람인데, 그는 사업을 하는 사람이다. 감각 기능을 주로 쓰는 행위는 금융-주식 거래, 여러 방면의 사업, 관찰-수집 등이 있을 거 같다. 엔지니어는 특히 이 기능이 요구되는 게 당연하다. 내가 가장 취약하게 느껴지는 행위들이다.
왜냐하면 나에게 이 기능은 가장 열등한 기능에 속하며, 따라서 내가 늘 현실, 현실거리는 바로 그 현실을 담당하는 기능에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로써 내가 겪는 여러 모든 방황의 문제, 정신 불균형의 문제가 어느 정도 윤곽을 그려낼 수 있게 된다. 내가 20대 초중반부터 가열찬 의식화의 시간, 인격 발달, 성숙을 거칠 수 있었던 건 그저 막연히 이성과 감정을 발달시키는 데 몰두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늘 현실-감각을 벼리기 위해 고심하고 실험했던 게 가장 큰 동력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게 바로 나의 그림자, 내가 알아보지 못한 채 무지로만 남겨뒀던,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으나 사실 가장 중요했던 부분인 거 같다. 실제로 나는 현실에 맞서기 위해 현실을 배우는 태도를 기를 수 있었는데, 그때 배운 감각 기능을 놓는 순간 이렇게 방황으로 굴러떨어질 수밖에 없음은 거의 필연에 가까운 운명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 기능이 다시 전면 퇴행해 원시적인 상태로 되돌아감으로써, 나의 정신 상태도 그때 그 시절에 걸맞는 상황으로 퇴행하는, 그런 조감도라면 지금의 상태가 꽤나 설득력 있게 그려진다. 내가 이 감각 기능을 다시 되살리는 게, 사실 아니마가 요청했던 것임을 새삼 알아차린다.
이외 몇 가지 다시금 알아차린 것들이 있다. 그중 하나는 그림자와 아니마와의 결합이다. 꽤나 개연성 있게 설명하기는 어렵게 느껴지지만, 어떻게 해야 지금 내가 겪고 있는 그림자 문제를 풀어낼 수 있을까에 직관이 그 해답을 꺼내줬다. 그건 바로 나를 낮추는 것이었다. 참... 이 뻔한 말 한 마디가 전면적인 의식화로 꿰어지는 게 이렇게나 어렵고 까다롭다. 삶의 이력으로 보면, 이 태도는 내가 20대 때부터 줄곧 갖고 있던 나의 외향적 태도였다. 이에 대한 의미화-가치화가 잘 정립되었기 때문에 꽤 오랜 시간 이 태도를 갖고 갈 수 있었으나 분명 부분적인 인식이었기 때문에 수명이 그리 길지는 않았다. 그 결과, 결국 나는 지쳐 나가 떨어지듯 더 이상 이 태도에 어떠한 의미-가치를 느끼지 못하게 되었고 이내 전면적인 그림자로 후퇴시킨 나머지 세상을 향한, 집단에 대한, 대중에 대한 가치박탈의 버릇으로 고착화된 것이다. 내가 이 문제를 풀기 위해 아니마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그림자-아니마와의 결합은 결국 내가 20대 때 하던 바로 그 방식을 이제는 좀 더 포괄적으로 하는 일에 다름 아니다. 의식의 용어로 풀면, 나는 감정으로써 열등함을 대해야 한다. 때로는 동정심, 측은지심이 될 수도 있다. 때로는 헌신, 겸손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다시금 배운 건 '감정'이다. 즉, 어떤 감정이 자연스럽게 일어나는지를 더욱 주의해야 한다. 이걸 잃는 순간, 무의미는 예정조화다. 이에 대한 분명한 인상이 스쳐지나가듯 나의 정신에 떠올랐다. 순간적이지만 나는 그걸 붙들었고, 그래서 그걸 등불로 삼을 수 있게 된다. 융의 말에 따르면 이건 '신성의 발견'이다.
이걸 현실에서 잘 수행하면 나는 더 이상 인정에 대한 콤플렉스에 사로잡히지 않고 이를 진정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인정에 대한 콤플렉스는 늘 나의 노력, 나의 배려, 나의 신경쓺이 상대로 하여금 '의식'되도록, 의미와 가치로 되돌려 받도록 기대하는 걸 의미한다. 이에 대해 일찍이 어떻게 다뤄야하는지를 깨우치고 삶에 적용시켰음에도 불구하고 퇴행하게 된 건, 부분적으로만 알고 너무 과도하게 매달렸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어떻게 방치하고 무지해야 과도함으로 흐르고 마는지를, 이제는 배우게 된 것이다. 이런 걸 보면 정말 융의 표현이 꽤나 적확하다는 걸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일련의 모든 '앎'은 거진 나선형, 상승-하강, 이리갔다 저리갔다 우당탕탕 좌충우돌이다. 논리로 닦인 앎은 직선의 형태를 띠지만, 정신적 앎은 늘 숲과 나무의 문제로 다뤄진다. 멀리서 보고 안에 들어가서 보고 다시 멀리서 보고 다시 안에 들어가서 보며 끊임없이 자신의 상태를, 성취와 실패를, 추구와 몰락을 계속 거치면서 가는 길인 것이다. 이게 시발... 이성으로만 될 게 아닌데도 그걸 배우는 데 이토록 비효율적인 삶을 등가해야 한다는 게 삶의 현장이다. 이 현장으로 들어간 초입부에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여러 시련을, 이제서야 알아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외로움이니 고독함이니 추상이니 무의미니 온갖 유혹들을.
이건 융이 말하듯 '거울이 많아질수록'에 해당된다. 인간은 자신의 정신을 발달시킬수록, 특히 자주 쓰지 않는 기능을 분화시킬수록 자신을 바라보는 거울을 늘린다. 인간 정신의 균형이란 고정된 상태가 아니다. 사람들이 바보라 부르는 사람도, 지적 장애인이라 부르는 사람도 얼마든지 신에 버금가는 평온함을 누릴 수 있다. 다만 문제는 이것이다. 의식이라는 참으로 교묘한 정신 기능을 발달시킨다는 건, 자진해서 문제를 복잡하게 만드는 것이다. 1개의 거울만 가질 때는 그 문제가 그 수준에 맞춰 이뤄진다. 2개의 거울은 또 그만큼의, 3개 4개의 거울은 그보다 더한 복잡함을 낳는다. 내가 이 흐름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면, 나는 '의식화'의 투사에 있어 늘 고통받을 수밖에 없다. 어떤 인간을 두고서 왜 이 인간은 이런 걸 의식하지 못하면서 자꾸 인정하지 않을까 하는 '책임'의 문제로 양도되기 때문이다. 철학을 통해 인간 정신의 결함이나 이성의 성찰 기능이 갖고 있는 함의에 대해 이해한다 한들, 심리의 차원에서 이를 '개인의 문제'로 번역해내지 못하면 나는 사람을 볼 때 사람을 보지 못할 수밖에 없다. 개인의 문제란 정말 어렵고 까다롭다. 정말... 이걸 해낸다는 게 얼마나 불가능한 일인지를 인정하지 않는 게 참으로 대단할 뿐이다.
그렇기에 나 또한 다시금 깨달을 수밖에 없다. 깔끔히 인정해야 한다. 이 버겁고도 불가능한 문제를, 풀 수 있다는 이성에게 너무 많은 권한을 줘서는 안 된다. 못 푸는 게 당연하다. 다루는 것조차 못하는 게 맞다. 이 부담을 내려놓지 못하고 아득바득 짊어지려고 발악하는 나의 정신이 가닿는 곳은 결국 무의미의 늪이다. 방황 그 자체다. 이 형상은 무수한 거울을 획득해 놓고 그걸 전면에 둘러 어딜보든 나밖에 보이지 않게 자기 만의 상에 꼼짝없이 갇히는 꼴이다. 이게 자기중심적이라 비판하는 건 얼마나 쉬운 일인가. 당연히 남이 그러고 있으면 너무 불보듯 뻔히 보인다. 하지만 이게... 단련된 페르소나를 갖고 있고 또 분화를 어느 정도 진행시킨 정신이라면 타인에게서 그런 조언을 받기가 희박해진다. 왜냐하면 나의 사적 관계망에 있는 사람들은 나를 '자기중심적인 인간'이라고 말해줄 수 있다기보다 배려하고 신경쓰고 말을 조심스럽게 하는 인상을 받기 때문에 섣불리 그렇게 말할 수 없게 된다. 그런 나의 '외향'을 뚫고서 나의 내면을 알아보는 시선은, 그런 가르침은 원래 쉽게 받을 수 없다. 나의 저항과 반항을 누그러뜨릴 수 있는 권위도 갖춰야 하기 때문이다. 그럴 바에는 자성하는 게 훨씬 쉬운 길이다. 내가 나의 반성 능력과 성찰을 더 벼리는 게 현실적으로 옳다.
이외에도 '다시 태어난다는 것'에 대해서 다시금 배울 수 있었다. 아직은 조금 불완전한 인식이지만, 그래도 붙든 게 있기 때문에 손에 나침반이 있다. 다만 조금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건 바로 '개인적인 문제-집단적인 문제'의 구도다. 이건 융이 내담자들에게 자주 말하는 것처럼 '아무리 말해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거듭 말해줘야 한다'의 상황과 똑같다. 지금까지 읽은 융 책이 15권인데, 정말 얼마나 자주 언급했던가. 그럼에도 나는 전혀 알아보지 못하고 있었다. 솔직히 지금도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 꿈에서 겪는 여러 상황 속에서 이건 개인적인 문제이고, 이건 집단적인 문제라고 분별할 수 있는 식별력-감각 기능이 나에겐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걸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면 나는 불필요하게 '나의 문제'로 확장시켜 가져가게 되고, 이는 고립으로 흘러가 결국 퇴행의 수순을 밟게 된다. 애초에 나는 '집단'에 대한 전가-투사를 거의 전무하다시피 갖고 있질 않기에, 어떻게 하면 개인적인 문제가 아닐 수 있을까?에 대해서만 신경쓰면 된다. 이게 일상 의식 속에서는 이성의 도움으로 충분히 분별할 수 있지만, 꿈에서는 존나게 어렵다... 단 한 번도 그걸 눈치챈 적이 없다. 꿈에서 겪는 모든 게 나를 향해 벌어지는데, 이걸 개인적인 문제가 아닌 것으로 알아볼 수 있는 게 가능할까? 그것도 스스로? 아직 나에겐 좀 희미하다. 신성한 등불이 나타나지 않았다. 이는 좀 더 두고봐야할 일이다. 현실에서는 얼마든지 쉽게 할 수는 있어도, 정작 나를 향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 이게 바로 발달시킨 기능의 함정이다.
앞으로 한동안은 융 읽기를 멈출 예정이다. 이제는 정말 수복을 해야 한다. 지금까지 이 모든 짓거리의 목표는 딱 하나였다. '내가 나를 구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는 잘 모르겠다. 그래도 내가 나를 망가뜨리는, 퇴행하도록 방치하는 건 멈출 수 있게 된 거 같다. 이정도로 만족한다. 솔직히 싸게 먹혔다. 현실적으로 이렇다 할 유의미함을 실체화시킨 건 아니지만, 그래도 어떻게 다뤄야하는지 초심자 과정은 거친 기분이다. 앞으로는 실습이다. 융을 읽지 않고도, 과연 내가 무의식-꿈-적극적 명상을 일상으로 가져갈 수 있는지의 복습 시간이다. 그래서 융의 남은 책들을 남겨두었다. 특히 [레드 북]은 언젠가 내가 철저한 고립의 상태로 침윤할 수 있을 때를 위해 남겨뒀다. 내 생애 첫 만다라를 만나기 위해 이 작업을 계속 하고자 한다. 처음 융을 읽기 시작한 이후 초기 꿈은 이미 나에게 보여줬다. 아니마는 나에게 푸른 나비의 연을 줬는데 꿈 속의 멍청한 나는 그걸 받지도 않고 왔던 길을 되돌아가려고 아주 발악이었다. 멍청한 놈. 뭐 다 이유가 있고, 그럴 수 있다. 왜냐하면 나는 그 꿈을 꾸고도 아쉽다는 인상을 받기 보다 너무나 당연스럽게 '아직 해야 할 일이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렇다, 나는 분명 해야 할 일이 있다. 이 상을 다시금 느끼는 게 너무 오랜만이다. 아직은 아주 희미하다. 이 신성한 등불을, 다시금 활활 타오르게 할 수 있을까? 당연히 그럴 수 없다는 걸 안다. 그저 계속 살피며 갈 뿐이다. 죽었지만 살아 있는 융의 정신에게 존경심을 담아 감사함을 전하고 싶다. 그를 거부했던 것도, 다시금 시기적절하게 만난 것도 다 이런 서사를 그리게 됐다. 우연이나 운명 같은 낡은 말은 쓰고 싶지 않다. 될지도 모를 창안을 위해 남겨두고자 한다. 내일 모레면 어머니의 항암 결과를 듣게 된다. 과연 엄마의 몸이 암으로부터 자가 면역의 균형을 일궈냈을까? 엄마가 몸의 치유를 하는 동안 옆에서 나는 정신의 치유 과정을 거쳤다. 그 기간 동안 꿈에서 엄마가 자주 나왔던 건 나에게 있어 아무런 의미도 느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는 엄마를 자연의 일부로 여기기 때문이다. 이 균형을 발맞춰줄 수 있는 엄마가 고맙다. 항암 결과에 따라 앞으로의 일상이 어떻게 될지 좌우되겠지만, 준비 완료다.
570번 다시 태어나야 한다면, 다시 태어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