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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와 돌멩이 Feb 07. 2024

낚고 낚이는 투사

내면 작업 13


24.02.07



꿈 #1


(또래 남자 3명과 같은 집으로 향하던 꿈을 꾼 다음 날) 나는 여자 3명과 한 집에서 살고 있다. 일부다처제 같은 느낌의 관계 양상이다. 다만 3명의 여자와 1:1의 관계만을 갖고 있고, 한 여자의 질투나 그런 걸 신경쓰는 장면이 나온다. 나는 각각의 관계를 조율하고 중재하는 데 많은 신경을 쓰고 있다. 그러나 나를 가장 불편하게 만드는 건, 꿈 속에서 사는 이 집이 나의 집이 아닌 3명 중 한 명의 집이라는 점이다. 나는 얹혀 사는 느낌, 스스로 마련한 집이 아니라는 데에 부채감을 느끼고 있다. 꿈의 시작과 끝, 중간중간 여러 장면을 잃었다.


꿈 #2


오늘 꾼 꿈인데, 거의 완전히 잃어버렸다. 희미하게 느껴지기론, 나는 무언가를 해결하는 과정에 있었다는 것. 처음에는 이것, 그 다음, 그 다음, 이런 식이었다. 가장 마지막에는 '식물'의 문제였다. 진화의 역순처럼 다음 과제가 흘러가는 느낌이었다.






어제 아침에 일어나기 전, 아니마 3명과 함께 사는 꿈이 너무 강했었기에 일어나서도 정신을 차리기 쉽지 않았다. 엄마와 함께 병원에 가는 날이었기에, 또 나는 의식적으로 운전을 하는 날은 무의식과의 줄다리기에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고 스스로 다짐했기에 담배 한 대를 피면서 무의식을 달랬다. 확실히 무의식이 무척 강하다는 걸 체감했다. 그래도 이내 수긍을 해줬는지 정신을 잘 가다듬고 병원에 다녀왔다. 조금 순조롭게 검사가 진행되어 일찍 끝나 집에 일찍 도착했음에도, 어떤 긴장이 풀리는 느낌과 함께 피로가 몰려오기 시작했다.


 중간중간 전날에 꿨던 꿈을 곱씹으며, '전기 충격기'가 무얼 의미하는지 깨닫게 되었다. 그날 그 꿈을 꾸고 나는 하루종일 '감전 상태'를 보냈었다. 나는 이 상태를 시로 풀어내고 싶은 욕망을 벌써 몇 년간 갖고 있는데, 여전히 미루고 있다. 여하간 꿈 속에서 전기 충격기에 당해 찌릿한 체험을 한 뒤, 사지가 붙들려 꼼짝없이 고문당하듯 간지럽힘을 당했다는 건, 당일 의식의 무기력증으로 하루를 보내게 된 것과 분명 연관이 있었다. 솔직히 지금 내가 갖고 있는 해석에 확신은 없다. 다만, 무의식은 나에게 '수동성-형벌'을 겪게 했고, 나는 그걸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 채 스스로에게 다시금 감행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꿈을 꾼 다음, 꿈 속에서의 어떤 상징이 일상 체험과 연결될 때 인과가 발생하므로 해당 꿈을 예지몽으로 여기기 쉬운 거 같다. 하지만 내가 느끼기에 이건 예지가 아니라 경고다. 도리어 그런 경고를 대하는 나의 의식 태도가 곧 일상 체험으로 '재현'된 것이다. 이는 참 꼬이고 꼬인 매듭같아서 추적이 쉽지 않다. 하지만, 결국 내가 이렇게 꿈을 자꾸 기록하고 들여다보려고 하면서도 유보하는 태도를 지속하는 데에 목표가 있음을 긍정해야 한다. 나는 꿈을 분석하고 싶어 하고, 그것을 신중하게 여기기 때문에 섣불리 할 수 없음에도 어쨌든 실패를 감내하면서까지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융이 말해주지 않았으나, 내가 알아보는 어떤 '투사'에 대한 이해도도 관여되어 있다. 융은 '의식'의 역할과 기능에 대해 매우 힘주어 말하는데, 내가 느끼기에 그는 무의식-꿈에게 간혹 '의식이라는 투사'를 매우 아무렇지 않게 감행한다. 특히 그가 '동양적인' 무언가를 끌고 올 때 더욱 그렇다. 그는 서양인이라는 콤플렉스를 갖고 있으며, 더욱이 동양적인 지혜를 하나의 진리로 인용하길 즐겨 한다. 내가 15년도부터 나의 의식적 태도를 허물기 위해 굳건히 붙들고 있는 '방향'은 바로 이 의식의 투사가 거둬들여진 인간의 상태에 대한 것이었다. 이는 융이 보기에 매우 불가능한 태도다. 인간은 어쨌든 인간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의식을 발달시키고, 또 도덕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정도로 문명 사회에 있어 적응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의식을 전면 철수시킨 '무의식'의 제정신은 인간에게 완전한 야만을 뜻하며, 그 상태 자체로는 문제될 것이 없으나 우리네 '삶'에는 반드시 문제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의식은 결코 무의식에 맞서 저항해선 안 됨과 동시에 아무런 발달도 하지 않아선 안 된다.


 그러나 내가 느끼기에, 여기엔 분명 과도함이 적용되어 있다. 인간은 자신의 에고를 '자기 실현'이라는 이름으로 잘못 생각하며 '자연'을 빌미로 여러 우화를 통해 어떤 '긍정성'을 읽어내는 방식의 투사를 맹목적으로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분명 옳게 느껴지고, 겸손과 미덕으로 여겨지는 어떤 발달된 높은 수준의 인격체를 지탱하는 기반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거기에도 반드시 의식적 정당성은 부여되어야 한다. 인간은 왜 의식을 고양시켜야만 하는 인간인가? 창조, 아름다움,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조건, 이성, 책임, 도덕과 윤리 등등이 과연 정당하다고 믿을 수 있는가? 이에 대해 내가 이끌리는 지점은 이런 방식의 투사 내용이 곧 의식의 그림자를 뒷받침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 단순히 가려서는 안 된다. 의식 그 자체가 결함이라는 사실로부터 출발해야만 의식의 과도함을 견제할 수 있으니 말이다.


 아마 내가 느끼기에 서양인으로 쉬이 분류되는 인간들이 동양적인 무언가로 섣불리 겨냥되는 어떤 '원만한' 상태는 정말이지 환상에 가깝다. 현실적으로는 이런 피상적인 수준으로의 균형 잡기가 무의미한 것도 아니고, 또 놀라우리만치 실용적인 게 맞다. 그러나 맹목적이어선 안 된다. 인간은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 맹목적일 수 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맹목적일 수 있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되지 않아도 괜찮기 때문이다.


 이는 내가 꽤 까다로운 조건을 꿈을 보는 나의 태도에 부여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나는 나의 입맛에 맞게 무언가를 판단하고 인식하는 데 무척이나 경계한다. 이런 경계심이 왜 이렇게 민감하게 발달했는지의 추적은 아직 엄두도 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나의 그림자로 반영되는, 다른 사람에게서 이런 태도에의 '둔감함'이 나를 쉬이 자극하고, 나는 무척 열등하게 보게 된다. 융도 이런 방면에서 여전히 '노답'이라는 걸 인정하는 모습이 나와 참 닮아 보이기도 하고, 그래서 착잡하기도 하고 그렇다. 야 너두? 융이 스스로 자백하길,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면모 중 하나는 바로 '열등한 생각'이다. 그는 근친상간이나 끔찍한 범죄의 심리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지만, 열등한 생각은 도무지 그렇게 할 수가 없다고 말한다. 나도 그와 유사한 유형의 인간인지라, 이게 정말 얼마나 고역인지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사람을 마주하게 되면 정신이 겪게 되는 노고가 대충 이렇다. 180층 빌딩에서 124층에 거주하고 있는데, 얼토당토않은 이유로 나더러 1층까지 내려와서 다시 올라가라는 것이다. 이때 어떤 기만도 부려서는 안 된다. 엘리베이터를 탄다는 둥 내려올 땐 그래도 로프 하강을 한다는 둥 그딴 기만은 절대 부려선 안 된다. 올라갈 땐 심지어 같이 올라와야 한다. 이런 상황의 순간적인 상상으로 인한 '피로'가 바로 열등한 생각을 아무렇지 않게 내비추는 사람과의 대면 순간이다. 그래도 결국 이성을 단련하는 사고 유형의 인간들은 이런 피로를 감내하는 연습을 반 강제적으로 할 수밖에 없어서 결국 또 순순히 한다. 물론 소위 동족 혐오라는 말이 있듯이, 이런 감내의 노력을 좆같이 하는 인간을 보면 그보다 더한 경멸이 올라오기도 한다. 쉽게 말해, 열등함을 열등하게 대하는 모습에도 열등함이 투사된다.


 이런 이중성이 앞서 내가 전기 충격기와 감전 상태를 알아보는 데 써먹는 판별력이다. 꿈을 꾸고 난 뒤 무의식의 투정이 벌어져 현실의 내가 감전 상태에 스스로를 무방비화시키게 된 건 이중의 무지가 작동되는 연결을 의미한다. 하나는 꿈 속에서 그런 일을 '당하게' 있는 무지다. 꿈 속의 나는 친구들이 나에게 그런 일을 하는 데에 당하고만 있다. 왜 이런 일을 당하는지, 당해야 하는지가 아니라 상황을 적극적으로 이끌어나가는 데에 아무런 태도도 갖지 못하는 무지다. 이 무지가 현실의 의식적 나와 연계되어 있기 때문에, 그런 꿈을 꾸고 나서도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볼 수가 없다. 이런 이중의 무지가 맞물리면 이런 일이 벌어진다. 꿈 속에서 상징으로 나타난 행위가 현실에서 의미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런 무지를 견고하게 두면 이런 일은 '예지'로 여겨질 수도 있고, 어떤 계시로 여겨질 수도 있다. 그게 좋은 것이든 안 좋은 것이든 말이다.


 어제 이 연결을 알아차렸던 걸 오늘 새삼스럽게 확인하니 좀 더 확신이 든다. 오늘은 작업을 하기 위해 카페에 왔는데, 책을 읽으려고 해도 도무지 읽히지 않고 자꾸만 공상으로 뻗쳤다. 이 상태는 융이 내담자에게 자주 건네는 '당신은 내 말을 듣지 않고 있군요'라고 말할 때의 상태다. 책을 읽으려고 하지만, 나의 무의식은 책을 보지 않고 자기가 보여주고 싶은 것만을 우선적으로 분출하는 데 열심이다. 이런 상태를 현대인은 ADHD 증상이라고 진단하기도 한다. 자신이 집중하고 싶은데 집중할 수 없기 때문에 뇌의 호르몬 조절 문제로 여겨 약물 치료를 하거나, 빈번하게 벌어지는 일이지만 여러 자기계발 서적을 통해서 의지를 더욱 굳세우려는 노력으로 일임시키기도 한다. 오늘 한 한 시간을 무의식에게 내어주다가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노트를 펼치고 무의식을 받아적기 시작하니, 막혔던 게 뚫려 흐르는 느낌이 들면서 이내 잠잠해졌다. 이후 읽기를 이어나갈 수 있게 됐다. 무의식을 밖으로 꺼내는 데 든 시간은 고작 10분 남짓도 되지 않았었다. 물론 이런 행위들에게 기한을 매기는 건 어리석은 짓이긴 하다. 애초에 시간 따위는 의식하지도 않지만.


 이런 식의 무의식과의 완급 조절을, 아무런 이해도도 없이 일상의 습관으로 가져갈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느끼기론, 이런 이해도가 없으면 그 중요도를 알아보지 못한 채 환경의 변화에 따르다 자신이 어느 순간 정체되거나 방황하고 있음을 알아보지 못한 채 더한 방황을 하게 될 여지가 크다. 그저 어느 때에는 그런 습관을 자연스럽게 가져갔으나, 어느 때에는 새로운 방법을 배워 익혀야 하거늘 여전히 무지한 상태로 남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무언가 막혀 고이게 되면 그 에너지는 이제 날뛰기 시작하는데, 그제서야 의식은 '얘가 왜 이래?'하는 식으로 난동 부리는 애를 보는 어른의 시선처럼 보기 일쑤다. 그런 부모는 절대 아이와 교감할 수 없듯이, 의식 또한 무의식과 교감할 수 없다. 도리어 더욱 외롭게 만들게 되고, 그 외로움은 또 쌓이고 쌓여 다른 분출로 나타날 것이다. 무지가 쌓인다는 게 이런 방식 같다. 내가 여전히 그림자로서 받아들이는 데 애를 먹는 건, 인간들의 이런 무지들이다. 세상 인간들이 '성찰'을 하지 않는 게 진실이고 현실인데, 나는 왜 이걸 오롯이 받아들이는 데 애를 먹는 걸까.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한 눈이 없다. 오직 밖으로 난 눈으로 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어떤 인간은 그 눈으로 보이지 않는 걸 본다. 그렇게 되면, 보지 않는 눈들을 향해 왜 볼 수 있는 걸 보지 않느냐고 생각하게 된다. 머리로는 이 비유를 통한 인식을 깨닫고, 알고 있어도 '실제로 그런 사람'이 되는 건 정말 쉽지 않다. 애초에 볼 수 없는 걸 보는 인간이든, 그저 보이는 것만 보는 인간이든 조건은 똑같이 하난데 말이다. '보이는 걸 본다'는 건 변함없는 진실이다. 투사든 역투사든 모든 게 '보이는 걸' 전제로 굴러간다. 상대가 보지 못하는 걸 본인이 본다는 건 결국 본인 또한 보이는 걸 전제로 그런 투사를 한다는 게 너무 당연하고 뻔한 진실인데 말이다. 어떻게 이 그림자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정말 평생토록 풀 수 없는 문제로 느껴진다.


 내 삶에 이런 그림자 포용을 일절 하지 않았던 건 아니다. 나는 너무 지친 나머지 이제는 하고 싶지 않다고 투정부리고 있다. 그게 너무 힘들고 괴로운 일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더 편리한 방법은 없을까? 덜 힘든 '인식'은 없을까? 그런 삿된 마음이 없다고 할 만큼 자기 기만을 굴리며 살지는 않는다. 분명 달리 보면 이게 그렇게 힘들지 않을 수 있다고, 그런 기대를 내려놓지 않고 있다. 이런 나의 이성적 노력과는 별개로, 사실 나는 노력을 해야 하는데 말이다. 내가 나의 그림자에 해당되는 무의식을 잘 통합시키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나는 고착화된 습관처럼 세상을 향한 '가치박탈'을 일삼고 있다. 그리고 무지가 중첩되어 있기 때문에 헛된 노력을 하게 된다. 나는 왜 가치박탈을 하는가? 열등한 걸 열등하게 보기를 멈추지 않는가? 그들이 실제로 열등한 것과는 무관하게 사람을 사람으로 봐야하거늘, 왜 자꾸 그 사람의 열등함을 귀속시키려고 드는가? 여기에 숨어 있는 나의 무지는 무얼까. 분명 안전하고 편리하기 때문에 숨겨져 있는 것일 텐데...


 조금 우회해 보기로 한다. 내가 일평생 괴로워한 어떤 문제, 사실 현실 사람들에게는 도무지 꺼낼 수 없었던 문제 상황이 있다. 그건 바로 '너가 자극했기 때문에 그런 일을 당했다'는, 소위 2차 가해에 대한 이야기다. 이게 지금은 미투 문화(?)를 거쳐 대중화되어 언론도 그렇고 일반인들도 그렇고 스스럼없이 꺼낼 수 있게 된 표현이지만, 꽤나 오랜 전통을 갖고 있는 인류의 투사 습관 중 하나다. 나는 이 2차 가해로 불리는 걸 정말 까다롭게 느끼며 살았다. 왜냐하면 이건 당사자에게 절대 발설할 수는 없으나, 당사자가 피해자라면 그가 누리는 '피해 이익'이라는 기만을 들추는 가면 벗기기가 되기 때문이다. 또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걸 절대, 결단코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이건 영원히 알리바이의 문제로, 징후의 문제로, 마치 연기처럼 순간 보이지만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레 흩어져 형체가 사라질 무언가로 남겨두길 바라는 마음의 집합이다.


 '2차 가해'라는 사회적 용어와는 별개로, 나는 이전부터 이 기만적인 현상을 계속 탐구했었다. 범죄학, 연인 관계, 각종 소설 속 갈등 구조 등등에서 이런 요소를 발견하기란 무척 쉽다. 2차 가해는 너무 뜨거운 감자라 사람들의 눈깔이 충혈되므로 융의 용어를 빌리는 게 적절하다. 융은 이를 '투사의 낚싯바늘'이라고 부른다. 개인적으로는 이를 좀 더 다듬어서 표현할 어휘가 없는지 찾고 싶다. 물리 용어가 그나마 근접하게 느껴지지만, 이런 희미한 영향의 핑퐁을 이해 쉽게 표현할 어휘에 대해 아는 바는 없다. 그나마 작용-반작용?... 여튼 이를 쉽게 풀면, 어떤 사람이 누군가에게 투사를 한다는 건, 곧 상대가 투사할 '거리'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투사를 하는 사람은 결코 아무한테나 투사하는 게 아니요, 투사를 당하는 사람 또한 '다른 투사가 아닌 바로 이 투사'를 당하게 스스로로 유인하는 것이다. 이 연속성이 과격하게 표현되는 걸 즐기는 이들이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에 강한 매력을 느낀다. 그들은 이 안에서 '귀책 사유'를 따져묻는, 법의 시선을 은밀히 숨기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물론 실제 현실에서 그런 인간들이 많아도 너무 많다는 건 진실이다.


 이 투사는 당연히 일반적인 인간 관계에서 벌어지는 각종 감정, 사상, 신경증뿐 아니라 성욕, 종교적 교리, 환상 등등도 활용된다. 예를 들어 이슬람 남자들은 여자의 신체 노출에 엄청난 열등감을 갖고 있기 때문에 여자들이 조금이라도 피부를 노출시키면 자신들의 성욕이 건드려지는 걸 '이 여자가 자극했다'는 식으로 투사해서 잔인한 일도 아무렇지 않게 자행한 뒤 여자 탓으로 돌리지 않는가. 이건 단순히 문화의 차이, 종교적 교리의 차이에서 비롯된다기 보다 인간의 기본 심리를 기반으로 쌓아 올린 고착화된 투사 처리 방법에 가깝다. 이런 현상은 어떤 문화권이든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건 퇴행과 발달의 과정 문제에 가깝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실은, 투사를 자행하는 자의 정신 상태에 문제가 있다는 걸로 퉁쳐져서는 안 된다. 또 투사를 자극하는 당사자의 정신 상태에도 그렇다. 인간의 정신은 이렇게 내외로 오고가는 어떤 '이미지'라는 낚싯바늘에 걸리고 낚는 현상이 기본적이라는 걸 진실로 삼는 게 그나마 객관적으로 보인다.


 이때 이런 시선은 당연 인간중심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시선이다. 즉, 인간을 생략하는 시선이다. 다시 말해 주체적인 현실로부터 초연해 있다. 이 문제가 풀어내기 어려운 갈등 상황을 자아낸다. 나는 이런 낚싯바늘에 무척이나 민감한 사람이다. 상대는 분명 무언가를 비언어적으로 흘려놓고, 그거에 자극이 건드려져 그걸 의식화-언어화하면 오롯이 나만 문제가 된다. 왜냐하면 상대는 자신의 비언어적인 낚싯바늘을 의식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때 내가 대화를 통해 이를 의식하게 만드는 건, 상대의 입장에서 무척이나 과도한 피로를 유발한다. 그는 자신이 여태 아무 문제 없었던 자신의 의식에 구멍을 내야 하고, 의심을 해야 하고, 끝내는 자신의 책임으로 가져가야 한다. 왜냐하면 본인에게는 스스로 그럴 마음이 1도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짓거리가 얼마나 과도한 정신 노동을 필요로 하는지를, 정말 뼈저리게 느끼며 살았다.


 나는 이런 식의 투사 핑퐁이 무척 불필요한, 쓸데없는, 관계에 있어 무척 열등한 요인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관계 초반에 이런 것들을 잘 확인하고, 교정하는 작업이 필수적이라고 여겼다. 당연히 이런 노력이 제대로 인정받거나 또 가치 있게 여겨지는 건 겪을 수 없다. 대부분의 사람은 이런 일을 그저 '나와 맞지 않다'라는 식으로 에고 중심으로 치워버리기 일쑤기 때문이다. 연애는 편해야 하는데 왜 너랑만은 이렇게 싸우게 될까라고 한숨쉬며 지친 상태를 내보이는 게 연애 드라마의 단골 소재다. 내 눈에는 그런 남녀는 모두 열등한, 발달이 덜 된, 애송이 같은 인격으로만 보인다. 노력을 해 본 적 없는 유아의 투정처럼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나도 결국 확신을 갖기 힘들다. 이런 사적 전망은 결국 누군가의 동의나 공감에 의해 인정되고 또 힘을 얻는 것이기 때문이다. 애초에 내가 이런 마음을 갖는 건 오직 관계라는 조건 하에서였기에, 그러니까 관계라는 게 무엇인지 나는 이미 분명한 정체를 갖고 있기 때문에 겪는 일일 뿐이었다.


 사실 내가 여태 읽고 추적한 수천 권의 책들의 거대한 줄기 하나는 이런 '관계성'에의 정체를 더욱 세밀히 밝히는 데 활용된 것도 있다. 이성적으로 훌륭한 업적을 남긴 이들은 대체로 관계에 대해 얻어갈 게 별로 없다. 그들은 현실 삶에서 관계에 대해 그다지 인격적으로 훌륭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도 '초연'한 상태라면 얼마든지 훌륭한 체 할 수 있기에, 그런 부분에서의 통찰은 얻어갈 수 있다. 그 예가 울리히 벡이나 기든스 같은 사회학자다. 그들은 사회를 향해 통찰력 있는 식견의 도움을 주기는 하지만, '사랑'이나 '관계'에 대해서는 그저 일반인보다 조금 나은, 그러나 역시 그 방향성 만큼은 여전히 어리숙해서 사실 도움이 되지 않는 그런 면모를 내보이고 있다. 그들도 여하간 그런 문제의식을 적극적으로 다루고자 심지어 책까지 쓰곤 했지만, 역시 '당사자성'은 보이지 않는 책일 뿐이다. 사적 관계에 한한 문제는 반드시 자기가 직접 그런 사람일 수 있어야만 진정성을 내보일 수 있다. 그렇지 않고, 혹은 그런 중차대한 과정을 노력 없이 생략시킨 채 그럴듯한 어휘로 포장하며 타인에게 영향을 행사하려는 이들은 사기꾼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열등한 인격을 과도하게 부풀린 나머지 결국 시간이 흘러 알아서 제 발에 걸려 넘어질 수밖에 없다.


 이 문제가 더 이상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고, 이렇게 일반화할 수 있도록 도움과 용기를 주는 건 최근에 있어 융 덕분이다. 이전에는 니클라스 루만이나 여러 정신의학자들 덕분에 점차 일반화할 수 있게 되는, 소위 '큰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는 도움을 받았지만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 필요했으나 그걸 융이 제공해줬다. 점차 쌓인 이런 세상에 대한 이해 덕분에 이제는 나의 믿음이 덜 흔들리게 되었다. 특히 사적 관계에 있어서 여전히 비일비재하게 벌어지는 갈등의 팔할은 투사의 낚싯바늘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이 투사하고 싶은 걸, 상대가 투사하기 좋게 만들었다는 그 이유로 자신의 투사를 덤탱이 씌운다. 반대로 자신의 의도와는 별개로 상대가 자신에게 투사를 덧씌우기 쉽게 스스로가 언행한다는 걸, 억울해 하면서 상대를 원망하고 증오한다. 이 문제를 풀기 위해 상투적으로 '서로의 입장을 헤아려보라고', 그저 뻔하디 뻔한 말로 종용하는 게 상담이라는 이름으로 벌어지는 처방전이기도 하다. 하지만 높은 확률로 그 말을 내뱉은 상담가도 그 말의 진실된 무게를 감당할 자격이 없을 것이다. 자신이 할 수 없는 걸 남에게 하라고 말할 수 있는 뻔뻔함도, 이 투사 굴레가 있기에 가능하다.


 융은 이에 대해 흔들림없이 늘 '다른 사람에게 무언가를 하라고 말하지 말고 자신의 그림자를 봐야 합니다'라고 한다. 하지만 나는 이런 주장을 따라할 수가 없다. 애초에 자신의 그림자를 보는 것조차 모두에게 권할 만큼, 인간의 다양성은 획일적이지 않다. 자신의 그림자를 볼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더욱이, 아무런 요청도 없이 스스로 자행해서 자신의 그림자를 보려고 하는 이도 희박하다. 이게 현실이라고 할 때, 나는 어떤 '일반화된 태도'를 가질 수 있을까. 어쩌면 이 일반화를 과감히 포기해야 하는 게 맞다는 걸 알면서도 붙들고 있는 걸 수도 있다.


 분명 나의 정신은 이미 어떤 길로 가야 하는지를 알려주고 있다. 20대 초중반부터 나는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사람을 늘 '살아있는 생명체'로 여기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정말 정신이 늘 타들어가는, 늘 쇠약해질 수밖에 없는 과도한 소진을 겪어야만 했다. 그 과도함의 반작용일까? 이제는 더 이상 살아있다고 여기지 않는 거 같다. 왜냐하면 실제 현실의 사람을 만났을 때 나는 그들을 위해 버릇처럼 나의 노력을 과감히 쏟아붓기 때문이다. 그런 나의 모습을 인정하고 받아들였기에, 나의 그림자를 이제는 편리하게 마구 투영시키는 게 아닐까. 내가 일반인을 혐오하고, 또 가치박탈을 일삼는 건 모두 실제 내가 만나는 사람이 아닐 때다. 만약 그런 사람이 나와 관계를 맺게 된다면, 그게 아무리 일회적인 관계라고 하더라도 나는 또 버릇처럼 관계에의 노력을 가동시켜 최대한 그를 받아들이려고 무진장 애를 쓰게 된다. 이런 양면성을 이제는 통합해야 하는 숙제를 껴안고 있다. 나는 나의 그림자를 받아들임으로써, 현실 관계에서도, 상상 관계에서도 늘 일관성 있는 태도로 사람을 대하고 싶어 한다.


 그런 면모가 무척 인격이 발달한 상태일 거라고 기대하는 마음이, 아주 조금 있다. 이에 대해서는 나름 솔직함을 느끼는데, 나는 누구한테서나 훌륭한 사람이고 싶은 게 아니라 나의 갈등을 최소화하고 싶은 것이고, 또 그런 상태에 도달한다는 게 어떤 상태인지를 상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융의 생각과 일치하기 때문에 힘을 얻는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고상한 인격이나 훌륭한 현자 따위의 사람에 대한 환상과 낭만이 나에겐 없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에게 투사되는 면모가 나의 그림자로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노력'을 그렇게까지 하려는 사람을 보면 나는 늘 안쓰러움과 피로도를 느낀다. 종교도 없는 내가 예수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신성함보다도 안쓰러움과 고독함, 저들의 무수한 투사를 받아내기 위해 저렇게 만들어져야 했을 환상이 얼마나 괴로울까를 먼저 떠올리는 이유다. 인간 집단은 자신들의 투사를 위해서라면 주인공을 더욱 주인공답게 만드는 데 어떠한 죄의식도 느끼지 않는다. 그래야만 비로소 마법적 힘이 발휘되어, 정말 유의미해지는 게 진실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이 타인의 '정신'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게 진실임에도 불구하고, 또 그게 애초에 불가능함에도 불구하고 그런 노력을 해야 하는 이유가 뭘까.


 나는 이 부분에서 과감히 의심을 포기해야 하는 어떤 자연의 진화 상태를 느낀다.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나는 고통을 최소화하기 위해 그런 방향으로 움직인다. 그러나 어떤 이에게는 그런 방향의 노력이 그다지 경제적이지 않다. 또 이는 역설적이기도 하다. 나는 고통을 줄인답시고 더 고통에 몸을 맡기는 격이다. 한 인간이 왜 이딴 식으로 삶을 살게 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으면 그런 삶에의 다른 선택지가 생길까? 내가 배운 자연을 통해서는, 그런 의문은 무의미하다는 것이었다. 자연은 애초에 삶에의 비교 따위는 두질 않는다. 오직 인간만이 그런 비교를 통해 자신의 삶이 더 '나은 삶'이 되도록 매달린다. 지금 내가 겪고 있는 갈등의 무지는 아마 나의 그림자를 안전하게 만드려는 어떤 생략된 것 때문이다. 나는 이게 완전한 무지는 아님을 안다. 내가 들여다보려고 하면, 매우 깊은 정신 안에서 끄집어 올려 전면화시킬 수 있음에도 여전히 머뭇거리고 이 편리함을 더 취하고 싶다는 걸 안다. 내가 진실로 그림자를 받아들이고 싶다면, 나는 이제 방황이라는 이름의 편리함을 그만두어야 한다. 이에 대한, 소위 '동기 부여'는 어디서 비롯될까? 내 정신에 맞는 동기 부여는 언제나 늘 그랬듯 일체감이다. 도박으로 모든 걸 걸어야 하는, 그런 올인이어야만 나는 움직인다. 그렇지 않으면 숱한 인간들처럼 살게 될 수밖에 없다. 그런 인간들이 숨을 쉬고 자신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만든 이 문명의 비밀을, 이해를 넘어 체험으로 가져가야 하는 순간인 것이다. 인식의 재료는 충분할 텐데, 어째서 나는 머뭇거릴까. 남들 다른 거 하는 대신 이렇게나 인식 확장을 위해 갖은 재료를 수집해 놓고, 왜 아직도 머뭇거릴까. 내 성향에 비추어 보면, 그건 결국 나의 나약함 때문인 거 같다. 타인의 힘을 기다리는, 그런 나약함. 그래도 이런 나약함을 긍정한다. 안 그러면 정말로 매달리게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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