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업 노트 5
24.03.28
… 기 드보르의 유명한 주장처럼, “인간은 자기 조상들을 닮는 것보다 자기 시대를 더욱 닮는다.” 그리고 오늘날 남녀는 그들 부모와는 다르게 “과거를 잊고 싶어 하며 이제 미래도 믿지 않는 듯한” 현재를 살고 있다. P. 259
- 액체현대, 지그문트 바우만, 필로소픽
'자기 시대를 닮는다'는 것은 우리에게 가능한 서술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현상이나 행위를 논리적으로 설명해주지는 못한다. '시대'는 '사회', '국가', '문화'와 같이 거대하고 추상적인 개념으로 읽히기도 하며, 나아가 '거시적인 시선'으로 인해 특정 개별화된 '미시적인 시선'과 필요충분 조건을 만드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돌려 말해 우리 스스로로 하여금 시대에 대한 시선과 관점을 갖는 데 가장 큰 걸림돌 중 하나는 관찰 대상과 관찰 방법 간 맞지 않는 '느낌'에 있다. 여기서의 판단이 왜 논리적 그럴듯함을 가리키는 오류에 있질 않고, 감각적 즉시성을 가리키는 느낌에 있는지는 중요하다. 그건 우리에게 인식 활동의 과정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논리화란 엄격한 의미에서 자기 결정의 완전성을 구축한 구조로, 해당 구조는 불완전성을 전제로 하지 않고는 구축되지 않는다. 이때 불완전성을 발생시키는 건 서로 다른 관찰 대상 간 관찰 방법의 대응 및 충돌이다. 쉽게 말해 '느낌'이란 통용되는 말처럼 다수가 낌새로 파악할 수는 있으나 언어로 붙들기엔 미끄러운 무엇, 그러나 논리화가 진척되기에 가능성이 높은 무엇, 반대로 언어가 구축될 수 있는 PlaceHolder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왜 만들어지는가라는 물음은 인과로 포착될 수 없고 재귀로만 포착 가능하다. 반대로, 자신이 무얼 하고 싶고 하고자 하는가는 재귀로 포착되지 않고 인과로 포착되기 쉽다. 루만의 2차 등급 관찰을 인용해보자.
... 여기서 다시 관찰자 그리고 관찰의 관찰이라는 2차 등급 관찰이라는 문제에 직면한다. 더 선진적이고, 더 후진적인 관찰자, 더 문명화되고, 더 야만적인 관찰자는 없다. 관찰의 관찰인 2차 등급 관찰이 우연성을 함께 고려하고 결과적으로 우연성을 개념적으로 반성할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더 비판적인 관찰자, 진정한 관찰자는 더더욱 없다. 관찰자의 관찰자는 ‘더 나은’ 관찰자가 아니라, 다르게도 볼 수 있는, 다르게도 구별할 수 있는 관찰자다… 관찰자는 차이를 만든다. 차이 그리고 차이들 간의 연관을 통해서 행위는 우연해지며, 복잡성을 구축하기 때문에, 행위는 관찰자의 관찰에 따른다. 행위를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관찰을 통해 행위가 된다. P. 209
… 이렇게 관찰자는 계속해서 차이를 만드는 차이를 작동시킨다. 관찰은 자신의 가능성의 조건에 자신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 그렇게 자기면제와 자기예외가 허락될 수 없다는 것을 자기포함적으로 성찰한다. 사회학적인 비판은 이처럼 자신의 구별에 따라 산출되는 차이의 통일성을 성찰할 수 있는 자기기술이다. 비판은 ‘관찰의 관찰’일 따름이며, 그렇게 관찰된 것을 기술하는 기술이다. P. 210
- 근대의 관찰들, 니클라스 루만
이 이야기는 시대를 관찰하는 자기 자신을 관찰하는 행위가 어떻게 해서 '자기 시대를 닮아간다'는 말로 표현될 수 있는지의 어휘를 제공해준다. '행위를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관찰을 통해 행위가 된다'는 말은 우리가 무엇을 보고, 읽고, 듣는지에 따라 우리 스스로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말이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보고, 읽고, 듣는지에 따라 '그' 무엇이 '어떤' 무엇으로 나타나는지 또한 의미한다. 이를 당사자로서 적용시키면 다음과 같다.
불안에 힘입어 자기 스스로를 교정하고 내재적 변화 - 특히 '뇌'의 역량 강화 - 를 도모할 수 있을 거란 '자기개발서'의 1차적 영향은 고1 때 들어왔다. 한 개인에게 있어 이런 재료가 수용되고 나아가 행위 변화에까지 영향을 미치려면, 이전까지 누적되어야 할 '개인성'이 있어야 한다. 대개 이런 개인성은 처음부터 있는 게 아니라 주변 환경으로부터 꽂히는 시선으로 포착되어 모양난다. '공부를 해라', '좋은 대학에 가라', '성적을 내라' 따위의 말들은 어떤 제도적 보완이나 사회적 안전망으로 유도되는 게 아니라 오직 '네 힘으로 얻어야 한다'는 방식으로 요구된다. 이 코드는 사회 전방위적으로 만연해 있어서,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 책임이라는 뿌리 위로 스스로의 역량 강화, 개발, 정체화에 대한 압박(반대로 이게 옳다는 '느낌')을 느끼게 한다. 개인 입장에서 이런 요구들에 대한 혁명은 불가능하다. 안전한 쪽은 그런 요구들에 부응해 말그대로 '그런 사람'이 되는 방향이고, 혁명은 저항이라는 낭만성 없이는 지속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모두가 느끼겠지만 낭만성은 끊임없는 불쏘시개 없이는 결코 영원히 타오를 수 없어서 주변 환경에서 끊임없이 발화재를 공급받아야만 한다.
이 흐름은 20대 중반이었던 13년도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된다. 대학에서 이수한 과목은 크게 두 부류였다. 하나는 철학과 시론, 미학이라는 이름으로 그려내는 시대적 계보, 다른 하나는 제작-창작에 힘을 쏟는 작업. 그리고 이런 행위들을 수행하기 위한 정체성 작업이 동반되었다. 행위에의 동력을 정체성 작업에서 길어올리고, 행위를 통한 표현으로 다시금 정체성 작업의 재료로 만들었다. 지금에서야 말할 수 있지만, 지금으로부터 11년 전인 당시의 '나'는 쉽게 말해 자연발생한 것이 아닌 동시대의 영향으로부터 유발된 '있을 법한' 구조 중 하나였다. 하루에 3시간씩 자면서 공부와 작업을 병행하는 삶과 더불어 주말마다 철학 모임을 운영하고 평일에는 문학 모임을 운영하는, 말그대로 '정신없이 바쁘게 스스로를 몰아치는' 모양새는 전형적인 '자기개발'이 권고하는 '기업가적 자아'다. 이걸 지탱한 핵심은 '진정성'으로 표현되는 '진정으로 하고 싶은' 걸 느끼는 '자아 구축'이었다.
포스트모던이라는 이름 하에 여러 '위기들'을 접하면서, 동시에 철학과 문학에서 진정성을 접한 나는 쉽게 말해 대가리가 발기된 사람이었다. 여러 비판들은 시대에의 불화를 자극하는 발화재였고, 이를 토대로 주변 환경을 '어떤 환경'으로 발견했다. 한 개인의 정신에서 벌어지는 이 형국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혼란이다. 이 혼란은 놀랍게도 망망대해에서 폭풍을 만난 조각배가 아니요, 각종 포격이 쏟아지는 전쟁 한복판이 아니다. 굳이 비유를 들면 알렉시예비치가 소명 의식을 갖고서 전달한 [체르노빌의 목소리]처럼,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은 거 같은데 천천히 죽어가는 '소리없는 전쟁'이다. 즉, '관찰되지 않는' 적으로부터 결정 구조가 무너지는 일이다. 이게 정신에서 벌어진다는 건 소위 '실존적 지평'에서 벌어진다는 의미와 같다. 무너지는 결정 구조는 다름 아닌 '정체성'이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욱 무너져서는 안 되는 정체성이다. 붙들 수 있는 유일한 조각배이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에서 내용을 지우고 관찰하기 쉬운 내 또래 친구들의 내용으로 넣는다고 해도 크게 이상하지 않다는 게 바로 '동시대인'이라는 증거다. 기업이 요구하는 스펙에 맞춰 스스로를 채근해 각종 이력을 얻어내고, 몇 대 몇이라는 경쟁을 뚫어 직장을 얻은 뒤 다른 기업의 근로자 몸값-연봉과의 '상시 비교'를 느끼며 승진과 이직을 고려하고, 당대 분위기에 맞춰 파트너, 배우자, 애인을 선별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양육과 동시에 이 아이가 어떤 '개인'이 되고자 하는지의 고민을 하는, 미래에의 예측과 대비를 하는 삶으로 본다 해도 형식은 크게 다르지 않다. 개인 입장에서 개인성이 과도해진 오늘날, 자기 삶에의 '진정으로 하고 싶은' 걸 끊임없이 충족하고자 하는 마음과 함께 사회적 적응, 가정 구축을 병행하기 위해 섬세한 조율과 적응을 한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혼란에 대처하는 태도에 있다. 오늘날 사회는 자신이 느끼는 미래에의 불안, 불확실성, 위험, 안전 미보장에 대해 본인 스스로 대처하고 대비하고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에 마련된 각종 제도 장치와 서비스, 상품, 권고하는 소비로 보완해야 한다. 때로는 이 혼란을 진정시키고자 심리 상담을 받을 수도 있고, 유행하는 뇌과학적 접근을 수용할 수도 있고, 돈으로 마취시킬 수도 있다. 대다수 사람들이 대한민국은 돈에 미친 나라라고 아무리 냉소적으로 말해도, 사실 할 줄 아는 건 별로 없다는 방증이다. 오히려 뒤집어 생각해야 한다. 우리가 그만큼 막대한 압박을 받고 있다는 것, '돈'으로 쏠릴 만큼 다른 대응에의 에너지가 분산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 문제들이 너무 방대하고 다양해서 바우만 말마따나 "우리는 거듭거듭 엄청나게 단순해지기를" 꿈꾸고 있다는 것.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오직 한두 가지만 나타나는 건, 그 문제가 그만큼 복잡하다는 것이다. 문제 해결에도 교묘한 낭만성이 접착되어 있는데, 효율이라는 이름으로 어떤 문제든 간결하고 단순하게 해결할 때 가장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게 바로 그것이다. 이 정신의 선두 주자들이 현재는 엔지니어, 개발자들이다. 그들이 양산될 수 있는 건 그렇게 오래된 일이 아니지만, 만들어진 정신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잘 작동되고 지속될 수 있는 시대 안에서는 일단 '좋아'보이는 게 자연스럽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게 수월해지진 않는다. 단순함을 추구한다는 건 그만큼 복잡함에 취약하다는 걸 의미할 뿐이다. 우리가 한 사회에서 적응해 살아나가기 위해 맞닥뜨려야 할 온갖 문제 상황들이 서로 꿰어지지 않고 증식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 복잡도가 증가하기만 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 당연히 과부하에 따른 처치 곤란을 느끼기 마련이다. 하나하나 대응하기도 전에 또 다른 문제가 나타나고, 문제도 너무 상이해서 일관적인 태도를 유지할 수 없다. 여러 비판들 속에 담긴 위기에의 경고, 종말에의 경각심 등은 사실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거 같다. 우리 인간의 비판 정신이 소위 짜쳐져서 문제라는 둥, 더 이상 역사 따위는 거들떠도 보지 않는 집단 정신병에 걸려 있다는 둥, 긴 글과 호흡으로 언어를 다루는 정신의 퇴화로 말미암아 이성 자체가 퇴보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는 있지만, 그 이면에 담긴 어떤 두려움과 공포, 불안을 말하고 싶었던 거 같다.
그건 바로 우리가 '적응에 실패할 거란' 두려움이다. 무엇에의 적응 실패인지 진단하기 위한 여러 시도들이 있지만, 그래서 어떻게 적응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난색을 표한다. 한편으로는 관찰의 관찰을 통해 '적응 실패' 자체가 적응이라고 보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다. 아마 이 부분에 대해서는 대부분 부정적인 반응을 보일 텐데, 아직 시대적 분위기로 보면 적응을 하냐 마냐가 중요하게 포착될 뿐, 적응을 어떻게 대하는지의 적응은 주류가 아니기 때문이다. 앞서 루만을 인용했던 건, 그리고 여러 사회학자들, 철학자들이 제공하는 각종 개념들로 말미암아 우리가 잡을 조타의 청사진은 내가 느끼기로 우리 정신이 진실로 더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마 이에 대해서는 '계몽주의'나 인간 교육이라는, 슬로터다이크식 표현대로라면 '인간 길들이기'를 추구하는 것이 아닌지 의심어린 눈을 던질 수도 있겠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미분방정식을 덧셈뺄셈으로만 풀 수 없듯이, 보다 복잡한 문제가 어떤 차원에서 나타나는지를 포착해야만 대응할 수 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정식화된 접근 방법이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제공될 때 사람들에게 통념으로 자리된다. 마련되지 않은 어휘를 붙들고 사회적으로 안정화된 언어가 되기 위해선 그만큼 무수한 피드백 과정이 요구된다. 지금 시대가 과도기라고 단언할 수 있는 건, 이 피드백 과정이 가열차게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일상을 보내면서 어떤 무기력, 어떤 포기, 어떤 무의미를 하나하나 마주하고 느끼고 있다는 건 당사자 입장에서 혼란이요, 불안이요, 절망이다. 거시적 관점으로 보면 이는 하나의 과정에 불과하다. 이 둘을 서로 넘나들려면 재귀적으로 보면서도 인과적으로도 볼 수 있어야 한다.
또한 한 개인의 정신으로는 소모가 가속된다. 실패를 끊임없이 마주한다는 것, 충돌로 인한 불가능을 끊임없이 마주한다는 것, 대처할 수 없는 무기력을 끊임없이 마주한다는 건 소위 우울증, 정신분열, 인격 장애로 모양난다. 이것은 마뚜라나-바렐라 선생들이 말하듯 한 인지 구조의 지극히 자연스러운 반응인데, 당사자 입장에서 보면 참으로 비극이 아닐 수 없다. 거리를 두고 보면 마치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것처럼 보이는 것이, '나의 일'이 되면 참으로 극복하기 어려운 좆같은 불행으로 삶을 지배하는 것이다. 이 구도가 우리에게 도착하는 방법 중 하나는 바로 '스크린 정보-이미지'다. 대중이라는 이름, 글로벌이라는 이름으로 나와 상관없어 '보이는' 무언가로 도착하는 이 방식이 우리 정신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알아보는 건 기존의 방법으로는 먹히질 않는다. 개인성과 성찰성이 강화되었다는 시대 진단은 기든스나 울리히 벡이나 리처드 세넷이나 크리스토퍼 라쉬나 루만이나 바우만이나 레크비츠나 거진 동의하는 내용일 것이다. 즉, '보인다'. 이 관찰이 보이는 것으로 여겨지기 위해선 개인의 입장에서 세계를 어떻게 '관찰'하는지의 태도가 필요한데, 기존의 방법이라 함은 기존까지 축적된 여러 포착 방법의 채널로써 소위 '차이에 기반한 고정'이라 표현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대중 매체에서 벌어지는 온갖 반응들로 말미암아 볼 수 있는 관찰을 보면, 1차적으로는 자신과의 차이로 보는 관찰이 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와 '나였으면'이라는 식으로 즉각 반응하는 건 바우만 말마따나 '사적 영역'의 과도함으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또 세넷과 짐멜처럼 '도시화로 인한 익명에의 알러지 반응'으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타인과의 만남을 어떤 조건에서 체험했느냐의 기본 토대가 변했음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조건으로 대응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우리는 사람을 마주했을 때 이 사람을 마주하는 방식을 변혁시킬 만한 패러다임 전환을 겪은 적이 없다. 21세기 디지털 환경은 마주침의 조건 자체가 기존의 물리적이고도 소위 '신체적인' 조건이 아니다. 이 조건의 어긋남이 1차적으로는 '도시'라는 공간에서의 '익명'으로, 2차적으로는 '대중'으로 포착이 시도되었지만 관찰 방식은 언제나 그랬듯 일관성을 조건으로 고정시킬 내밀한 인격을 전제로 한 방식이었다. 이 방식이 아니라면 우리는 자기 자신을 대입해 즉각 반응을 할 필요가 없다. 자기 의견을 표출할 필요도 없고, 보여지는 것에 한한 해석과 입장을 표현할 필요도 없다. 이 구조는 마뚜라나-바렐라 선생들이 알려주는 재귀적 피드백 과정이지만, 이 재귀성을 포착하기 위한 전제 조건으로 덧붙여지는 '자기 생략' 없이는 맹점으로 남아 있다.
자기 자신을, 혹은 자기 정신을 기준으로 삼았을 때 비로소 '차이에 기반한 고정'이 가능하다. 여기서 말하는 '자기'는 에고에만 한정되어 있지 않다. 자신이 정신 안에서 길어올릴 수 있는 온갖 언어, 비언어 모든 걸 포함한다. 즉, 인지다. 이 행위는 생물로서의 인간을 조건짓는데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여겨진다. 우리는 인지를 하기 때문에 인지를 한다. 반대로, 인지로 인해 인지를 할 수 있다. 오늘날의 시대, 사회에 만연한 '문제 상황'은 우리로 하여금 정신 업데이트를 자극하는 데 무척 적극적이다. 한꺼풀 벗기면, 우리가 그렇게 하길 원하고 바라는 상태가 되었기 때문에 더 진행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지금 이 '단계'에 도착한 것이다.
여기에 바우만이 말하는 '액화'로 시대를 포착하는 건 학습 기초를 위해 용이하다. 21세기 대도시에 사는 어떤 누구든, 이 사회에 적응하며 살아가기 위해, 아니 반대로다 적응하지 않을 수 없게, 살아가지 않을 수 없게 도착하는 요구에의 반작용으로 우리는 '하나'로 보기 이전에 다 포착할 수 없는 무수한 것들이 뒤섞인 혼합물을 마주하고 있다. 즉 우리는 대상을 보기 보다 플루서 말마따나 보다 추상화된 접근으로 이제는 '그릇'을 보는 데 적합해지고 있다. 혼합물을 온전히 포착할 수 없을 때, 우리는 그 혼합물이 어떻게 담겨 있는지를 봄으로써 다룰려고 하기 때문이다.
… 애초에 현대인의 마음을 가장 크게 사로잡은 것은 제련의 기술보다는(겉보기에는 고체 구조물들이 버티는 힘이 부족해서 녹는 것처럼 보였다), 용해된 금속이 쏟아져 흘러들 그 주형틀들의 디자인과 용해물을 틀 안에 가두는 기술이었다. 현대인들은 완벽을 추구했다. 이들이 도달하고자 한 완벽 상태라는 것은, 모든 변화란 그저 악화일로일 뿐이므로 결국 중압감과 고된 노동이 끝난 상태를 의미했다… 변화는, 낡고 녹슬고 군데군데 썩어서 산산이 분해되어 분열적으로 번식하는, 그렇지 않으면 믿을 수 없는, 열등한 구조, 골조, 방식들에서 벗어나서, 주문자 맞춤형, 완벽하므로 최종적인 대체물들—방풍에 방수는 물론, 역사도 차단하는—로 이행하는 시기에만 국한된, 일종의 없어서는 안 될 생필품처럼 간주됐다… 그 전망은 질서 혹은 ‘자기 평형 시스템’에 대한 전망이다… 철저하고 번복 불가능한 ‘확률 왜곡’(몇몇 사건들이 일어날 개연성을 극대화하고 다른 사건들의 개연성은 최소화하는)이 빚어내는 질서. P. 19
… 액체 현대 조건들 속에서 사는 일은 지뢰밭을 걷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폭발이 언제 어디서라도 일어날 수 있음을 모두가 알지만 구체적으로 그게 언제 어디서 터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지구화된 이 세계에서 그 조건은 보편적이다. P. 25
- 액체현대, 지그문트 바우만, 필로소픽
바우만이 말하는 폭발은 개인의 정신 입장에서 벌어지는 실망, 좌절, 절망, 무기력, 우울, 자살 충동, 폭력성, 잔인함 등등과 조우하기 쉽다. 이들은 오늘날 지극히 '심리적인 것'으로 다뤄지기 일쑤인데, 그 역사는 인류 문명에 있어 단 한 번도 그렇게 다뤄지지 않은 적 없을 만큼 뿌리 깊다. 오늘날의 어휘로써 '심리학'일 뿐이다. 또한 테러, 참사, 재난재해, 전쟁, 미사일 도발 등 공동체 단위의 폭발과 더불어 사적 단위에서 벌어지는 신체 폭력, 스토킹, 협박, 강간, 성폭력, 살인 등등도 한 개인의 심리적 측면과 함께 다루고 포착하려는 움직임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이러한 폭발들이 '개인성-성찰성'과 결부되지 않을 수 없다는 걸 느낀다. 거부되는 어떤 현상과 행위를 포착하기 위해 '어떤 정신'인지를 관찰하려는 이 움직임은 우리로 하여금 어떤 버릇을 만드는데, 그것은 더욱 사람을 파악하는 데 있어 있을지도 모를 '지뢰'같은 정신 결함, 혹은 경직되어 있는 무엇이다. 이것이 오늘날 만연하다는 건 반대로, 그런 것들을 '자기 자신'에서 발견하기도 쉽다는 걸 성공적으로 보여준 게 정신분석의 신호탄이었다. 이런 방식으로 한 번 피드백이 자극되고 나면 우리는 점점 다음 단계에 맞닥뜨리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정신이라는 그 자체를 가리키는 그릇에의 관찰이다.
… 그릇은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이 달아나지 않도록 잘 밀봉되어야 한다. P. 183 - 심리학과 연금술. 융
… 무의식에 쏟아진 주의는 작업의 초기 단계에 약한 불이 필요할 때 ‘배양’의 효과를 발휘한다. 그래서 흡수나 순화, 용해, 추출 같은 표현이 자주 쓰인다. 마치 주의가 무의식을 덥히면서 활성화시키고, 그렇게 함으로써 무의식을 의식과 분리시키고 있는 장벽을 허무는 것처럼 보인다. p. 194 - 융합의 신비, 융
융이 제안하는 건 지극히 '사적'인 것들이다. 그러나 개인이 모여 사회가 되고 사회가 모여 시대가 되는 것으로 연속성을 그린다면, 복잡도와 차원의 중첩 발생 또한 그릴 수 있다면 이것은 철저히 자폐적인 사적 영역이 아닌 '아트만' 개념의 21세기 버전이 된다. 즉 이 접근은 현 상황의 문제를 '연결'에의 오작동으로 보게 만든다. 우리 인간의 정신은 고립 지향적이지 않다. 사람들이 돈에 환장하게 되는 것은 현실과의 관계 속에서 적응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돈에게만 접촉하겠다는 것으로, 그러니까 철저히 외면하고 차단하는 게 아닌 어떻게든 연결하고자 하는 몸부림으로써 어쨌든 돈을 붙들고 있다는 것으로 보게 만든다. 그것이 가상 현실이 됐든, 온갖 욕구 대리 충족인 게임, 포르노그라피, 콘텐츠라 불리는 각종 세계관, 드라마, 만화, 영화가 됐든 세계와의 연결을 도모하는 몸부림으로 보게 만든다. 한편에서는 비릴리오 말마따나 '사람들이 사실에 대한 갈망을 더욱 크게 느끼고 있다'고 진단할 수 있다. 오늘날 사람들은 '사실'에게 서비스를 요구하듯 '더 주세요'라고 몸을 기울인다고 말이다. 그래서 더욱 사실적인 것, 실제적인 것, 자극적인 것으로의 중독을 설명할 수도 있다. 이것을 도파민이라는 신경 작용으로 길들여진 뇌의 구조로 설명할 수도 있다. 하지만, 눈치 채겠는가, 이 모든 게 정신이라는 그릇을 다루고 있다는 걸.
연결에의 과도한 자극은 먼저 정보 범람이라는 이름으로, 매스 미디어라는 이름으로 다뤄졌다. 우리 인간은 사실 그렇게 모든 걸 감당하고 처리할 수 있질 않다. 반대로, 그런 꿈을 꿨기 때문에 기계를 만들어낼 수 있었고, 그에 따른 피드백으로 우리 또한 그렇게 해내야 한다는 현실을 마주했다. 이는 정신이라는 그릇 안에서 벌어진 혼합 작용이다. 이 혼합은 융이 연금술 행위로 빗대어 설명해주듯, 외부 조건, 자극, 관찰되지 않으나 상태 변화에 어떤 화학 작용을 불러일으킬 요소 따위에 민감하고 취약하다. 즉, 우리가 스스로를 파악하는 데 있어 이런 변화무쌍한, 변덕스러운, 자기 자신을 고정시킬 수 없는 데 난처함과 실망을 느끼는 건 '바깥'이라는 시대적 진단으로 포착해낼 수도 있지만 '안'이라는 정신 그릇의 용도에 맞춰 포착해낼 수도 있다. 오히려 이렇게 말하는 학자들도 있다. 우리 인간이 일관성이니 일체감이니 '하나'니 하는 것들을 고정시키기 위해선 환상이 필요했다고 말이다. 그것이 때론 '민족'이 될 수도, '신'이 될 수도, '정체성'이 될 수도 있다고.
… 한 개인이 자신의 현상적 세계의 주요한 영역들에서 무력감에 압도되어 있다고 느낄 경우, 우리는 이를 함몰engulfment 과정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무력함/전유의 다른 극에는 전능감이 있다. 모든 인성 질환과 마찬가지로 그것은 환상 상태이다. 개인의 존재론적 안전감은 자기가 모든 것을 지배하고 있다는 환상을 통해 성취된다… 전능감은 방어기제이기 때문에 깨지기 쉬우며, 심리적으로 종종 무력함/전능 구성의 다른 극과 연결된다. P. 311 - 현대성과 자아정체성, 앤서니 기든스
나아가 이런 혼합 상태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데 온갖 부작용이 나타나는 건 간과할 수 없는 현실이기 때문에 비판이 가해지기도 했다. 바우만도 말하지만 이 상태는 일종의 '놀이-게임' 상태다.
… 현실세계와 서로 뒤섞여서 놀이의 하나하나의 행동이 현실세계에 반드시 파문을 일으키는 경우, 어떻게 되는가? 그때에는 놀이의 기본 범주 각각에 특유한 부패가 일어나는데, 이러한 부패는 억제와 보호가 모두 없어지는 데서 생겨나는 것이다. 본능의 지배가 다시 절대적인 것이 되기 때문에, 놀이라고 하는 고립되고, 보호된, 말하자면 중화된 활동에 의해 간신히 달래왔던 성향이 일상생활 속에 퍼져 일상생활을 가능한 한 자신의 요구에 복종시키려고 한다. 즐거움이었던 것이 고정관념이 되고, 도피였던 것이 의무가 되고, 기분전환이었던 것이 집착, 강박 관념이 되며 또 불안의 원천이 된다. p. 79 - 놀이와 인간, 로제 카이와
아마 여기에 한 번 더 물어야 할 거 같다. 우리 인간은 왜 혼란과 변화무쌍한 상태에 부정적 입장을 취하게 될까, 하고 말이다. 그것은 안정적이지 않고, 신뢰가 가질 않으며, 무엇보다 가벼운-휘발적이다. 여기에 '이성'이라는 이름으로 구축된 정신의 작용 중 하나인 '고정'-붙들기라는 '파악 행위'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무언가가 거기에 늘 있어야 안정적이라고 느낀다. 변화하지 않은 것에 좋음을 느낀다. 이것은 정주 생활을 시작한 호모 사피엔스 이래로 단 한 번도 사라진 적 없는 정신 기능이기도 했다. 아직까지도 '자연'이 높은 가치를 주고 있는 건 그것이 자기 생성적이라서가 아니라 늘 언제나 그 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변화'에 대한 감수성은 또한 그 자체로 관찰 대상이 될 수 있다. 이것에 대한 급진적 태도는 노마드적 삶, 도주주의, 가속주의로 설득력을 구축해낼 수 있겠으나 내가 느끼기론 접근은 같으나 방향은 잘못되었다고 느껴진다. 유연성이 슬로건이 된 21세기 대도시에서 이동할 수 있는 능력이 곧 특권이기도 한 '삶' 혹은 인격에게 변화란 긍정되어야 할 맹목적인 무엇이다. 소비자들에게 있어 제품의 변화란 영원히 갱신되어야 할 조건이다. 변화도 단순한 변화가 아닌 것이다. 거기에는 늘 변화가 무엇에의 어떤 변화인지에 대한 정동 반응-가치 판단이 결부되어 있으며, 부정적인 변화와 긍정적인 변화 간 유연함은 아직 자리잡지 못했다.
변화 자체에 대한 관찰은 휘발적이고 변덕스러운 무엇에 대한 불안정과 믿음 없음으로 귀결되는 걸 방지한다. 사실 몇몇 인류애적인 학자들은 지금도 여전히 '역사적 인식'을 요구하고 요청하고 있지만, 여기에는 조건부가 붙어 21세기 튜링스 맨들이나 소비자들, 나아가 기업가적 자아로 구축한 인간들에게 '역사적 인식'을 갖도록 하려면 코드를 바꿔야 한다는 조건을 붙였다. 나는 이에 동의한다. 우리의 삶이 불안정하게 느껴지고, 미래에 대한 안정 따위는 추호도 그려낼 수 없고, 실패나 실망에의 무방비에 대해서 무기력과 우울을 느끼기 쉽다는 것들은 쉽게 변하지 않을 거란 '금-돈'을 붙들게 만들지만, 반대로 이런 자극을 변화의 과정으로 보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할 수도 있다. 변화에의 인식 제고는 사실 무척 진부한 표현이긴 하다. 하지만 정체성이 사실은 정신이라는 그릇의 이름표일 뿐이라는 걸 알아볼 수만 있다면, 여러 사회학자가 말하는 소위 '정체성 이슈'는 그렇게 큰 문제가 아니라는 걸 알아볼 수 있고, 오늘날 사회 전반에 걸쳐 출현하는 온갖 문제 상황들이 여러 시대적 코드들이 중첩되어 혼합된 결과라는 걸로 추출하고 용해하고 순화할 수 있다는 걸 알아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런 건 반드시 공부를 해 언어의 복잡도를 끌어올려야만 가능한 게 아니라 융이 제안하듯 누구에게나 가능한 일이다. 항상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복잡한 언어 구축은 선두 주자가 아니라 후발 주자라는 것이다. 낭만성 코드로 비유하면 석양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달빛의 은은함이다. 부엉이가 날개를 피는 것과는 별 상관이 없지만, 그런 표현에 담긴 '역할'은 분명 의의가 있다.
이것이 가능하려면, 특히 우리에게 가능하려면 가장 먼저 만나는 '첫인상'들이 변해야 한다. 한 사람이 하루에 만나는 온갖 언어들이 점진적으로 교묘히 변해야 한다. 이런 집단 의식은 결코 하루아침에 변형되지 않는다. 그것은 폭력이라는 강력한 힘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 이런 생각을 하는 나는, 아마 눈치 채는 사람들도 많겠지만 과도해 보일 수도 있는 '언어의 힘'을 믿기 때문이다. 언어의 힘은 단순히 말해 우리를 바꾼다. 우리가 변해야 한다면, 나는 그것이 곧 언어를 바꾼다는 말과 같이 들린다. 언어는 언어일 뿐이다. 만약 언어가 월담하여 세상을 바꾸려고 하는 건 언어의 문제라기보다 언어를 대하는 정신의 문제로 봐야 한다. 언어로 사람을 바꾸려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언어를 바꾸면 사람도 변한다. 이것은 정확히 마뚜라나-바렐라 선생들이 그려낸 도식과 같다. 나는 그 도식을 믿기 때문에 20대 때부터 줄곧 언어를 바꾸며 사람을 변화시키고 삶을 변화시켰다.
아마 다수의 사람들은 이런 도식이 어디에 어떻게 적용되고 활용될 수 있는 모델인지 자리매김하는 데 애를 먹을 수도 있다. 그저 [앎의 나무]에 나타나는 특정 관찰 이론에 활용된 도식일 뿐이라고만 사용할 수도 있다. 이 도식을 '삶' 전반에 걸쳐 적용시켜 살아가는 데 활용하는 건 너무 뜬구름잡는 이야기로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느끼기론, 이런 게 옛부터 말하는 '지혜'다. 그리고 이런 지혜는 대개 변하지 않는, '자리매김 하는' 안정감을 주는 무엇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정신 안에서 벌어지는 작용과 그걸 활용하는 태도는 분별해야 한다. 우리가 '안정감', 믿음, 신뢰 등등을 갈구하고 또 필요로 하는 건 비유컨데 서핑과 닮았다. 우리가 파도를 타지 못하면 파도의 변화무쌍함에 실망하고 좌절하고 이를 때로는 사악하게 느낄 수도 있다. 이 파도를 타는 행위를 두고 '기회주의자', '자본주의의 개'라고 진정성어린 눈으로 가치 판단을 할 수도 있다. 파도가 일렁이는 곳이 시장이 됐든, 주식장이 됐든, 광장이 됐든, 인터넷이 됐든, 내면이 됐든 우리는 그에 따른 기존의 태도로 일관할 수도 있다. 우리가 안정감을 느끼는 건 굉장히 중요하다. 인류가 그렇게 살고 있기 때문이다. 정주 생활이 아닌 완전히 다른 생활을, 우리는 아직 구축해내지 못했다. 이 기본 사실로 말미암아 알아볼 수 있는 건 안정감이라고 하는 것이 어떻게 달리 적용되어야 할지지, 파도를 타는 행위 자체가 불안정하다고 실망만 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서핑 보드는 각종 기계 장치, 제도, 법, 규범 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로 하여금 불안정 속에서 안정을 위탁할 수 있는 '인공물'이다. 인공물이 없다면 우리는 애초에 파도를 탈 수가 없다. 우리가 안정감을 가져야 하는 건 그보다 좀 더 후퇴한 관점, 파도 타기를 상상할 수 있는 '자유'다. 이 상상을 하지 않음 또한 그려낼 수 있는 가능성이다. 이 진부한 어휘들이 새롭게 활용되려면, 결국 우리가 매만져야 할 건 언어의 변용이다. 사실 정신 안에서 맞닥뜨리는 온갖 한계는 대개 언어의 한계와 맞물려 있다. 그걸 파고들고자 시도한 게 바로 자기개발로 나타난 기업가적 자아다. 이런 시대의 영향은 곧 우리로 하여금 '관찰'할지를 자극한다고 볼 수 있다. 관찰의 변혁은 현재 진행형이다.